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양림동 일대 근대 문화 유적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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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구(sinm1129)등록 2017.08.03 09:53
광주 양림동 일대 근대 문화 유적을 다녀와서

광주에 오랫동안 살고 있으면서 빛고을에 대해 무엇에 대해서 아는가 하고 자문해보니 아는게 피상적으로만 알지 구체적이면서 역사적인 사실 등에 잘 안다고 할 수가 없다.

광주가 예로부터 예향의 도시라 하여 문화도시를 표방하면서 전남으로 떠난 도청 근방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지어 그 내용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빛고을은 일제 강점기에 민족해방투쟁을 일구어낸 항일학생독립운동에 빛나고, 굴곡이 심한 현대사에서 반독재 투쟁에 앞장선 5.18민중항쟁 등으로 의향의 도시에 걸맞은 행동을 하였다. 의향의 도시를 알려면 항일학생독립운동과 518민중항쟁 유적지를 답사해야 한다.

광주가 조선말과 일제 강점기에 수동적인 근대화 과정에 양림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구석구석 살펴보기로 하였다.

알다시피 조선 후기는 실학파 등 근대화의 가능성을 놓치고 외세의 침략의 도구로 근대화가 진행되어 민족과 민중에게 크나큰 아픔과 고통을 주었다. 지금도 그 연속선상에서 우리 민족은 해결해야할 민족모순과 민중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1980년대 중반 복학하고 <산업사회학>과목에 사회문제를 현지조사하고 보고서를 쓰는 과제물이 있었다. 이 때 동료와 함께 양림동 발산마을을 조사하게 되었다. 대부분 가구는 비공식적 부문에 종사하면서 힘들게 생존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때 몇 백 가구에 대학생이 2명인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위 달동네였다.

민족모순과 중첩해서 나타난 계급모순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마을이었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근대화의 물결은 자본-임노동관계를 형성하여야 하기에 농촌의 농민을 노동자로 변화시킬 필요가 절실하여 국가권력은 반半폭력적으로 이촌향도가 되도록 하였다. 도시의 노동자에게 저임금을 강요하기 위하여 농민에게는 저농산물을 실시하였다. 대가족 중심의 자급자족의 농촌은 도시로 이동하여 저임금으로 생존권을 위협을 받았다.

양림이란 이름은 버드나무 숲으로 덮여있는 마을이라 해서 양촌과 유림을 합해 지어졌다. 이미 오래 전부터 양림동 일대는 빈민들이 기대어 살기에는 적합한 지역이었나 보다. 광주천은 양림리의 부자동네를 지나 옛 적십자병원 앞을 거쳐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광주천은 펑퍼짐하게 너른 강으로 양쪽은 빨래터요, 시장이며, 놀이터이며 집 없는 사람들이 거적으로 임시주거를 만들어 거처하는 갱생의 터였다. 광주읍성의 서편에 자리잡은 읍성에서 바라보면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으로 부랑자들이나 아이들이 죽으면 버리고 돌을 쌓아 풍장風葬을 지내던 어둡고 암울한 곳이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광주시가지는 아직도 전통마을의 모습이었고 특히 양림산은 두메산골이었다. 이때 광주 시가지는 광주읍성을 중심으로 소규모 촌락을 형성하고 있었다.양림리는 읍성의 남문 밖에서 한참이나 가는 인가도 없고 무덤만이 널려 있는 산이었는데 새 교회, 학교,병원을 비롯하여 많은 주택들이 세워지면서 단번에 새 거주지로 부흥하였다. 광주천의 물이 차오르면 시내와 단절되던 양림리는 시내와는 가깝고도 먼 곳이었기 때문에 제중병원, 수피아여학교, 숭일중학교, 교회 등을 중심으로 오밀조밀하게 신앙촌이 이루어져 이들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광주지역에 외래의 주거와 생활양식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당연히1990년대 초부터이다. 이들은 주로 일본인들은 관공서와공공시설, 교육시설, 상업.산업시설 등을, 서양인 선교사들은 종교.문화시설, 병원,, 학교 등을 양림리를 중심으로 건립하였다.

