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아날 수 없었던 당대에 대한 쓸쓸한 공감

김훈 신작 소설 ‘공터에서’를 읽고 ... 비애로운 당대인들을 위한 오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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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완(chogaci)등록 2017.02.21 11:53
작가의 문체가 이전보다 더 쉽게 읽힌다. 고희를 앞둔 나이 탓 보다는 후기에 밝힌 것처럼 얼마간 병원비를 많이 지불한 게 큰 것 같다. 기력이 없다는 것은 이전처럼 깊게 고민하고, 어휘의 산을 헤매지 않으려는 나태함일 수 있다. 하지만 독자로서는 작가와의 거리를 더 좁힐 수 있기 때문이다.
 

김훈 신작 공터에서 표지 비루먹은 표지의 말처럼 비애로운 삶을 살아온 이들에 관한 소설 ⓒ 해냄


김훈의 소설 '공터에서'(해냄 간)는 '작가의 말'에 밝힌 것처럼 늘 영웅적이지 못하고 머뭇 거리고, 두리번 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니는 남루한 이 시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그려낸 소설이다. 일단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관심이 간 것은 이 소설 인물들과 작가의 삶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진 것일까였다.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들은 사람들의 기억 뿐인 것일까 아니면 아니면 작가의 삶과 가장 농밀하게 닿은 글일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그간 우리가 잘못 읽고 있던 김훈의 참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90년대 초 대학을 다닌 나에게 김훈은 박래부 기자와 같이 연재한 '문학기행'이나 '풍경과 상처'의 미문으로 소수의 독자층을 가진 작가였다. 그러나 이후 그는 '칼의 노래'나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같은 소설은 물론이고 '자전거 여행'이나 '라면을 끓이며' 같은 산문집까지 베스트셀러 대열군에 들어가며, 안정적인 독자층을 가진 직업작가군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본다면 그가 글을 통해 밥벌이를 본격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2001년 '칼의 노래'가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였다. 작가가 1948년생이니 근 55세가 되어서야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나 역시 작가를 본 것은 1997년 즈음 시사저널에 업무차 들렀을 때 부스스한 눈으로 마감을 챙기던 것이 유일하다. 당시 문학 전공자였던 나에게 김훈은 이미 상당한 인상이 있었기에 그를 본 것이 의미있었는데, 내 첫 인상은 디스크 초기 환자가 하기 싫은 일을 밥벌이로 인해 억지로 하는 느낌이었다. 이후 그는 유능한 편집자라는 느낌보다는 미문을 쓰는 작가로서의 입지가 굳어졌고, 국민일보 한국일보 한겨레를 거친 후 전업작가로 들어섰다.
 
그럼 이번 소설과 작가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 때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던 하일지가 쓴 논문집 '소설의 거리에 관한 이론'을 보면 작가와 독자의 사이에 작품이 있다고 본다. 이런 상황이라면 작가가 자신에게 너무 가까이 가면 독자와 작품은 멀어질 수 밖에 없고, 상대적으로 작품이 독자에게 가면 작가와 멀어지는 개념이다. 통상적으로 소설가들은 독자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일인칭을 피하고, 자신의 삶과 작품과의 거리를 두려는 습성도 강하다.
 
그런 측면에서 김훈의 이번 소설을 보면 어떨까. 우선 소설 속 아버지 마동수는 작가의 부친인 김광주(1910~1973) 작가와 시기적으로 상당히 닮아있다. 소설 속 마동수와 김광주의 출생연대는 같고, 사망시기 만 마동수가 1979년으로 약간 늦다.
 
그렇다면 김훈의 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주인공 마차세와 작가 김훈은 어떤 시기적 관계가 있을까. 김훈은 한국전쟁 전인 1948년생이고, 마차세는 1953년생이니 두 인물 간에는 5년여의 차가 있다. 실제로 1979년 12·12 박정희 시해사건 당시 김훈은 한국일보 기자였다. 반면에 마차세는 동부전선 GOP에서 상병이었으니 상당한 간극이 있다. 그럼에도 경제지에서 3개월만에 쫓기듯이 퇴직하는 모습이나 시대에 대한 전반적인 기술은 김훈과 아주 멀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가 쓴 소설 가운데 자신의 삶을 기초로 한 '내 젊은 날의 숲'(2001년)이나 '강산무진'(2006년)이 좀 더 서사적으로 변모한 것으로 보면 맞을 것 같다.
 
사람들의 오해 가운데 하나가 김훈을 아주 참여적인 인사로 보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김훈은 절망감을 드러냈지만 그가 당대 역사의 면면에서 참여적인 인사는 아니다. 그런 심리적 특성이 이번 소설에도 보여준다. 소설에서 1980년을 흔들던 5월의 표현은 현실과 멀다. "안개는 안과 밖이 없고 앞과 뒤가 없어서 안개 속에서 초병들은 자신의 위치를 식별할 수 없었다"(53페이지)는 애매한 표현으로 지나친다.
 
마차세의 곤궁한 모습의 배경은 무엇일까. 아버지와 무관할 수 없다. 마동수와 같이 상하이 시절을 보내면서 극렬하게 독립을 하던 하춘파 등 부친의 지인이 하는 "마동수 저놈은 젊었을 때부터 회색이었어. 기회주의자 였지, 아나키스트가 아니었다구"하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마동수가 그랬듯이 기묘하게 아버지를 닮은 두 형제는 결국 혁명가가 아닌 회색주의자로 살 수 밖에 없는 유전자를 갖고 났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 이명준이 그러하듯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가던 이들 가운데 혁명가는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마장세, 마차세 형제 역시 그 역사의 고된 짐을 던져버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변모한 것도 있다. 작가는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 또 음풍농월 하면서도 당대의 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월간조선, 2002년 2월호)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세월호는 그냥 참아내기 어려운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행동으로도 이끌었다. 이번 소설에서 묘사되는 아내 박상희와 딸 누니도 이런 연장 선상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를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 정치관이나 지금이 관점은 얼핏 달라 보인다. 아마 이 점이 어떤 이는 소설을 읽는데 불편하게 하고, 어떤 이는 공감하게 하고, 어떤 이는 주저하게 할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독자의 몫이지 작가의 몫은 아닌 만큼 굳이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대의 흐름으로 본다면 김훈의 소설은 지난 삼사십년간 누려온 번영에 대한 오마주가 될 것 같다. 이제 한국은 다시 맹렬한 세계 경제의 거친 파도 속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소설 한권으로 백만부를 팔던 전업작가들의 꿈도 이제 다시 찾아올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서평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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