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웅 붕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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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않은 저 소리는 분명 뒤영벌이 날아가는 소리다. 뒤영벌은 행동이 재발라서 한 자리에 오래 있는 법이 없다. 빨리 나가지 않으면 또 다른 곳으로 날아 가버릴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얼른 밖으로 나갔다. <!--[if !supportEmptyParas]--><!--[endif]-->
잽싸게 나와서 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뒤영벌 한 마리가 붕붕대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놈은 쉴 곳을 찾는 건지, 아니면 집터 자리를 보고 있는 건지 계속 벽에 있는 구멍들을 들락거렸다.
오동통한 뒤영벌, 우리 집에 놀러왔네
▲ ㅇㅇ ⓒ 이승숙
뒤영벌에 빠졌다. 오월 초순부터 뒤영벌을 쫒아 다녔다. 운 좋게 한 마리라도 보게 되면 벌에게 눈길을 준 채 따라다녔지만, 벌은 단 한 번도 내게 곁을 주지 않고 날아 가버리고는 했다.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어야 제대로 볼 수 있을 텐데, 뒤영벌은 뭐가 그리도 바쁜지 느긋하게 앉아 있는 법이 없었다.
작년 봄에 남편은 양봉원에 가서 꿀벌이 들어있는 벌통을 사왔다. 어지간히 아파서는 병원에 가지 않고 벌침이나 약쑥 훈증으로 자가 치료하던 남편은 꿀도 따고 벌침도 맞을 겸 해서 벌을 한 통 사왔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벌통을 들여다보며 관찰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만 양봉놀이에 흠뻑 빠져 버렸다. 그랬더니 봄이 다 가기도 전에 우리 집에는 벌통이 6개로 늘어났다.
꿀벌, 말벌, 호박벌은 알지만 뒤영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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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내내 장독대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멋모르고 벌통을 장독대 근처에 놔두었기 때문이었다. 된장이라도 좀 떠올까 하고 장독대로 가면 어느새 쌩 하며 병정벌이 날아와서 무섭게 위협했다. 벌들은 머리 주위를 휙휙 돌며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 들어올 듯이 윙윙댔다. 죽기를 불사하고 달려드는 놈들을 무슨 수로 대적할 것인가. 그래서 황급히 물러나기 일쑤였다. 작년에 우리는 찬 서리가 내리고 벌들이 운신을 못할 때까지 낮에는 장독대 근처에 갈 수가 없었고, 벌들이 잠자는 밤에나 된장을 떠올 수 있었다.
그렇게 벌을 키우고 있던 우리에게 알고 지내는 서점 주인이 책을 한 권 보여주었다. '사라진 뒤영벌을 찾아서'란 책이었다. 꿀벌이며 말벌, 땅벌에 호박벌은 들어봤지만 뒤영벌은 못 들어본 이름이었다. 도대체 어떤 벌을 말하는 걸까. 우리나라에도 있는 벌일까? 이제 막 꿀벌에 대해 알아가던 나는 호기심에 그 책을 집으로 가져왔다.
▲ '사라진 뒤영벌을 찾아서', 데이브 굴슨 저, 이준균 옮김. 자연과 생태 출판사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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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 책이 별로 당기지 않았다. 자연과학 책읽기를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왠지 어려울 거 같아 쉬이 보게 되지를 않았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양봉에 관한 정보들이라도 있을까 하고 책을 들춰봤지만 그런 게 없다는 걸 알고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책은 내내 책꽂이에 꽂혀있는 신세였다.
올해 들어 내 눈에 곤충들이 들어왔다. 대수롭잖게 생각했던 벌레들도 귀엽게 보였다. 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는 이름이 별로 없었다. 태생이 시골인지라 어지간한 곤충이며 벌레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아는 게 없었다. 뒤영벌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떤 벌이기에 영국의 학자는 벌을 찾아 뉴질랜드까지 간 것일까. 비로소 '사라진 뒤영벌을 찾아서'란 책이 온전히 내게로 찾아왔다. 나는 책읽기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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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영벌을 찾아 영국에서 뉴질랜드까지...
