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전한 보수의 존재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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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태(hpalian)등록 2017.06.18 09:04
새는 좌우의 날개를 통해서 균형을 유지한 채라야 날 수가 있다. 파시즘으로 불리는 전체주의의 획일적인 사상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자연에서 통찰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의 대속 이후에도 질곡을 느끼는 삶이 그대로인 것은 웅변적으로 세상의 변화를 부르짖는 근거로 작용하지만, 여전히 보수적 가치도 견제의 역할로 필요하다. 그만큼 독선적인 사상은 위험하다는 방증이기도 한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옥중 서한에서 속물주의의 여러 인자를 나열한 바 있다. 그 중에서 두 가지. 곧,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폐쇄적인 정신과 물질적 측면에 대한 집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생각만 옳고, 타인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정신을 시들게 하는지를 강조한 셈이고, 아울러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황금만능을 경계하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과 탄핵이라는 일련의 사건을 전후하여 우리 사회는 극단적으로 보수와 진보가 길항하는 형국을 보여주었다. 흔히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정치 격언이 있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지닌 색채도 이 격언에서 예외일 수 없는 듯이 보이는 게 현대사를 진단하는 대체적인 인식이다. 진보가 주창하듯 세상은 끊임없이 변해야겠지만, 보수의 견제 없이는 어느 방향으로 튈지도 모른다. 자칫 핵분열처럼 방향성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의 보수는 견제의 순기능은커녕 시대의 도도한 변화의 움직임을 대놓고 가로막는 데만 혈안인 것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한국의 보수가 얼마나 진정성을 지녔는가 되묻고 싶었다. 잎은 뿌리에서 비롯되듯, 한국의 보수를 규명하고 진보의 균형과 방향감각을 지탱하는 역할로서 보수가 거듭나기 위해서라도 그 뿌리를 살펴보며 반성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으로 보수주의는 '급격한 변화를 피하고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사상이나 태도'를 일컫는다. 이데올로기 측면의 보수주의는 소유의 보전을 바라는 욕망에 근거를 둔 것이고, 심리 측면의 보수주의는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고 변화를 싫어하며 익숙한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마도 시대를 관통하는 보수주의의 특성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뉜 동서분당이 시작되었다. 기호학파(경기, 충청)로부터 비롯된 서인은 영남학파인 남인과 정치 및 사상의 차이를 보이다가 인조반정을 계기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된다. 숙종 말이래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나뉘지만 다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이 수권 정당이 된다. 특히 정조 사후인 1801년(순조 1년)부터 남인은 정계에서 축출되고, 노론이 독주하며 현종, 철종에 이르는 3대 60여 년 간에 걸쳐서 왕실의 외척인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특정한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 이 세도정치는 사회 변화에 대한 근본적 개혁 의지가 없었고, 현 체제를 유지하려 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보수적인 성격을 지녔다. 고종 즉위 후 흥선 대원군은 세도정치로부터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대한제국은 일제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런 통사적 흐름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손아귀에 넣은 후 그 공로를 치하한다며 76명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후작, 백작, 자작, 남작 등의 작위를 받은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충격이 컸다. 공로를 세웠다는 의미는 대한제국의 멸망에 기여한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다는 의미일 텐데, 왕족과 소수정당을 제외한 70%가 넘는 56명이 노론이라고 한다. 즉, 대한제국은 단순히 을사오적에 의해 패망한 것이 아니었다. 시대가 어떻게 바뀌건, 민초들이 어떠한 삶의 조건에 처하건,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유지되면 그뿐인 지배층, 이를테면 왕족과 송시열 이후 약 250여 년 간 조선을 지배한 노론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다.

예의 수작자들 중에는 이용직 자작, 김사준 남작 등은 3.1운동이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작위를 박탈 당하기도 했고, 김가진 남작은 스스로 작위를 반납하고 그의 아들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또 윤택영 후작의 아들 윤홍섭과 을사오적의 한 명인 박제순 자작의 손자 박승유 등도 독립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이들 외 대부분의 수작자들과 그 작위를 대대로 승계한 후손들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일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권세를 누리고 있는 형편이다. 예컨대, 이재완 후작의 아들 이달용은 한성학교 (현 경기고) 교장을 역임했고, 이해승 후작의 손자 이우영은 그랜드힐튼 서울호텔 회장이다. 을사오적의 대표격인 이완용 백작은 후작으로 승급하고 그의 증손자인 이윤형은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역임한 바 있다. 조중응 자작의 아들 조대호는 일본육사 출신의 장교가 되었고, 민병석 자작의 아들 민복기는 대법원장을, 그의 손자 민경택은 서울지법 판사를 지냈다. 백작으로 승급한 송병준 자작의 경우, 사위의 아들 구용서가 한국은행 초대총재를 지낸 인물이다. 민영휘 자작의 손자 민병도는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으며, 이병무 자작의 증손자 이진은 환경부 차관과 웅진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이근택 자작의 증손자 이상우는 공주대 총장을, 이하영 자작의 손자 이종찬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회의원을 지냈다. 그리고 김춘희 남작의 손자 김정록은 김지하와 유홍준의 스승이었던 서울대 미학과 교수였다.

해방 전후 및 한국현대사는 여러 관점에서 봐야 하지만, 보수의 뿌리는 오늘에까지 면면이 이어져오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 이후 4.19 혁명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보수세력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일부가 민주공화당에 흡수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민주공화당은 제 5공화국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민주정의당으로 양도가 되고, 이후 민주정의당은 민주자유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져왔다. 남북한 대치 상황에서 안보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보수의 순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느낌이다. 건전한 보수, 상식적인 보수가 실재해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면, 한국의 정치지형은 좌우의 균형을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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