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 열차 : 과거와 현재의 승강장

'리스본행 야간 열차' 영화를 보고

검토 완료

정누리(asp835)등록 2017.05.17 17:49
리스본행 야간 열차 : 과거와 현재의 승강장



 
이번에 소개 할 영화는 리스본행 야간열차(Night Train to Lisbon, 2013)이다. '레 미제라블, 굿바이 만델라'등의 작품를 제작한 빌 어거스트 감독의 작품으로, 원작의 감성을 그대로 옮겨 담는 그의 능력이 확실히 발휘 된 영화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의문의 책을 읽고 있는 그레고리우스)


이 영화는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교사인 '그레고리우스'가 폭우 속에서 난간 위에 서있는 한 여자를 구해주는 것으로 시작 된다. 슬픈 눈을 한 그녀는 빨간 코트와, 의문의 책 한 권, 리스본행 열차 티켓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레고리우스는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에 완전히 매혹되어버리고 만다. 그는 저자 '아마데우'를 실제로 만나고 싶다는 열망에 강하게 휩싸이는데, 마침 여자가 떨어뜨린 열차 티켓이 생각난다. 그는 자신이 가진 집, 직장, 재산, 모든 것을 버린 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탑승한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의문의 책'을 읽기 전과 읽기 후로 나뉜다. 그것을 읽기 전의 그는 고전문헌학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따분한 교사일 뿐이었다. 남들과 다를 것이 없는, 사회의 평범하고도 지루한 굴레 속에서 종일 굴러가는 기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책을 접한 순간부터 그 굴레 속에서 튕겨 나오게 된다. 새하얗게 서린 머리와 대비 되는 그의 눈동자는 어린 아이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그의 변화를 전적으로 보여주는 소재가 바로 '안경'이다. 그는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자전거와 부딪혀 길바닥에 엎어지고 만다. 그 때 쓰고 있던 안경이 부서지게 되고, 때문에 은색 테의 안경을 새로 맞추게 된다. 세상을 보는 도구가 바뀐 것이다. 그가 스위스의 베른에서부터 썼던 안경은 낡았으며, 뿌옇고, 빛이 바랬다. 이것은 그의 생명력 없는 과거의 삶을 의미한다. 하지만 리스본에서 새로 맞춘 안경으로 본 세상은 아주 환하며, 뚜렷하다. 그제야 세상의 넘치는 생명력을 마주 볼 수 있게 된다. 검안사 '마리아나'는 그에게 안경을 맞춰 준 뒤 이런 말을 한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그는 리스본에 와서 그 전과 180°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처음에는 굉장히 불편하고 낯설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익숙해지고 나면, 그 전의 타성적 삶은 벗고 드디어 본래 '그레고리우스' 자신만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의문의 책'을 읽음으로써 빛바랜 과거를 현재로 다시 끄집어낸다. 책에 나오는 실존인물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저자 '아마데우'의 무덤까지 찾아가 그의 삶을 공유한다. 마치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을 탄 듯 하다. 책 속의 인물들, 그레고리우스 자신, 심지어는 영화를 보고 있는 '독자'들까지도 태운 채로 말이다. 그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연결자'라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시간에서 자신의 의견을 펼치는 아마데우)


그레고리우스는 계속해서 '의문의 책' 속 저자 아마데우의 생애를 좇는데, 굉장히 열정적이고 투쟁적이었던 그는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와도 닮은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때 그가 펼친 연설을 그대로 인용해보겠다.
 
 

「종교는 하나님보다 신성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낮이나 밤이나 주님이 항상 어디든지 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생각들을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밀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직 혼자 간직 할 수 있는 생각과 소망들이 없다면요?
오늘날, 이번 달, 금년에 일어나는 일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면 얼마나 지루할까요?
 
여기에 있는 누구도 영원히 산다는 게 어떤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 한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시간이 살아있게 됩니다.
 
저는 대성당이 없는 세계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신성한 단어들과 장엄한 구절들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 잔인한 모든 것에 대항하여 그만큼 저항할 수 있는 자유도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 없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도 저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시간, 아마데우.
 

