쿠바에 가다

마지막 사회주의 지상낙원

검토 완료

안악희(sedition)등록 2017.01.10 13:05
서문

이제 한국인들은 해외여행을 꽤 많이 다니는 사람들이 되었기에, 한국인들이 가보지 못한 곳은 거의 없을테고, 고로 어딘가를 다녀 와서 여행기를 쓴다는 사실도 적잖이 계면쩍은 일이 되었다. 필자는 재작년 여름, 쿠바를 다녀왔다. 아직 한국인에게는 생소한 쿠바에 관해 필자가 보고 듣고 느낀것을 글로 남기는 것이 여러모로 좋다고 판단이 되어 졸고를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이 글은 2015년 겨울에 쓰여져 공개 시기를 놓쳤다가, 피델 카스트로 전 의장의 임종을 맞이하여 개정 후 발표함을 미리 서두에 알려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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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더운 8월 말이었다.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쿠바로 향했다. 정보 착오로 여행자 카드를 사기 위해 파리에 잠시 들른 뒤(쿠바는 입국 비자 대신에 여행사나 항공사를 통해서 여행자카드를 구입해야 입국이 가능하다), 2015년 8월 25일, 나는 하바나의 호세 마르티 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밤 비행기로 도착했지만 공기는 아직 덥고 무거웠다. 출입국 심사대에는 스페인과 남미에서 날아온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1959년 혁명 이전에도, 이곳은 "카리브해의 진주"라 불리며 남북아메리카의 많은 관광객들을 맞이했다고 한다.
공항은 넘쳐나는 관광객들에 비해 별로 크지 않았고, 그렇기에 출입국 심사와 짐을 찾는 과정이 오래 걸렸다. 천신만고 끝에 공항을 빠져 나오자, 택시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야간에 호세 마르티 공항에서 하바나로 들어가는 방법은 택시밖에 없었다. 우리는 공항에서 환전을 한 후, 택시를 타고 어두컴컴한 도로를 달렸다.

쿠바 입국을 위한 여행자 카드 쿠바는 입국하기 위해 여행자 카드를 사야 한다. 이 여행자 카드는 국내에서는 살 수 없고, 프랑스 현지의 여행사에서 살 수 있다. 만약 에어 캐나다를 이용한다면 기내에서 살 수도 있다. ⓒ 안악희


쿠바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화폐를 쓴다. 쿡(CUC)이라는 화폐와 쿱(CUP)이라는 화폐를 쓰는데, 전자는 외화를 바꿨을때 주는 돈이고, 후자는 쿠바 내에서 쿠바인들끼리 쓰는 돈이다. 이는 외화유출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인데, 북한에도 "외화 바꾼돈 표"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아주 어릴적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본 사회주의 체제를 실제로 접하니 생경했다. 당연하지만, 쿡과 쿱은 다른 환율이 적용되고 있었다. 1쿡은 1달러의 값어치를 했고, 1쿡은 0.25쿡과 같은 가치였다. 쿠바의 물가는 실제로는 상당히 싼 편이지만, 외국인들은 쿡을 써야 했기에 체감상 환율 차익을 보기는 어려웠다.
공항에서 아바나로 들어가는 길은 황량했고 간혹가다 민가가 눈에 띌 뿐이었다. 마치 옛날 한국 영화에 나오는 지방도로를 달리는 듯 했다. 비로소 저개발 국가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로에 드문드문 서 있던 정치선전 포스터와 간판들이 이채로웠다. 베트남, 중국과 비교해 봤을 때, 지구상에 몇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굉장히 옛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바나의 야경 어둠이 깔린 아바나. 20세기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바나의 야경은 고요했다. ⓒ 안악희


