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 - 이름을 부른다는 것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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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민(wlals523)등록 2017.02.28 10:55
김문영. 그녀의 이름이다. 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정확하게 불러준 건 희수였다. 그 후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을 문영의 입을 닫은 생활도 희수의 부름에 어떤 의미가 되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인 문영은 네 살 때 집을 나간 엄마를 찾기 위해 늘 지하철을 전전한다. 한 손엔 캠코더를 들고. 여러 사람들의 얼굴을 찍는다. 희수와의 만남 또한 그랬다.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으로 만난 둘은 서로가 있는 위치만큼 조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영은 여렸다. 사람과 교감을 하기에 앞서 틀이 많은 아이였다.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어 주기 전까지 말을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말을 못하는 흉내를 내며 타인을 무안하게까지 하는 치기도 부렸다. 그에 비해 희수는 처음 보는 사람과도 서슴 없이 말할 수 있었고 편견 없이 타인과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집에 누구든 데려오는 것을 꺼리지 않았고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찍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에게선 비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둘 다 외로운 사람들이었다는 점. 알콜중독 아버지에게 언어적 학대를 받으며 사는 문영의 세상과 타인에게 관심 받는 것을 좋아하는 희수의 성향을 괴짜로 인식해버리는 세상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상은 그녀들에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외로움만을 던져주고 가는 곳인 것처럼 보였다.

한 밤중에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나는 장면이 있는데 어두운 길을 날쎄게 가로지는 순간에 문영이 보는 것은 현란하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네온사인 불빛들이었다. 세상엔 이렇게나 많은 빛이 있고 이렇게나 많은 색ᄁᆞᆯ이 있는데 정작 그녀들의 빛과 색은 무엇이었을지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니었을까. 문영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세상의 빛은 그다지 따뜻하지도, 깊지도 않았다. 그냥 외롭고 희미했을 뿐.

그렇게 외로웠던 둘은 서로의 마음을 자연스레 열어갔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관심 받고 사랑을 주는 것을 좋아한 희수에게 문영은 작고 귀여운 사랑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희수에게 마음을 열어가면서도 엄마를 찾는 것을 멈추지 않던 문영은 지하철에서 엄마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말문을 텄고 그 후 희수에게도 엄마를 찾았다는 말로 첫 목소리를 전한다. 말을 못 한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던 문영은 하나의 방어적 수단으로 입을 막고 살다가 엄마의 존재를 자의적으로 느낀 순간 처음으로 입을 연다.

그런데 여기서 아쉬운 점이 잡혔다. 문영이 말을 하게 된 것은 희수 덕분이 아니었다. 계속 엄마를 찾던 문영의 모습은 희수와 마음을 나눈 장면들과는 겹치지 않는다. 엄마를 찾는 것과 희수와 소통하는 것은 왠지 따로 다뤄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것을 최대한 연결하기 위해 희수를 찾아간 문영은 "언니, 나 엄마 찾았다."라고 말한다. 과한 해석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말을 하지 않던 문영이 입을 연 것이 희수가 처음이었다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감독은 왜 이렇게 다른 둘의 모습을 한 스크린에 담았을까. 돌이켜보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모습이 서로의 마음의 문을 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감정표현에 당당하고 표정도 풍부했던 희수가 문영에겐 만질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또 반대로 감정을 드러내놓고 표현 하지 않아도 은근한 눈빛이 있고 속으로 감내할 줄 아는 문영이 희수에겐 알아가고싶은 사람으로 기억됐을 수 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땐 자기만의 세계에 얼마든지 갇혀도 둘 이상의 사람이 모이면 절대 그 세상에만 살 수 없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내게 관심을 가져준다는 것은 갇혀있던 하나의 세상을 깨고 나와야함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고 세상에 벽을 치고 살았던 사람도 관심을 가져주는 누군가의 앞에선 견고했던 벽을 허물 준비를 자신도 모르게 하고있다.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선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는 것을 경계해야함을 문영은 이제 조금 알게 됐을까.

영화가 끝나고 짧은 GV시간을 가졌는데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듣고 보니 참 내적인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놀라웠던 건 영화 속 인물들이 서로의 통성명을 나누고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을 적재적소에 두지 않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배치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웠던 것은 그렇게 의도된 장면에 덧붙인 감독의 해설이었다.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아갈 때 이름을 바로 묻는다거나 바로 상대를 손쉽게 알아가려 하는 그 순간이 애매하지 않은가. 언제 이름을 물어봐야 할 지, 언제 상대가 누구인지 물어야 할 지 사실 그 알맞은 시간을 모르겠다."

영화 속 희수는 문영의 이름을 물을 시간을 아주 적절하게 알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본능적으로 육감적으로.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 사람과의 소통을 원한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글을 쓰다보니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생각이 났다. 영화의 제목도 문영인 것처럼, 이름은 그 사람이다. 이름 안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있다. 그 이름을 누군가가 불러주는 순간 하나의 꽃이 되는 경험을 아마 문영은 했을까. 희수와 문영은 그 후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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