신에게 의지 할 것이 아니라 주체적 결단을 하라는 그의 말은 교회 안의 사람들을 모두 경악케 만든다. 아마데우는 꽤나 파격적일 수도 있던 그의 연설대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한번은 리스본의 도살자로 불리는 멘데즈의 목숨을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기도 한다. 혁명군들을 죽이고 고문하는 그가 목숨이 간당간당한 채로 자신의 앞에 누워있다. 한 나라의 시민으로써 혁명에 동참해야하는가? 아니면, 의사의 사명을 지켜야하는가? 결국 그는 멘데즈를 살리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그의 주체적 결단이다. 신의 명령도, 타인에 의한 억압도 아닌 오로지 자신이 내린 선택이다.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의 몫이다. 마을 사람들의 비난과, 가장 친한 친구였던 조지가 자신을 피하는 것을 보자 아마데우는 굉장히 괴로워한다. 이 무거운 짐을 덜기 위해서였을까? 그는 멘데즈에 맞서 저항군에 가담하게 된다. 이것은 아마데우가 결정한 결과에 따른 책임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의 모든 생각과 여정이 써져있는 그 책을 읽으며 점점 그와 닮아가게 된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와 함께 저항군 활동을 했던 주앙이 담배를 갈구하자 몰래 담배를 사서 쥐어준다. 마리아나는 폐기종이 있는 삼촌에게 왜 담배를 주었냐며 화를 낸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하지만 담배를 좋아하잖아요. 왜 그런 기쁨조차도 없애려고 하나요?"라고 반문하며 주앙을 두둔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폐기종이 있다는 사실이나 다른 사람이 그것을 걱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앙 '본인'이 담배를 무척이나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선택에 따른 결과는 주앙 본인이 책임 져야 할 일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모든 주위 조건들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만을 존중한 것이다.
 

  


그가 머물고 있는 '실바 호텔'은 특이한 두 갈래 길에 위치해있다. 왼쪽은 오르막길이고, 오른쪽은 내리막길이다. 왼쪽은 현재요, 오른쪽은 과거다. 과거는 야간열차를 타기 전이 될 수도 있고, 아마데우가 살았던 때 일수도 있다. 확실한건 현재는 위로 나아가고, 과거는 아래로 가라앉지만 그 둘은 절대 떨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길의 중심에 서서 양쪽을 모두 바라보며, 우리에게 있어서 관찰자이자 연결자 역할을 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스테파니를 만나기 위해 실바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던 중, 그레고리우스는 리스본에서 보았던 의문의 여자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리스본의 도살자'라고 불리던 멘데즈의 손녀임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사랑했던 친할아버지가 사실은 여럿 사람을 고문하고 죽인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토록 괴로워한 것이다. 아마 멘데즈도 손녀에게만큼은 굉장히 따뜻하고 친절한 할아버지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가 그녀에게 과거를 숨길 수 없었던 것처럼, 과거는 현재의 연장선이며,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레고리우스는 먼 여정을 끝내고 다시 베른으로 가기 위한 열차를 타기로 한다. 타인의 삶을 좇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찾게 된 그레고리우스는 초반의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열차를 타기 직전, 자신의 여정을 옆에서 가장 많이 도와줬던 마리아나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데 얼굴에서 아쉬움이 역력하다.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왜 여기서 머무르지 않으세요?"라는 마리아나의 말이 귓가를 스치고, 영화는 끝이 난다.
 
그레고리우스의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이 주제 이외에도 사랑, 철학, 종교등 많은 것들을 담고 있지만 가장 큰 틀에서 바라보면 결국 모든 것이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이라는 것이다.「리스본행 야간열차」 왜 작가는 하필 이 제목을 썼을까?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 밤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시작된다. 나를 바라보는 모든 시선이 거두어지는 가장 고요한 시간. 감독이 가장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사람의 인생을 뒤집어놓는 전환점은 생각보다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했다. 중요한 것은 역동적인 전환점이 아닌 내 삶을 계속 찾아 나아가려는 본인의 의지인 것이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당신도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야간열차에 탑승 해 있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제라블의 글로그(http://blog.naver.com/asp835)에 본인이 작성한 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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