을사늑약 직전 해인 1904년에 광주천 건너 양림산에서 시작된 교회는 민초들을 받아들이고 선교와 더불어 치료를 하며 발전하였고 두 해 만에 광주의 변방에서 북문 안으로 자리를 옮겨 북문안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 배유지목사와 오웬 선교사는 1907년 기독교 신자 자녀 교육을 목적으로 여학생 3명과 남학생1명을 모아 가르쳣고, 이를 시작으로 수피아여학교와 숭일중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배 방식과 달리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순수한 선교활동과 의료사업 그리고 서양식 근대교육을 추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광주천 주변은 일제 강압을 시위하는 장소였으며 한편 일제에 항거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라진 신사를 설치하고 각종  나무를 심고 총쏘기대회와 군대제식훈련을 하며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며 3.1만세운동이 터진 곳도 이 광주천 백사장 장터였다. 수피아여학생들을 앞장서서 이끌며 광주장터에서 당시 광주경찰서까지 행진하는 1천여 명의 앞 대열에 섰던 윤혈녀는 일본헌병 군도에 왼팔이 잘려 쓰러졌다가 오른팔로 태극기를 다시 집어 들고 일어서서 대한 독립만세를 목 놓아 불렀다 한다.

광주의 3.1만세운동은 최홍종을 비롯한 광주천을 넘나드는 사람들에 의해 반민운동, 야학운동, 여권운동, 시민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으로 그 못다 한 꽃을 피우다. 후에는 장재성, 김기권 등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이 일경의 눈을 피하여 양림산 자락에서 독서회를 결성하고 이제는 없어진 김기권의 집에서 모임을 갖기 위하여 직강화된 광주천을 건너다녔다.

일제강점 이전부터 시작된 일제의 토지수탈 음모는 자작농을 소작농으로, 소작농을 화전농으로 만들었으며 그나마 토지가 없는 자들은 도회지로 몰려들어 날품을 팔거나 걸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때도 농민을 강제로 도시로 향하게 하여 산업예비군이나 룸펜프롤레타리아로 전락케 하여 노예같은 삶을 강요하게 하였다.
이런 이유로 직강화 되기 전에 광주천변의 자투리땅은 논밭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귀한 경작지가 되었다. 양림동 주변의 산과 천변 다리부근은 오갈 데 없는 걸인들의 움막터요 생존터였던 것이다. 이곳 천변부지에 살았던 움막집 사람들은 홍수가 들면 움막집이 떠내려가 집과 먹을거리를 잃게 되자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양식건축과근대건축의 출현, 양림동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전남도청과경찰서, 헌병대와 경무부 등의 관공서가 광주농공은행,광주금융조합 등의 근대적인 금융기관이 설립되었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구 광주서중)를 위시하여 각족ㅇ 학교가 10여 개소에 달하고 이 외에도 일본인들이 물밀 듯 광주에 들어와서 일본식 여관과 요정이 생기고 행상과 고리대금, 농토수탈을 통하여 돈을 벌어 광주우체국을 중심으로 충장로에 상가를 형성, 광주상권을 장악하였다.

광주지역에 외래 주거와 생활양식이 일본인과 서양인선교사에 의해 1990년대 초부터 소개되었다. 이는 현 광주시의 도시구조의 기본틀을 구성하고 있다.

양림동의 건축문화유산
1904년 이후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가 양림교회, 수피아여학교,제중병원을 열면서 서양촌으로 불렸던 그곳에는 전통한옥인 이장우,최승효 가옥뿐만 아니라 수피아홀,우일선 선교사 사택, 오웬기념각, 커티스메모리얼홀,수피아홀, 등 근대 서양식 건물들이 원형대로 남아 있다. 이외에도 수피아여학교 소강당과 헌트리 가옥, 인도아 가옥, 원요한 선교관, 유수만 선교관 등이 있다.
이처럼 양림동 일대는 1900년대 초 광주에 온 미국 선교사들의 선교와 의료봉사, 교육 및 사회봉사 활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며 광주 지역 최초의 기독교 전래지이며 개화기 근대 건축의 보고이다. 양림동에서 제일 오래된 서양식 건축인 수피아홀을 비롯해 한국전쟁 당시 고아보육장소였던 우일선 선교사 사택과 충현원, 1909년 순교한 선교사 오웬기념각, 유진 벨 목사가 예배를 드렸던 커티스메모리얼홀, 선교사 묘역 등 역사성을 간직한 근대건축이 여러 곳에 산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수의 근대건축유산들은 기록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고, 문헌 자료도 극히 부족하다. 일제 전후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은 의료 등 선교활동을 했음에도 서양선교사의 제3세계 선교활동은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진행되었기에 매우 비판적인 시각에서 봐야할 것이다. 해방 후 미제의 남쪽 점령 후 미국화되었음을 안다면 이런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다음은 다녀온 차례대로 사진과 설명을 적으려고 노력했다.