밤 늦은 시각이 되어, 나는 엘 프레지덴테(El Presidente) 호텔에 도착했다. 이 호텔은 192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혁명 전까지 미국에서 온 귀빈들이 주로 묵었다고 한다. 바닷바람이 밀려오는 역사적인 곳으로서 굉장히 고풍스러웠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이 호텔이 앞으로의 여행에 어떤 고통을 선사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오랜 비행의 피로도 풀 겸, 호텔 바에서 샌드위치와 모히토를 마시며 호텔 주변을 둘러 보았다.
엘 프레지덴테 호텔 옆에는 작은 광장 같은것이 있었다. 나는 한동안 광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광장에는 펑크족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놀고 있었다. 모히칸 머리를 한 젊은이도 있었고, 미국 드라마 "선즈 오브 아나키(Sons of Anarchy)"의 티셔츠를 입은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있었다. 런던이나 도쿄에서 만날 수 있던 펑크족들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쿠바에 펑크족들과 펑크밴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공교롭게도 이들을 도착한 첫날 볼 수 있을줄은 몰랐다. https://youtu.be/LOIFYbrCEW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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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 되자, 나는 시원한 바람과 뜨거운 공기가 뒤섞이는 것을 느끼며 잠을 깼다. 에어콘이 분명 밤 새 돌아가고 있었을텐데, 방은 여전히 후덥지근 했다. 날이 밝자 방 안의 많은 것들이 더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 쿠바에 도착하면서 어느정도 예감은 했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좋은 서비스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호텔 테이블 위의 환영 카드(삼각통형으로 만든 카드) 안쪽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고, 벽장에 빨래 주머니가 없어서 따로 요청해야 했다. 객실 온도의 주범은 창문이었다. 호텔이 고풍스러운 것은 좋은데, 객실 창문까지 모두 50년은 족히 되어보이는 나무 창틀로 되어 있었다. 에어콘의 냉기는 고스란히 창문 틈새로 빠져 나갔다. 이래서는 에어콘이 아니라 냉장고 냉장시설이 벽에 붙어있어도 소용이 없다 싶었다.
호텔 1층에 마련된 식당으로 조식을 먹으러 내려 갔을때, 나는 의외로 식기들이 상당히 낡은 데다가 테이블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음식들은 풍성했지만 그렇게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쿠바에서 놀란 것 중에 하나는 신선한 채소를 보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쿠바는 한국보다 85퍼센트나 많은 농경지를 가지고 있고, 자연 환경도 좋은 편이지만(윤정현. (2015). "쿠바의 지속 가능한 농업과 정책". 한국 농촌 경제연구원. http://library.krei.re.kr/dl_images/002/038/E03-2015-07-08.pdf ) 수송체계에 상당히 문제가 있는듯 했다. 그래서 도시농업이 많이 발달했다고 한다. 일반 인민들이 먹는 채소와 외국인을 상대로 한 상업 시설의 채소는 차이가 있는듯 했다.

ⓒ 안악희

하지만 술은 맛있었다. 호텔이나 바에서 대개 두 종류의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하나는 부카네로(Bucanero)라는 어두운 빛깔의 라거 맥주였고, 하나는 크리스탈(Cristal)이라는 밝은 라거였다. 부카네로는 한국에서도 마셔본 적이 있었다. 크리스탈은 동아시아쪽의 라거와 비슷한 맛으로, 가볍고 상쾌했다. 이 외에도 쿠바의 인민들이 마시는 로컬 맥주들이 있다고 했지만, 쿠바 특유의 사회적 구조상 관광객이 접근하기는 힘들었다.
한 낮의 쿠바는 정말 찌는듯이 더웠다. 나는 아바나의 거리를 걷고 싶었지만, 적도의 열기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바나의 대중교통은 주로 버스였는데,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어떤 이정표나 노선도를 발견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버스는 저마다 제각각의 색깔과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바나의 대중교통 체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바나의 시내 버스들은 주로 종점이 버스 전면에 써 붙여져 있고, 승객은 그것을 보고 행선지를 유추해서 버스 운전기사에게 어디로 가는지를 물어본 뒤 탑승하는 시스템이라 한다. 결국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하면 절대 이용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결국 나는 택시를 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택시는 무척 비쌌다. 한번 타는데 10쿡에서 15쿡은 소비해야 했다. 다시말해 서울 시내에서 타는 택시값과 별 차이가 없었다. 사실 쿠바는 워낙 올드카의 천국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나는 쿠바 택시를 어느정도 기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쿠바의 택시들은 아주 멋있었다. 55년형 시보레 세단과 59년형 포드 선더버드 컨버터블을 언제 타보겠는가?

