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닭목을 먹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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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은(sjeunn11)등록 2017.01.09 09:54
치킨을 먹을 때 반드시 지키는 나만의 원칙이 있다. 가슴살, 다리, 날개 모든 부위의 치킨을 먹더라도 닭목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꽤 혐오스럽다고 느낄만한 이유가 있다. 닭은 보통 사료 혹은 벌레 따위를 모이로 먹으니까 이 닭이 살아생전에 목으로 삼킨 벌레가 아직도 남아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래서 닭의 모가지를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허무맹랑한 상상일 뿐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요즘의 닭들은 대개 대량으로 사육되어 A4용지만한 닭장에서 자란다. 최소의 비용을 위한 조치다. 이런 닭들에게 저렴한 건식 사료가 아닌 벌레를 일일이 잡아다 줄 리도 없거니와, 결정적으로 닭이 무언가를 먹고 있을 때 도축당할 가능성은 제로다. 닭 사육장에서는 죽음 또한 시간에 맞춰 일괄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닭의 목을 혐오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나의 사고 체계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생각하는 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꼬꼬댁 소리를 내며 살아있는 닭, 하나는 튀기든 삶든 굽든 어쨌든 요리의 형태로 식탁에 오른 닭고기다. 나의 사고 안에는 살아있는 닭과 요리된 닭이 있을 뿐이다. 즉, 닭의 삶과 죽음 사이의 과정은 통째로 삭제 돼 공백으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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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닭은 죽지 않고 치킨이 된다. 죽지 않고 튀김옷을 입고, 죽지 않고 180도의 뜨거운 기름으로 뛰어든다. 불편한 공장식 대량사육체제의 기억이 사라진 자리에는 식(食)으로서의 즐거운 욕구 충족이 있을 뿐이다. 닭 뿐 아니라 간혹 돼지 혹은 소의 고기를 파는 음식점에서 그 간판에 제 살덩이를 들고 웃는 소와 돼지의 삽화를 끼워넣은 것을 볼 때면 가축동물의 죽음에 관해 우리가 얼마나 둔하고 무정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인지 깨닫고선 흠칫 놀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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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리고 그 망각은 다분히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 불편함의 임계치에 다다르기 바로 직전까지만 인간은 기억한다. 임계점을 넘은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서 우리는 '굳이' 떠올리고자 하지 않고, '굳이' 고민하려 하지 않는다. 연민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불편함에 대해서만 통용되는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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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의 죽음에 무딜 대로 무뎌진 우리를 돌아보는 것은 물론 수천만마리의 닭과 오리들이 살처분되는 안타까운 현실 탓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공백으로 남겨둔 죽음들이 비단 짐승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습기 옆에서 자던 아이가 하루 아침에 싸늘한 주검이 됐다. 공단에서 꿈을 키우던 청년은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지나쳐 온 수많은 죽음들에 대해 우리는 어디까지 기억하고 또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죽음들에 대해 좀 더 의식적으로 좀 더 가까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때때로 죽음 안에는 살육의 현장만큼이나 불편한 진실들이 녹아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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