양림교회
1904년 12월 25일 목포 선교부에서 사역했던 배유지 목사가 광주 양림동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광주교회의 출발이되었다. 1년이 지나고1906년 2월에 북문안으로 이전하면서 북문안교회라 불렀다. 장로를 계속 세웠던 북문안 교회는 금정교회,광주제일교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광주 지방의 모교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1953년 교단이 기장, 예장으로 분립하자 예장은 오웬기념각에서 얼마동안 예배를 드리다가 기념각 옆에서 선교부의 지원으로 대지를 마련했고 예장 양림교회가 문을 열었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고 정면은 수직성이 강조된 모습으로 전형적인 고딕교회건축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양림교회 양림동 여행의 이정표가 되는 양림교회. 광주 최초의 교회로 1904년 미국 선교사 배유지가 자신의 사택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작이다. ⓒ 신민구


오웬기념각
배유지와 함께 전남 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과 그 할아버지를 기념하가 위하여 건축된 양옥 건축물로 광주 유형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웬의 순교는 우리나라의 한센병 구제 역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서양문화예술의 보급소인 이 기념관은 일제하의 민족의식 배양의 요람이었고 호남의 대표적인 집회소이자 문화예술회관이었다. 광주의 첫 시민운동조직도 여기서 시작되어 전남 전 지역에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창극과는 이질적인 서양식 연극이나 오페라 그리고 현대무용 등의 모든 문화예술 행사가 베풀어진 곳이며, 1920년 광주 최초의 음악회인 김필례 음악회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이 기념각은 광주에서 서양의 문화예술을 전파하는 매개지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서로 만나 결합하는 공간을 창출했다.
건축은 기부금으로 하였고 하트 선교사가 중국기술자들을 데리고 시작하엿다고 한다. 일본인은 너무 비싸고 한국인은 경험이 부족하여서 중국인을 택했다고 한다. 아름답게 꾸민 반원형의 아치와 한국의 전통건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주석으로 만들어진 기둥, 경사진 지붕의 2층 구조 등 독특한 서양식 건축양식은 광주 물론 인근 고을에서 구경꾼을 불러 모을 만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의 유교적 관습에 따라 남녀가 들어가는 문이 달랐기에 출입문이 2개이고,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로 되어 있다. 르네상스식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기념각은 맨 아래 화강암으로줄기초를 놓고 그 위에 회색벽돌을 쌓은 네덜란드식 벽체로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각시탈>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오웬 기념각 배유지와 함께 전남 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과 그 할아버지를 기념하가 위하여 건축된 양옥 건축물로 광주 유형문화재 제 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웬의 순교는 우리나라의 한센병 구제 역사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신민구


이장우 가옥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 광주 옛 부자동네인 양림동에 있는 커다란 집이다. 양림산을 배산하고 광주천을 임수하여 배치되었다. 조선시대 양반가옥 양식의 기와집이며 동서로 길게 늘어선 축에서 약간씩 빗겨나며 대문간,곳간채,행랑채,사랑채,안채가 배치된 상류주택 양식의 기와집이다. 1899년 건축되 이 가옥은 동신대학의 학교법인이 관리하고 있다.

이장우가옥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 광주 옛 부자동네인 양림동에 있는 커다란 집이다. ⓒ 신민구


최승효 가옥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독립운동가 최상현의 집으로 800평 가까운 넓은 부지 위에 동향으로 지어져 있으며,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에 전후좌우 퇴를 가진 매우 큰 규모의 전통 한옥이다.

최승효가옥 넓은 다락을 두었는데 이곳에 독립운동가들을 피신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집의 건축자재는 백두산과 압록강 인근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하는데 굵고 곧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잘 다듬고 짜 맞추어서 격조가 높은 건물이라 하겠다. ⓒ 신민구


가옥의 원래 소유주인 최상현은 중국과 무역을 하여 막대한 자산을 쌓은 재력가로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빈민 구제에 힘썼으며, 부친 최명구는 구시청 부근에 2층 목조 건물로 흥학관을 건립하여 민족정신 수련원의 역할을 하였다. 흥학관은 1966년 이후 헐렸지만 신간회 등 여러 단체들이 활용, 광주학생독립운동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 소유주 고 최승효는 광주문화방송을 창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사장을 지낸 언론이며 많은 예술작품을 수집한 문화인이었다.

연등천장인 대청을 제외하고는 넓은 다락을 두었는데 이곳에 독립운동가들을 피신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집의 건축자재는 백두산과 압록강 인근의 목재를 사용하였다 하는데 굵고 곧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잘 다듬고 짜 맞추어서 격조가 높은 건물이라 하겠다. 한말의 전통가옥에서 근대 한식목조건축으로의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건축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건물이다. 가는 때가 공사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효자 광주 정공엄지려
이 곳은 시간이 없어서 가보지 못했다.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낸 효자 양촌 정엄의 효행을 기린 정려가 있다. 모친이 병환 중일 때에는 밤에도 옷을 벗지 않고 돌보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장례 절차를 성대히 하였으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그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1611년 국가에서 정려를 명하였다. 이 정려는 1611년(광해 3)에 정려가 하사되어 세워졌고 2007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수하였다.

