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지워버린 '교육'이란 텅 빈 기호

[서평] 스탠리 오로노위츠의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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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진(rusia1020)등록 2017.07.07 08:57
*필자는 올해 2월까지 근무하던 의정부여자중학교에서 내부 감사를 요청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관련 기사 :  의정부여중 학생들 "우리 영어 선생님 돌려주세요"). 해고 이후 복직을 위한 법적투쟁을 이어가면서 학교 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면서 만난 책과 사람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글을 적는다.(관련 기사:  혁신학교에서 비정규직으로 살아가기, 그리고 내몰리기)




'교육'이라는 단어만큼 헐하게 쓰이는 단어도 드물지 싶다. 어디다 갖다 붙여도 이상할 게 없으리만치 다양하게 활용되면서도 부정적 함의는 묻어나지 않아, 뒤에 '자'자를 붙여 '교육자'라고 쓸 때에는 숭고한 느낌마저 든다. 어떤 개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관된 합의와 긴장감 없이 널리 사용되다보면 단어도 때가 묻고 낡기 나름이다. 때가 묻은 단어는 본래의 의미와 무게를 잃고 아무 의미나 다 담을 수 있는 '텅 빈 기호'가 되어 소통을 방해한다. 교육이라는 단어가 쉽게 호출된다는 사실은 이미 그 말이 본연의 무게와 가치를 잃어버린 낡은 의미 주머니가 되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학교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양가감정도 이에서 비롯하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학교의 인성교육 부재를 탓하고 교사에게 높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며 여러 사회 문제의 책임을 쉬이 돌리지만, 동시에 많은 학부모들이 자기 자식이 남들보다 한 등급, 한 단계 더 올라갈 수 있도록 교사들과 학교가 힘써주길 바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입시 경쟁은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수긍한다. 이런 모순된 요구들 속에서 '교육'기관이라는 이름으로 표백되는 학교는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공간이고 그 교육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 '교육'이 무려 '혁명'의 미래라고 주장하는 책을 쓴 학자가 있다. 생산직 노동자, 정치 활동가, 노조 조직 자문가와 같이 남다른 경력을 가진 연구자 스탠리 아로노위츠는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Against Schooling>에서 '착취와 억압 없는 세상, 빈곤과 무지와 질병 없는 세상을 만든다는 급진적 꿈'은커녕 '다음 세대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꿈조차 꾸지 않는 어른들과 학교를 '나를 응징할 수 있는 기관' 혹은 졸업장 발급소로 여기는 아이들이 사는 사회에서 과연 '교육'은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학교는 교육의 미래다, 스탠리 오로노위츠 ⓒ 윤혜진


학교 교육에 반대한다

무엇보다 교육 본연의 의미를 되살리기 위하여 저자는 학교 교육에 매몰된 교육을 건져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학교가 사회의 계급 문제와 빈부격차를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만 현실은 그와 다르다. 최근 미국의 모든 학교에 일괄 적용된 표준화 시험과 고부담 시험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지만, 지역간, 계급간 문화 자본 차이와 학교 별 예산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행되어 학교 간 부익부 빈익빈을 강화하고 출판사와 시험 출제 기관의 배만 불리고 있다. 취약 계층의 성적 부진이 보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 교육의 질을 높여야할 이유가 아니라, 그들이 더 나은 교육과 고등 교육 기관의 교육을 받을 가치가 없다는 근거로 활용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이 우민화 방식의 직업 교육을 주장하거나 교육을 계급 상승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에도 저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탈산업화의 흐름과 경제 침체, 학력 인플레이션이 겹친 상황에서 부유한 부모를 둔 학생들보다 문화 자본이 부족한 학생들은 대학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극히 적은 수의 아이들만 일자리를 구한다는 사실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의 기회와 진정한 교육 간의 관계를 질문하지 않고서는 기회의 평등도, 교육 자체로서의 기회도 모두 놓친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는 제도 내의 학교가 계급을 재생산하는 통제 기관이라는 한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졸업장 발급소가 된 학교가 해야 하는 일은 아이들이 부모보다 나은 직업을 갖게 해주는 교육이 아니라, 부모로 인해 갖게 된 문화자본의 격차를 줄이고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게끔 해주는 인문 교육이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교육을 정의한다.

교육은 삶의 경험이 지닌 총체성, 다시 말해 또래와 부모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구성하는 사회에 근거한 문화와 미디어와 학교를 통해 습득하는 지식에 관해 집단적이고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비판적 성찰'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저자는 교육이 학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학교 교육과 동의어가 아닌 '교육'은 학교 밖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자신의 성장기와 대안학교 설립에 참여했던 기억을 통해 증명한다. 또래 문화와 계급 문화, 대중문화의 영향은 의식적인 수업의 영향보다 강력하고 교육적 가치를 띨 수 있으며, 자유학교나 성인학교와 같은 대안 교육기관, 노동현장 및 노동조합의 교육 프로그램에서도 아이들을 비판적 성찰을 하는 성인으로 키울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교를 교육의 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고부담 표준 시험을 폐지하고 글쓰기 교육을 강화하며 인문 교육을 강조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선 교육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학교 교육의 한계를 바탕으로 아이들을 민주 시민으로 양성하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적 지식인 교사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계층 상승이나 국가의 통제에 익숙한 아이를 키우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노동계급에 머물더라도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시민이자 철학과 예술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교육을 실천하는 교사 말이다.