1870년대 뉴질랜드에서는 영국에서 수입한 사료용 붉은토끼풀이 씨앗을 잘 맺지 못해 고민에 빠졌다. 해마다 비싼 돈을 주고 유럽에서 토끼풀 씨앗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곤충학자들은 토끼풀 수정이 잘 되지 않는 이유가 뒤영벌이 뉴질랜드에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에서 뒤영벌을 가져와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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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건너온 뒤영벌은 오늘날까지 뉴질랜드에서 번성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서식지 파괴로 인해 뒤영벌의 개체 수가 급감하고 있다. 그중 '짧은털뒤영벌'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1980년대 극소수 지역에서만 볼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아무도 짧은털뒤영벌을 본 사람이 없다. 저자는 짧은털뒤영벌을 찾아서 뉴질랜드로 갔다. 영국 땅에서 붕붕거리며 짧은털뒤영벌이 날아다니게 복원하려면 먼저 그 벌에 대해 잘 알아야 했던 것이다.
▲ 뒤웅박을 닮았다고 우리나라에서는 '뒝벌'이라 부르는 뒤영벌. ⓒ 이승숙
▲ 쥐똥나무 꽃에 앉아 꿀을 빨고 있는 뒤영벌. ⓒ 이승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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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영벌은 몸통이 통통한 게 마치 뒤웅박 같아서 우리나라에서는 '뒝벌'이라고 부르는 벌이다. 호박벌도 뒤영벌의 일종인데, 어릴 적에 호박꽃 속에 머리를 박고 꿀을 빨고 있는 벌을 꽃봉오리를 오므려 닫아 잡았던 기억도 난다. 다른 벌에 비해서 몸이 오동통하며 북실북실하게 털이 많아 귀엽기까지 한 그 벌을 본 게 언제 적인지... 책을 읽노라니 뒤영벌, 아니 호박벌이 보고 싶었다. <!--[endif]-->
사랑하면 보이는 걸까, 얼마 안 있어 내 눈에 호박벌이 들어왔다. 꽃사과나무에 꽃이 가득 피었던 오월의 초순, 꽃을 보고 있는데 꿀벌과는 생김새가 다른 벌 한 마리가 보이지 뭔가. 뒤영벌, 아니 호박벌이었다. 하지만 그 벌은 얼마 안 있어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후로도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눈에 띄었지만, 금방 날아가 버려서 늘 아쉽기만 했다.
제 발로 찾아온 뒤영벌
어느 날 아침에 우리 부부는 감나무 아래 탁자에 밥상을 차려놓고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상을 차렸지만 나는 별로 입맛이 동하지가 않아 건성으로 숟가락을 들고 있었다. 감꽃이 피어 있는 게 보였다. 숟가락 놓을 핑계를 찾고 있었는데 잘 됐다 싶었다. 감꽃 사진 찍는다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며 숟가락을 놓고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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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영벌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한 자리에 오래 있어야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 텐데 계속 움직이니 사진 찍을 방법이 없다. 더구나 작은 물체를 찍기 위해서는 줌렌즈로 해야 하는데, 그러면 사진 찍기가 더 까다롭다. 움직이는 뒤영벌을 따라가며 애써 찍었지만 제대로 된 사진은 한 장도 없었다. 모두 흔들려서 흐릿한 사진들뿐이었다.