정공엄지려는 돌로 된 문이 있고 그 문을 지나면 역시 석조로 된 비각과 비석이 있으며 앞쪽에는 오석으로 1975년에 세운 중수기념비가 있다. 오른쪽 앞에는 정엄의 심부름을 했다고 전하는 개의 석상 즉 충견상이 세워져 있다. 중종 때의 전라감사 정엄은 통신업무에 영리한 토종개를 이용하였는데 어찌나 영리한지 한양까지 문서수발을 척ㄴ척해내 막대한 통신비를 절약했다고 한다. 한양까지 주인 정공의 문서를 심부름하다 죽은 충성스런 개의 아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양림동의 선교건축문화유산

유진 벨과 양림동 선교사촌
광주 기독교 선교사에서 맨 처음 등장한 유진 벨(배유지)은 1897년 10월 1일을 기하여 목폭개항되자 1898년 3월부터 목포에 거주하면서 선교를 시작해 양동교회를 세웠고, 어린 소년 소녀들과 시작한 공부가 영흥학교와 정명학교로 발전하였다.
1904년 4월, 광주에서 시작한 사택 두 채의 건축공사는 그 해 12월에 준공하게 되었고, 벨과오웬은 12월 20일 광주로 이사하였다. 그 후 12월 25일 벨 선교사는 사택에서 첫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벨의 사택은 광주 최초의 예배처소이자 진료소로 사용되었다. 이는 현 기독병원 진료의 첫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벨 목사는 1908년 그의 집 사랑채에서 3명 여학생과 1명의 남학생을 모아놓고 학교를 시작했다. 이학교가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이며, 남학생을 모아 공부를 가르친 곳은 숭일중학교로 발전했다.

우일선선교사 사택
미국 남부의 전형적인 주택형식으로 광주에서 가장오래된 서양식주택으로 광주시지정 기념물 제15호 지정되었다. 광주 제중병원의 2대 원장을 지냈다. 장애아와 고아들을 위한 광주지역 최초의 고아원을 시작으로 한센병 치유에 앞장섰다.
이 건물은 ㄱ서양인이 자기 나라의 건축형식을 타국에서 구현한 형식으로 주목되기도 하며 또한 주변에 심어진 나무 역시 자국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크다.

우일선선교사 사택 미국 남부의 전형적인 주택형식으로 광주에서 가장오래된 서양식주택으로 광주시지정 기념물 제15호 지정되었다. 광주 제중병원의 2대 원장을 지냈다. 장애아와 고아들을 위한 광주지역 최초의 고아원을 시작으로 한센병 치유에 앞장섰다. ⓒ 신민구


수피아여학교 수피아홀
수피아여자고등학교는 1908년 미국 남장로교의 유진벨 목사가 설립한 여학교로 주변에는 100년이 넘는 학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건축물들이 많다.
수피아여학교 수피아홀 역시1911년 미국의 스턴스 여사가 세상을 떠난 친 여동생 스피어를 추모하기 위해 기증한 5천 달러로 세워진 회색벽돌 건물로 현재 수피아여고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이 홀은 건축한 이후부터 학교이름을 수피아여학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홀이 지어질 당시 우일선 선교사는 기독병원에서 진료하면서 틈틈이 건축현장을 찾아 일꾼들을 독려했다고 한다.3.1만세운동 당시에는 박애순 선생의 지도로 수피아홀 지하에서 자정 이후에 비밀리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어 거사일에 나누어준 곳이기도 한다. 지금은 특별교실과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수피아여자학교 수피아홀 3.1만세운동 당시에는 박애순 선생의 지도로 수피아홀 지하에서 자정 이후에 비밀리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어 거사일에 나누어준 곳이기도 한다. 지금은 특별교실과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 신민구


광주3.1만세운동 기념동상
수피아여고 대강당 앞에 있는 기념 동상으로 1995년 건립되었다.뒷면에는 1919년 당시 수피아 교사와 학생들 중에서 16세 이상으로 일제에 의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19년 2월 중순경 김마리아 선생이 동경으로부터 2.8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양림리 언니에게 전해주었고, 남궁혁 장로의 집에서 광주의 애국 청년들과 기독교인들이 모여 광주 3.1만세운동 거사 준비 등 모임이 이루어졌다. 교사 박애순은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독립선언서 약 50매를 학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수피아 교사와 학생들은 만세운동을 선도하며 부동교 밑 작은 장터를 거쳐 당시 경찰서 앞까지 행진하였다.
일제의 유혈진압으로 윤형숙은 한쪽 팔이 잘렸으나 끝까지 만세를 불러 일본 진압 병력을 놀라게 하였고 그 사실이 3월 11자로 일본 육군성에 전보로 보고되기도 하였다.