ⓒ 안악희

그러나 올드카들은 막상 기대와는 달랐다. 겉 보기에는 아주 훌륭했으나 내부는 정말 낡디 낡아서 엉망 진창인 경우가 꽤 있었다. 심지어 승차감이 흔히 우리가 시골에서 탈 수 있는 경운기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아마도 서스펜션과 쇽 업서버가 낡았기 때문인듯 했다. 심지어 한번은 49년형 머큐리 세단을 탔는데(마치 40년대 뉴욕 갱 영화에 나오는 멋진 세단이었다), 차내에 엔진오일 냄새가 진동을 했다. 심지어 에어콘도 없었다. 이날 이후 나는 오로지 "기아" 택시나 "현다이" 택시만을 탔다.
한편 역사 관련 유적들은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호세 마르티 기념관부터 올드 하바나의 해안가에 마련되어 있던 레알 푸에르사 요새도 각종 유물들을 깔끔하게 전시해 놓고 있었다. 산타 끌라라의 체 게바라 기념관은 숙연한 분위기였고, 세계 혁명의 이상을 품은 이들의 성지다운 무게감이 있었다. 이러한 유적들을 둘러 보면서 쿠바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굉장히 자랑스러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 손으로 미국이라는 거대한 패권국가를 몰아내고 자신의 역사를 개척한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부심은 쉽게 얻을 수 있는것이 아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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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의 상업시설은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친척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오비스포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가게마다 대부분 비슷한 공예품이나 체 게바라 사진을 팔고 있었다. 책은 정치 선전물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어느 서점의 컴퓨터/IT 섹션에서는 윈도우 XP에 대한 책도 볼 수 있었다. 간혹 수입품을 파는 상점을 볼 수 있기는 했지만, 그런 곳은 쿠바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어김없이 비쌌다. 퓨마와 아디다스를 파는 스포츠웨어 샵 앞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모두 쇼윈도에 진열된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옷 가게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많았는데, 전반적으로 중국산이었다. 특히 속옷이나 스타킹은 중국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경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의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아바나 시내를 다니면서 대형 마트나 수퍼마켓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뉴 하바나에서 하나, 바라데로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산타 클라라에서는 양곡 및 생필품 배급소 비슷한 것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이 쿠바인들의 시장에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물론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이 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쿠바에서 개인에게 허용된 상업 활동은 택시, 식당, 카사(민박)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거리에 택시 운전사와 카사 주인들의 호객행위가 치열했다. 심지어 야간에는 한국의 60~70년대에 존재했었다고 하는 택시잡이도 볼 수 있었다. 길에서 관광객이 두리번 거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택시잡이가 나타나서 택시를 잡아주고 1쿡 정도를 챙긴다.


이제 막 쿠바의 개인 사업이 기지개를 켜서인지, 개인 식당들 중에는 맛이 썩 괜찮은 것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호텔 식당은 영 상태가 안좋았다. 아마도 모든 호텔이 국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전반적으로 호텔 식당의 음식들은 관공서 구내식당 음식을 먹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카피톨리오 남쪽의 개인 식당은 굉장히 맛있었다. 규모도 으리으리했고, 인테리어도 유럽의 레스토랑 못지 않았다. 나는 엘 과히리또(El Guajirito)라는 식당에 들를 수 있었다. 이 곳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호텔 직원의 도움으로 알게 된 곳이었는데, 음식도 맛있었고,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이 식당에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생존자들이 젊은이들과 만든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쿠바의 변화가 감지되는 곳이었다.


특히나 바라데로의 리조트는 굉장히 근사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로비에 마련된 특설 무대에는 스페인에서 온 디제이들이 일렉트로니카 노래들을 믹싱하고 있었고, 위스키 바와 편의점이 완비되어 있었다. 주변만 봐서는 이곳이 쿠바인지 중남미 어딘가의 휴양시설인지 구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투숙객 중에 쿠바인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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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역시 사회주의의 이상은 인간의 평등한 삶과 해방을 위해 출발한 만큼, 쿠바는 생각 외로 열려있었고 자유로워 보였다. 거리에서는 그야말로 '힙하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을 자주 볼 수 있었고, 이태원에 클러빙 하러 나온듯한 패션의 청년들도 많았다. 앞서 말했듯 펑크족들도 볼 수 있었다. 쿠바의 자유로움을 엿볼 수 있는 단면으로, 관공서나 박물관의 여성 직원들은 대부분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패턴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액세서리나 매니큐어도 화려했다. 무표정한 인민복 차림으로 대표되는 동양식 사회주의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동양의 사회주의는 유교적 가치에 크게 영향받았기 때문일까? 쿠바는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개성을 표출하는데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 안악희

