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독립투쟁의 현장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

김학철, 백정기, 김시현 의사 등이 영어의 몸이 되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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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우(local44)등록 2017.01.23 15:14
1965년에 국민들의 저항속에 체결된 박정희의 제1차 한일협정(청구권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이후 50년 동안 국민들은 아직도 페지를 요구하고 있는데 2015년 박근혜정부는 제2차 한일협정(한일위안부협상)을 통해, 일본이 한반도를 군사력을 동원하여 무단으로 점령한 후 저지른 온갖 만행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자 하나 대한민국 국민들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흐름과 인간의 기본권마저 말살한 만행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에 분노하고 있다.

지난 해 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감옥섬으로 유명한 하시마섬(端島, 일명 군함도)을 유네스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조선인 강제동원을 비롯한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의 강제노역, 그리고 죽어간 많은 희생자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강제노역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위령비인 나가사키현 다카시마 공양탑(高島 供養塔) 가는 길도 폐쇄하면서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않고 있음을 분노하는 사람들이 항일독립투쟁을 하다 일본에 잡혀 옥고를 치룬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형무소 본원은 항일독립투쟁중 가장 치열하게 싸움을 한 의사들이 영어의 몸이 되었던 곳이나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있는 나가사키 형무소 우라카미 분소는 항일독립투쟁하다 옥고를 치룬 독립투쟁 의사들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음에도 잘못 인지되고 있어 본원인 이사하야(諫早) 형무소를 찾아 항일독립투쟁 의사들을 추모하고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못다한 친일청산의 필요성을 공유하고자 하였다.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는 조선의용대(군)의 마지막 분대장으로 알려진 김학철선생이 1941년 호가장전투(胡家莊戰鬪, 조선의용대 30명이 일본군 점령지인 원씨현의 부락민들에게 항일선전공작을 수행하다 친일파인 구장의 밀고로 500명의 일본군과 전투하여 의용대 4명과 팔로군 등이 전사)에서 다리 부상을 당하고 잡혀 이곳에서 썩어가는 다리를 절단하였다. 당시 일본은 김학철선생에게 전향서를 쓰면 총상을 입어 썩어가는 다리를 치료해 준다고 유혹하였으나 끝내 거부하고 다리를 절단한 곳이기도 하다.
삼의사로 열려진 백정기 의사도 육삼정 의거(1933년 3월 상해 공동조계-共同租界, 외국인 공동 관리지역-내 고급 음식점 육삼정에서 상해 주둔 일본군 사령관과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국민당 관계자들과 회합 소식 듣고 암살할려고 한 계획)를 모의하다 체포되어 나가사키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의열단 출신인 김익상의사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21년이나 갇혀 있었다. 1921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에 잠입하여 폭탄을 던진 후 탈출하였고, 1922년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은 3월 28일 선편으로 황푸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올 때 총을 쏘았으나 신혼여행차 온 영국여성이 맞아 실패하여 붙잡혔다. 이후 사형을 언도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21년동안 옥고를 치루었다.
영화 '밀정'에서 김우진 역할을 한 실제 인물인 의열단 출신인 김시현의사도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에서 5년동안 갇혀 있었다.

나가사키 형무소 제를 올리는 답사단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 정문앞에서 최필순선생이 한국에서 손수 만든 음식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옥고를 치룬 독립투사들을 위한 제를 올리고 있다 ⓒ 박진우


항일독립투쟁시 일본 국적을 가졌고, 해방후 반민족행자들의 청산을 막는 이승만대통령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미수에 그쳐 사형선고를 받았던 마지막 의열단(義烈團) 김시현의사는 1966년 사망 전에 평생 동지였던 부인인 권애라 여사에게 "권동지 미안하오, 내가 그래도 조국 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도 반쯤밖에 독립을 이룩하지 못하였소, 남은 여생을 조국 통일 사업에 이바지 해 주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외에도 원심창 의사, 이강훈의사 등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옥고를 치루었다.
답사단이 어렵게 물어 물어 찾아간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
형무소의 정문을 보는 순간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형무소의 붉은 벽돌, 형무소 정문의 아치형식, 형무소 문을 지지하는 담벼락 등 항일독립투쟁가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가두었던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이육사(이원록)의사가 사망한 북경형무소와는 전혀 다른 형무소였다.
이사하야형무소는 일본 개항기에 서구 열강과 맺은 불펼등 조약을 해소하기 위해 주력했는데 서구 열강이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의 이유중 하나로 일본의 전근대적 사법제도를 제기하였기 때문에 일본은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위해 5개의 형무소를 건설하였다 한다. 치바(千葉),  나라(奈良), 가나자와(金澤), 가고시마(鹿児島) 그리고 나가사키(長崎) 형무소 등 메이지시대 5대 감옥체계를 구축하였다(이사하야 형무소 안내문).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나가사키현 미나미이사하야(南諫早)시 노나간초 508-1 번지, 미나미이사하야(南諫早) 우체국 앞 골목)는 1901년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부터 형무소로 사용하였는데 옥사 구조도 서대문형무소의 구조와 유사한 판옵티콘(Panopticon)방식으로 건축이 되었다. 이 방식은 최소한의 감시자가 많은 수감자를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감시와 통제의 방법으로 옥사 중앙에서 모든 옥사를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를 비롯해 메이지 5대 감옥은 동경대학을 나온 야마시타 케이지로(山下 啓次郎)가 건축하였다.
  1992년에 형무소가 이전하면서 재개발되어 지금은 상업시설과 주택지, 이사하야 유치원 등이 들어서 있었는데 항일독립투쟁가들을 가두었던 공간으로서의 설명을 통해 잘못된 역사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 주소는 미나미이사하야(南諫早) 노나카초 508-1 번지로 되어 있으나 찾기가 쉽지 않았고, "미나미이사하야(南諫早)우체국" 앞 골목에 있어서 우체국 주소인 나가사키현 이사하야시 다테이시마치 1030로 찾아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 전경 판옵티곤 방식으로 건축되고 1908년부터 조선의 항일독립 투쟁가들을 잡아 가두고 감시하고 통제하였던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로 일본의 메이지시대 5대 형무소임 ⓒ 박진우


추모제에서 항일투쟁 답사에 동행한 김수곤선생은 조선의용대의 마지막 분대장인 김학철선생이 살아 생전에 하신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는 말씀으로 추도사를 대신하며 답사의 의미를 되새겼다

답사를 통해 나가사키 이사하야 형무소나 우라카미 분소 어디에도 일본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반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의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어어받기 위한 대한민국 정부의 노력도 찾아보기가 어려워 가슴이 아팠다. 
역사의 반복은 침묵과 외면으로부터 출발한다.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그리고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왜곡함에도 침묵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모습을 보며 반성과 분노하는 국민들이 나서서 진실을 찾아 나서는 길은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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