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해양수련원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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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구(sinm1129)등록 2017.08.02 11:51
광주학생해양수련원을 다녀와서

개원한 이래 선생님들과 함께 몇 번을 다녀왔다. 발포해수욕장이 바라보여 전망도 매우 좋았다. 광주에서 2시간 이상이 걸려서 약간 멀다는 느낌이 든다. 국가 권력의 학살로 참혹한 세월호 사건이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학생들이나 국민들의 가슴속에는 슬픔과 분노가 여전하다. 학생들이 해양체험을 통해서 수상안전과 해양구조를 체험함으로써 호연지기와 생명존중의식을 한층 높일 수 있다. 옆 마을에 이순신 장군 유적지가 있어서 민족과 민중에 대한 사랑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광주해양학생수련관 발포해수욕장을 향해 지어졌다. ⓒ 신민구


발포해수욕장 학생들이 해양체험과 수상구조 그리고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곳이다. ⓒ 신민구


더군다나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곳곳에 있었다. 발포鉢浦는 마을 앞 포구가 스님의 밥그릇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으며, 조선시대 군사 요충지로 전라 좌수영의 수군진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선조 13년(1580) 이순신은 발포에서 만호(종 4품)로 18개월간 재직하였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처음 수군으로 활동하였으며 해전과 수군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훗날 이순신이 발포만호로써 쌓은 지식과 경험은 임진왜란 승리의 밑바탕이 되었다.

만호가 있었던 어촌에 역사전시체험관이 있어서 이곳이 임진왜란 때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지 알 수가 있었다. 발포는 농어촌에서 볼 수 없는 장면이 보였다. 청소년부터 청장년층이 배를 타고 바다를 나가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발포역사전시체험관 조그만한 마을단위에 역사체험관이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임진왜란 때 얼마나 요충지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 신민구


발포역사전시체험관을 둘러보고 선박을 수리.보수하고 정박하기 위한 군사시설인 굴강掘江을 답사하다.굴강은 당시 거북선을 만든 곳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조선소 도크인 셈이다. 이 굴강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데, 주머니와 같은 형태로 동서 긴 변이 40m, 남북 폭이 23m 입구 유입구 쪽이 11m 정도이다. 원래 굴강 남쪽 석돈은 담장형태로 높게 쌓았었다. 적들이 볼 수 없게 한 것이다. 조선조 후기에 발포지도에 의하면 이 굴강에는 거북선을 비롯하여 3척의 병선이 정박해 있다. 또한 굴강 언덕에 선창이 있었다. 100여 년 전까지 거북선이 있었다고 전한다. 거북선 건조 기록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일하게 발포진지록에만 남아 있다.

굴강 굴강은 당시 거북선을 만든 곳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조선소 도크인 셈이다. ⓒ 신민구


세종 때 세워진 발포만호성을 둘러보고 이순신 사당인 충무사를 볼 수가 있었다. 이순신장군의 청렴결백과 공직자가 어떤 자세로 공공재산을 보존하고 민중을 위해 어떤 자세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오동나무 일화가 있었다.

발포만호성 발포진은 세종 21년(1439)부터 만호(종4품)가 배치된 수군진이 되었으며 성곽은 성종21년(1490)에 둘레 1,360척,높이 13척 규모 축조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은 여장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복원 정비된 것이다. ⓒ 신민구


충무사 1977년에 발포만호성 성곽 북쪽에 세운 이순신 사당으로, 매년 봉충회 주관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양력 4월 28일)에 다례제를 지낸다. ⓒ 신민구


이순신과오동나무 전라좌수사 성박은 거문고를 제작하기 위해 발포 관아의 오동나무를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순신은 오동나무가 나라의 재산으로 사사로이 사용할 없다며 완강히 거절하였다. 당시 오동나무는 전선의 닻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후 이순신은 발포만호에서 파직당했다. ⓒ 신민구


이순신 오동나무 청렴박석 광장 이순신 장군이 발포 만호로 재임(1580.7~1582.1)할 당시 직속상관이었던 전라 좌수사가 거문고를 만들 욕심으로 오동나무를 베어 가려 하자 이 나무는 관청의 재물로 누구도 함부로 베어갈 수 없다고 한 역사적 청렴 일화를 배경으로 청렴광장이 조성되었다. ⓒ 신민구


이순신유적지를 둘러보고 인근에 있는 마복산을 다녀왔다. 마복산(539m) 전라남도 고흥군의 포두면 옥강리에 위치한 산이다. 마복산 정상석은 봉화대 아래에서 있으며 마복산은 말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하여 마복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일명 소개골산(小皆骨山)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마북산(馬北山)이라고 불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선이 상포항으로 침범하여 육상하려 하였으나 동남쪽으로 뻗어 있는 마복산의 산세가 마치 수천 마리의 군마가 매복하여 있는 것처럼 보여 왜인들이 상륙을 꺼리며 일시 퇴진하였다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마복산 거북바위 거북모양을 하고 있다. ⓒ 신민구


고흥하면 100대 명산 중 하나인 팔영산이 단연코 떠오른다. 고향집이 근처여서 방학 때 명절 때 거의 산행하여 수 십번은 다녀왔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 됨으로써 팔영산도 국립공원이  되었다.
바다 인근에 위치한 산들은 바다위에 뿌려놓은 듯 아름답게 펼쳐지는 섬들의 모습은 장관이다.

도양읍 봉암리 쌍충사는 조선 중기의 무신 이대원 (1566∼1587)과 정운(1543∼1592)을 배향한 사우로 매년 4월30일 모충회에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고흥 쌍충사 쌍충사는 충열공 이대원(忠烈公 李大源)과 충장공 정운(忠壯公 鄭運)을 배향한 사우이다. ⓒ 신민구


원래는 녹도만호로서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적을 맞아 전과를 올리고 손죽도해상에서 순절한 이대원을 기려 1587년(선조 2) 사당이 지어졌으나, 1591년 (선조 24) 녹도만호로 부임하여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과 함께 옥포·한산해전 등에서 선봉장으로서 전과를 올렸으며 몰운대(歿運臺)에서 순절한 정운장군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청으로 1592년(선조 25) 합향하였다.

인근에는 천형인 한센병이 살고 있는 소록도가 위치하고 있다. 일제 시대에는 온갖 인권침해에 시달리면서 살았다. 지금은 연륙교가 연결되어 있다.

녹동항에서 경매하는 모습 민중들의 살아 숨쉬는 경매하는 모습 ⓒ 신민구


녹동항에서는 살아서 펄덕펄덕 움직이는 삶의 현장인 경매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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