원론적으로 쿠바는 노동자의 천국이 맞았다. 모든 이들은 시간만큼 일하고, 감정노동 따위는 없었으며, 의식주는 적절하게 공급되고 있었다. 무상의료의 혜택은 전국에 골고루 퍼져있었다. 대가 없는 호의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받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호텔 직원들은 자신들의 기분이 별로인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그들의 친절은 진짜였다. 그들은 무언가 고객이 요구하는 과도한 사항을 지적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한번은 파르타가스 시가 상점에 들렀을 때, 나는 한 점원에게 시가에 관해 이것저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설명을 하던 중, 납품하는 직원이 시가 박스를 한아름 들고 들어오자 반갑게 맞이하며(둘이 꽤 친한 친구인듯 했다) 자기들끼리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한국 같았으면 직원들이 자기 일 하느라 고객은 거들떠도 안 본다며 난리가 났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계적 친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맞는것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각자 제 위치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왜 필요이상의 감정을 소모해야 하는가? 소비자로서의 나도 존중을 받아야 하지만 노동자로서의 나도 존중을 받아야 한다. 소비자로서의 권리 또한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값진 시간이었다.
다사다난한 곳이지만 여하튼 쿠바의 인민 생활을 위한 기초적인 제도는 제법 잘 유지가 되고 있었고, 이곳이 노동자의 천국임은 부정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순박했고, 격의없이 누구나 평등했다. 또한 성평등도 상당히 이루어진듯 했다. 박물관이나 세관에는 여성직원이 더 많았고, 일상적으로도 일하는 여성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호텔의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직원도 여성이었고, 박물관 사무실은 아예 여성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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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는 와이파이 열풍이 불고 있었다. 와이파이는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조금씩 퍼져나가던 것이, 이제 쿠바 인민들에게까지 확산된 것이다. 해가 진 뒤 호텔 근처에는 쿠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호텔마다 모이는 부류가 달랐다는 것이다. 엘 프레지덴테 옆에는 펑크족들이 모였고, 그나마 환락가라 부를 수 있는 아바나 리브레 호텔 근처에는 힙한 패션의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나씨오날 호텔 옆 말레콘 근처에는 좀 수수해보이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쿠바의 인터넷 보급률은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나는 처음 아바나에 도착했을때 왜 이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곧 와이파이 열풍을 알게 되고 나서는 일견 이해가 갔다.


나는 우연히 쿠바 지식인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양가적 감정을 잠시나마 들여다 볼 기회가 있었다. 한번은 아바나 대학교의 교정을 거닐고 있었다. 기왕 이렇게 온 김에 '아대 학식'이라도 맛보자며 학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교정에 장갑차가 전시되 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때 학생 두 명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 명은 라틴계 백인이었고 한 명은 흑인이었다.
"그 장갑차는 진짜다. 혁명군이 혁명때 끌고 들어온 것이다."

아바나 대학교 교정의 장갑차 쿠바 혁명 당시 혁명군이 끌고 들어온 장갑차. 피델 카스트로도 아바나 대학교의 동문이었다. ⓒ 안악희


그렇게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이 낯선 동양인이 반가웠는지 학교에 관해 이런 저런 설명을 해 주었다. 그들은 혁명 관련 기념일이면 동문 선배인 피델 카스트로가 성대한 기념식을 치르고 학자금을 기부하고 간다고 했다. 또한 그들은 체 게바라는 인민을 위해 싸웠고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며 칭송하기도 했고, 학교의 시스템에 대해 설명해 주기도 했다. 혁명 전까지 흑인은 교육의 기회가 없었으며, 학생들은 매주 금요일 학교의 시가 공장과 럼 공장의 일을 도움으로서 학교 재정을 충당한다고 했다(이것은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의 주간 노동일 제도와 비슷했다). 아바나 대학 근처의 집들은 원래 부촌이었는데, 혁명 이후 부자들이 다 도망가서 이제 학생들이 산다거나(그러고 보니 집들이 좀 낡긴 해도 기본적으로는 으리으리해 보였다), 아바나 클럽이나 바카디는 혁명 후 미국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진짜 쿠바 럼은 레전다리오 하나 뿐이라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 안악희

