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카이도(北海道), 그 가슴 시린 겨울 속에서

22살, 혼자서 다녀온 첫 홋카이도 여행기

검토 완료

정누리(asp835)등록 2017.05.17 16:51


어렸을 때부터 그런 환상이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설원 속 콸콸 흐르는 온천수 안에 몸을 담군다. 머리는 차갑고 몸은 뜨겁다. 눈을 감고 칼바람에 잎사귀가 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태양이 일어나기 전에 고요한 새벽을 즐긴다. 뜨끈한 녹차가 제법 운치 있다. 하늘에 불이 켜지고 하나 둘씩 잠에서 깨면, 나는 상기된 볼을 하고 탱글한 당고를 한 입 베어 문다. 목 넘김이 제법 매끄럽다. 이것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다.
대체 왜 이런 환상을 갖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꽤나 어렸을 때부터 시작 된 구체적인 상상이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드넓은 설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빨리 현실로 다가왔다.

스물 두살의 겨울, 나는 아무런 연고도 없고 언어도 모르는 타국으로 혼자서 여행을 떠났다.



유학도, 지인을 만나러 가는 것도, 그 무엇도 아니었다. 나를 홋카이도로 데려다놓은 것은 단순히 오랫동안 상상해온 머릿속 설원 하나 뿐이었다. 친구들에게 "나 여행 다녀올게" 라고 말했을 때 다들 경악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눈이 대체 뭐라고 여자 혼자 그 먼 곳까지 가냐며 나를 만류하기 바빴다. 하지만 그 곳에 도착하여 직접 찍은 사진을 전송해주었을 때, 모두들 내가 이곳에 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득하고야 말았다.



현실은 상상보다 더 근사했다. 끝없는 지평선 너머 금방이라도 설국열차가 달려올 것만 같았다. 태양과 설원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이곳은 그야말로 단순함의 극치였다. 나는 그 점에 매료되었다. 모두가 화려함을 추구할 때, 홀로 멋을 부리지 않는 그 모습이 편안했다. 애쓰지 않아도 절로 빛이 나는 매력을 닮고 싶었다. 나에겐 이 모든 곳이 마음의 안식처였다.



참으로 신기했다. 어떻게 온통 눈뿐인데도 모든 곳의 느낌이 다른걸까? 날카로운 바람이 다듬은 눈송이는 그야말로 장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걸작이었다. 나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휴대폰 촬영버튼을 눌러댔다. 그래서일까, 금세 휴대폰 배터리가 바닥이 나고 말았다. 내 앞에는 근사한 마일드 세븐 언덕과, 금방이라도 방전되기 직전인 휴대폰뿐이었다. '제발 찍혀주세요! 제발, 제발!' 절전 상태라 어두워져서 통 보이지 않는 액정을 더듬었다. 애석하게도 휴대폰은 촬영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꺼져버렸다. 남은 시간동안은 그저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동자로 풍경을 담을 수밖에 없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못 찍었다고 생각했던 풍경이 갤러리 속에 오롯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전문적인 장비도, 기술도 없었지만 나에게는 이 사진이 그 무엇보다 완벽한 작품이었다. 이곳까지 스스로 온 것을 기특하게 여긴 하늘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お元気ですか. (잘 지내십니까)"를 외치던 설국 속의 여인. 왜 그녀는 지하철 역사도 아닌, 바다 건너도 아닌 드넓은 설국 속에서 외로움을 토했을까. 나는 직접 그 발자취를 짚어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이라는 것이 참 오묘하다. 그들은 언제나 조용히 아름답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빛깔도 내지 않는데 영롱하다. 그러다 때가 되면 조용히 잔디에게 그 자리를 내어준다. '나 떠나요'라고 티를 내지도, '나 왔어요'라며 인사를 애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잠시 머물다가 갈 때가 되면 조용히 떠날 뿐이다.

사람의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갑자기 스르르 왔다가, 간다는 말도 없이 조용히 이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래서 때로는 야속하기도, 원망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또 때가 되면 조용히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곁에 없는 데도, 언제나 곁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바라보면 마음 한 켠이 시린 것 아닐까. 때가 되면 올 그를 위해 비워 놓은 공간이기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오겡끼데스까'라고 외치는 것은, 어디선가 들을 그를 위한 외침일지도 모른다.



나는 살이 베이는 듯한 추위를 너무나도 싫어했다. 하지만 왜 그토록 추웠는지 나는 이제야 그 이유를 좀 알 것만 같았다. 가슴이 얼어붙는 겨울이 있어야만 그 무엇보다 깨끗한 눈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눈송이는 추운 인고의 시간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그 날은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누군가가 오는 날임을.

나는 홋카이도를 다녀온 뒤 한 가지 소망이 생겼다. 매년 내리는 눈이 순수하듯, 매 해가 지나도 티끌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기다림에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여름이 다가오는 5월, 나는 지금도 홋카이도의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위 내용은 제라블의 글로그(http://blog.naver.com/asp835)에 본인 작성한 적이 있는 게시물입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