광주3.1만세운동기념동상 수피아여고 대강당 앞에 있는 기념 동상으로 1995년 건립되었다.뒷면에는 1919년 당시 수피아 교사와 학생들 중에서 16세 이상으로 일제에 의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른 23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신민구


수피아여학교 커티스메모리얼홀
유진 벨을 비롯한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1924년부터 예배를 드렸던 예배당으로 문화재청 지정 등록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피아여학교 커티스메모리얼홀 유진 벨을 비롯한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1924년부터 예배를 드렸던 예배당으로 문화재청 지정 등록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신민구


헌트리가옥
이 가옥은 광주기독병원 6대 원목실장을 지낸 베츠 헌트리 목사가 생활했던 사택으로 양림동 수피아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헌트리가옥 이 가옥은 광주기독병원 6대 원목실장을 지낸 베츠 헌트리 목사가 생활했던 사택으로 양림동 수피아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 신민구


원요한 선교관
양림산 남측 경사면,우일선 선교사 사택 아래에 있는데 그 옆에 유수만선교사 사택이 위치한다. 원요한선교사의 할아버지가 유명한 언더우드목사이다. 고종황제가 사석에서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 한다. 그는 새문안교회를 설립했으며 연희전문학교를 세우고 초대학장으로 대학교육에 이바지하였다.

유수만선교관
육수만 선교사는 미국 장로교에서 파송한 선교사로 1961년 서울에 온 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1963년 광주로 내려와 광주기독병원 치과과장으로 부임 1986년까지 치과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그는 병원식구들과 정기적으로 매월 한 두 차례 무의촌 진료봉사를 했으며 조선대 치과대학설립과 광주보건대학 치위생과 개설, 한국 최초의 언어병리학 프로그램 참여 및 치과용 장비와 기구들의 개발과 제작을 통해 한국치과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유수만선교관 양림산 남측 경사면,우일선 선교사 사택 아래에 있는데 그 옆에 유수만선교사 사택이 위치한다. 원요한선교사의 할아버지가 유명한 언더우드목사이다. 고종황제가 사석에서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 한다. ⓒ 신민구


선교기념비
양림동 선교기념비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배유지목사가 1904년 12월 25일 광주에서 처음 예배드린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한 비이다.

선교사묘역 양림동 선교사 묘지는 광주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고 개화의 새 물결과 일제 치하에서 구국 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던 23인의 선교사가 묻혀 있는 곳이다. 광주광역시 양림동은 전라남도 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던 배유지 목사와 클레멘트 오웬의 주된 선교지였다. ⓒ 신민구


호랑가시나무
우월순 선교사 사택 아래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수령이 400년이 넘는 호랑가시나무가 있다. 잎이 두껍고 광택이 있는 가죽질이며 잎가에는 다섯 개의 가시모양 톱니가 있어서 호랑이가 등을 긁었다는 속설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호랑가시나무를 신성시했으며 크리스마스 카드에 붙여 장식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1904년 처음 터를 잡을 때 이 호랑가시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어 그 후로도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아왔다.

호랑가시나무 기독교에서는 이 호랑가시나무를 신성시했으며 크리스마스 카드에 붙여 장식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1904년 처음 터를 잡을 때 이 호랑가시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어 그 후로도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아왔다 ⓒ 신민구


정율성
전라남도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으며,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南京]·상하이[上海]에서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을 배웠다.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 불려 오다가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정식 군가로 비준을 받았다. <팔로군행진곡>은 1990년 북경아시안 경기 개막식 첫 프로그램으로 연주되기 했다. <연안송>은 중국 공산당이 존망의 위기에 처할 때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연안송을 부르며 혁명의 성지인 연안으로 몰려갔다고 한다.
1953년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한때 문화대혁명에 협력하지 않은 죄로 시련을 겪었으나 다시 작곡활동을 개시하여 가곡·가극·영화음악분야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현재 생가는 시에서 매입하지 못해서 내부관람이 하지 못한다.

정율성생가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국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가로 불려 오다가 1988년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정식 군가로 비준을 받았다. 젊은이들이 많은 애창하는 연안송을 지었다. 생가는 시에서 구입하지 못해 안을 구경할 수가 없다. ⓒ 신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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