나는 그들에게 아바나 대학교의 학생식당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대부분의 식사는 기숙사에서 하고, 학교 안 카페테리아는 없다고 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있기는 했다). 그들은 "어차피 우리 요즘 레포트 쓰는 기간이라 시간 많은데, 학교 근처에서 술이나 한잔 할까"라고 했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이끌려서 학교 근처의 술집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쿠바의 인종 화합을 상징하는 '엘 네그롱'(럼과 콜라와 바질과 레몬을 섞은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쿠바 리브레와 비슷했다)이라는 칵테일을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본심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쿠바는 거대한 박물관 같다느니, 인터넷은 외국 학생들에게만 열려있고 자신들에게는 제한적이라는 이야기 부터, 자유가 없다, 이곳은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학생은 자신의 집은 할머니부터 3대가 함께 산다고 했다. 집을 정부에서 공짜로 주긴 했지만 다른 집에 살려면 정부에 렌트를 지불해야 하고, 의료는 공짜지만 실력있는 의사들이 외국에 의료 교류차 나가서 안 돌아오는 바람에 의대생들에게 진찰받는 일이 허다하다고 했다.
그들은 인터넷이나 책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 주었다. 아바나 인구 3백만 중에서 3분의 1인 백만명 가량이 경찰이거나 경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자유가 없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들은 나와 영어로 대화했지만, 민감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목소리를 낮췄다. 한편으로는 학내 노동의 댓가로 럼과 시가를 싼 값에 살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시가를 별로 피우지도 않는데…"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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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쿠바는 분명 묘한 나라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순박했고, 외부에 비치는 독재 국가로서의 이미지와 달리 생동감 있는, 젊음이 넘치는 곳이었다. 또한 미국의 힘에 맞서 수십년동안 체제를 지켜온 대단한 곳이다. 성평등도 상당히 이루어져 있고, 국가의 기틀도 생각보다 튼튼해 보였다.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 나라였다.


내 생각에 아마도 1959년 혁명이 성공했을 당시 쿠바는 아주 이상적이었을 것 같다. 무상교육, 무상의료와 의식주가 해결된 지상 낙원이었을것 같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다. 쿠바는 그 자체로는 너무나도 멋지고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제3세계라는 단어도 실종된 지금, 이 낙원의 의미를 한번 제대로 되새겨 볼 이유가 있는듯 하다. 쿠바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쿠바가 이룩한 노동자의 낙원에서 우리가 기필코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 그늘에는 또 무엇이 있는지 말이다. 피델 카스트로도 세상을 떠난 지금, 과거의 이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다시한번 복기 할 필요가 있다.

여담 : 쿠바의 징병제
쿠바에도 징병제가 있었다. 모든 쿠바 남성들은 2년간 군 복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했다. 아바나 대학에서 만난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여성은 선택에 따라 군 복무를 할 수 있으며,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 한 뒤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진학한다고 한다. 한편으로 나는 호기심이 동해서, 좀 더 자세한 것을 물어보았다.
"한국은 징병 신체검사가 굉장히 허술하다. 군대의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 국가에서 신체등급 기준을 조정하는 바람에 몸이 허약한 사람들이 군대에 입대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현역 판정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민간 병원에서 추가적으로 진단을 받아서 군대에 안 가는 경우도 있다. 쿠바는 어떤가?"
"쿠바는 모든 병원이 국영 병원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다. 만약 건강상 문제가 있거나 정신과적 질환이 있다면 바로 군 병원으로 보내져서 검사를 받기 때문에 그런 상황 자체가 불가능하다. 단, 만약 당신이 게이라면 조리병이나 의무병 같은 비전투병으로 복무가 가능하다."
그들은 징병 신체검사가 허술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워 하는 듯 했으며, 한편으로 건강상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왜 징병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듯 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개인의 건강 정보를 모두 국가가 관리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사실상 의료 체계가 감시 체계로 작용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은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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