▲ 감꽃과 뒤영벌. ⓒ 이승숙
그런데 그 날 아침에 감꽃을 찍기 위해 카메라 렌즈를 줌 상태로 하고 막 찍으려는데 뒤영벌이 앵글에 잡히지 뭔가. 그렇게 애써도 안 되었는데, 저절로 화면 속으로 들어오다니... 이건 분명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감꽃과 뒤영벌이 함께 잡힌 사진을 얻었다. 그것도 흔들리거나 흐릿하지 않고 깨끗한 사진을 얻었으니 내 기쁨은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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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고 했던가, 뒤영벌이 내 눈에 자꾸 들어온다. 많지는 않다. 꼭 한두 마리뿐이다. 원래 자연 생태계 안에서 제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은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일 테고, 그 수도 많지 않을 것이다. 꿀벌들은 한 통에 수만 마리가 들어있지만 말벌이나 뒤영벌은 그렇지가 않을 게다. 많아봐야 수십에서 수백 마리 정도가 모여서 사는 정도일 것일 테니 눈에 잘 띄지 않는 건 당연한 것일 게다.<!--[endif]-->
인동초 꽃밭에 꿀 따러온 뒤영벌
하루는 창고 안으로 날아 들어가는 뒤영벌을 발견했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창고로 날아 들어가는 뒤영벌을 또 보았다. 그곳에 뒤영벌 집이 있는 것일까? 책에서 본 바에 의하면 뒤영벌은 쥐가 파놓은 굴이나 나무 구멍 등에 터를 잡는다고 했는데, 창고 안 어딘가에 뒤영벌 집이 있는 게 분명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벌 소리만 들리면 쫒아갔지만 벌은 항상 나보다 빨랐다. 창고로 들어가는 것은 봤지만 그 다음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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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요일이었다. 마당을 둘러보고 있는데 뒤영벌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벌은 인동초 꽃무리 속으로 들어갔다. 유월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지금은 인동초 꽃이 한창이다. 인동초 꽃은 향기도 좋을 뿐 아니라 달콤한 꿀물도 많다. 꽃 대궁의 끝을 쪽쪽 빨아보면 제법 단맛이 느껴진다. 그러니 벌들에게는 오죽 좋은 꽃이겠는가. 온 종일 인동초 넝쿨에는 꿀벌들이 잉잉댔다. 뒤영벌도 성찬을 즐기려고 날아왔나 보았다. <!--[endif]-->
▲ 꽃가루를 덮어쓴 채 인동초꽃 꿀을 빨고 있는 뒤영벌. ⓒ 이승숙
▲ 오동통하고, 복슬복슬 털이 많은 뒤영벌. ⓒ 이승숙
아, 그 귀여운 자태라니... 복슬복슬하게 나있는 털에 하얀 꽃가루가 덮여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갔다. 뒤영벌은 엉덩이를 치켜들고 정신없이 꿀을 빨고 있었다. 감꽃이나 쥐똥나무 꽃들과는 달리 인동초는 꿀물이 많은지 제법 오래 머물렀다. 꿀물을 탐하는 모습이 장난꾸러기 소년 같이 귀여워서 꿀밤이라도 한 방 살짝 먹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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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영벌은 늘 바삐 움직이느라 가까이 가도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내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오직 제 할 일만 하였다. 한 자리에 수굿하게 있는 법도 없었다. 이 꽃 저 꽃 바쁘게 훑고 다녔다. 그런 뒤영벌을 보고 원망하였다.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얻고 싶다는 욕심에 무단히 죄없는 뒤영벌을 탓했다.
귀여운 뒤영벌, 아끼고 사랑하자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어느 세월에 꿀을 모을 수 있겠는가. 집에서 기다리는 식솔들도 많을 텐데,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어린 벌들을 배 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 큰 몸집으로 작은 꽃에 들어 있는 꿀들을 모으려니 기갈인들 들지 않았을까. 기근에 한 줌의 좁쌀을 얻기 위해 백 리 길을 가는 것처럼 뒤영벌 역시 꿀 한 모금 빨기 위해 이 꽃 저 꽃 쉼 없이 찾아 날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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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뒤영벌을 찾아서'의 저자는 뉴질랜드에서 영국으로 뒤영벌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북반구인 영국과는 달리 뉴질랜드는 남반구라서, 벌이 활동하는 시기가 서로 달라 벌을 살릴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웨덴에 사는 같은 종을 데려와 영국 땅에 방사하는 데는 성공한다. 그는 <뒤영벌복원기금>을 설립하고, 영국 사회에 뒤영벌의 존재와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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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을 한 권 읽었다. 덕분에 뒤영벌을 알게 되었고, 좋아하게 되었다. 존재는 알지만 이름은 잘 몰랐던 곤충이며 벌레 등도 더불어 좋아하게 되었다.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그 전과 다르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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