안녕들 하십니까, 프롤레타리아 교수님: 상상력의 연대와 대안의 가능성

뒤이어 저자는 취업학원이 되어버린 공립 대학교의 상황과 그에 대응한 투쟁의 과정을 보여준다. 기업 자금을 끌어올 연구를 진행하는 교수들만 살아남고 수많은 임시직 강사와 조교들이 저임금에 강의와 허드렛일까지 도맡고 있는, 시민 양성 교육과 인문학은 사라지고 있는 이 풍경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다.

누구도 대학을 공공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식 상품화의 위험에 대해 견제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저자가 들려주는 미국의 사례는 대학에 국한하지 않고도 학교의 시장화가 어떻게 교육을 불가능하게 하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 교육 당사자들이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점을 갖는다.

무엇보다 저자는 대학 내 학문의 자유를 위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비정규직 교수와 임시직 강사의 불안정한 지위 때문임을 지적하며 그들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며 대변해줄 이가 없는 배제된 자, 하위주체subaltern라고 부른다.

임시직 강사들은 불안정한 지위로 인해 학과장의 모든 요구에 수긍할 수밖에 없고 자유롭게 연구를 진행할 수 없을뿐더러, 저임금, 과잉업무로 인해 학생들에게 학문적 조언을 해주고 토론을 주고받는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고액의 연봉을 받는 소수의 교수들을 제외한 다수의 교수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불안정한 지위와 재단 기금을 걱정하는 교수들이 커리큘럼이나 교육 과정을 결정할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즉 이 하위주체들의 고용 안정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교육 주체를 바로 세울 수도, 대학 교육이란 공공재를 지킬 수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기간제 교사와 비정규직 강사로 가득한 한국의 학교가 외면하고 있는 현실의 이면과 닮아있다.

그렇다면 이 '프로페서리아트'들의 지위와 안정이 보장되면 대학의 공공성 문제가 해결될까? 현재  약 4분의 1의 전임 교수들과 행정 직원들이 미국대학교수연합과 전국교육협회, 미국교사연맹과 같은 노동조합에 합류하여 단체교섭권을 얻어내고 대학 내 사무직 노동자와 시설 관리자들과 연대해왔지만, 저자는 이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직업적 안정성을 주요 쟁점으로 삼는 것은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대학을 교육의 장으로 되살리기 위해선 경영진과 대학의 지배권을 공유를 목표로 기존 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커리큘럼을 개혁하는 당사자들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수들과 강사들이 임금과 연금을 지키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교육적 상상력의 행위자가 되길 요구하면서 다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근본적인 쟁점은 권력이다. 교수와 학생은 평등한 학자 공동체라는 전망을 포기하고 종업원이자 소비자로 이미 제도화된 자신의 지위를 받아들일까? 아니면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이 공동체가 대학의 민주화를 위해 의례적 저항뿐만 아니라 도덕주의적이고 과대망상에 젖은 옛 양식을 포기하고 더 치밀하면서도 결국 전략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노력을 쏟으리라는 희망이 아직 남아있을까?

배움은 노동자의 권리다

더 큰 교육적 상상력을 발휘할 희망이 우리에게 남아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어떤 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전망은 밝지 않다. 우리 사회와 다르지 않게 미국의 노동운동은 꾸준히 쇠퇴해왔고, 그와 함께 노동자 교육 또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저자는 서술한다.

오늘날에 노동조합이 임금과 복지 혜택에 초점을 맞추는 기업 노동조합 모델을 취하게 되면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을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의뢰인 집단으로 여긴다. 이런 밝지 않은 전망 속에서도 저자는 다시 한 번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교육이 필요하며, 그 교육의 거점을 다시 찾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노동 의제라고 주장한다.

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그람시와 프레이리의 교육 철학을 통해 혁명을 위한 교육이 무엇인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 다수의 민중에게 억압적인 통치가 강제가 아닌 '동의'에 이루어진다고 본 그람시는 "개혁 자체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사회의 모든 기관에 새로운 사회 규범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이데올로기 장치인 공립학교가 직업 교육보다는 전통 인문학 교육에 가까워야한다고 주장했다.

과거 소수의 엘리트들이 받았던 교육을 개방하여 다수의 민중이 능동적 참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학교 교육을 넘어 그람시가 "정치에 관한 '과학적' 이해를 체계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지적, 도덕적 블록을 형성하는 일"을 강조한 것을 들며 저자는 사회 변혁을 위한 지식인의 역할과 민중의 지식인화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어 저자는 의도적으로 프레이리의 철학을 오독하는 미국 교육가들을 비판하며 프레이리의 철학을 되짚는다. 인간 해방을 위한 과정이 교육이고 그 해방은 내적 식민성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외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임을 주장한 프레이리의 '혁명적' 페다고지는 획기적인 방법론일 뿐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혁명을 유발하는 교육은 아니라고 보는 탈정치적 해석에 반박하며, 저자는 '대화'와 '문제제기'를 통해 외부 세계에 개입하고 비판적 성찰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이 교육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즉, 민중의 지식인화를 이야기한 그람시의 교육과 민중 해방을 목표로 한 프레이리의 교육은 모두 결과적으로 다수의 지적 민중을 통한 정치와 체제 변화의 전망을 포함한 교육인 셈이다.

교육은 혁명의 미래인가?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일관되게 교육은 신분상승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비판적이고 자주적인 지성인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교육 방법에 대해 논하지는 않지만 분명 그 과정에선 필수적으로 노동교육이 포함되어있으며 이 사회의 주류 담론을 다르게 사유하는 비판적 자료들도 포함할 것이다.

급진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의 주장에 깔린 이 교육관은 사실 교육기준법에 명시된 교육이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 그런데 현실의 학교에서 이뤄지고 있는 교육과 교육 정책의 방향은 이 교육이념과 많이 다른 듯하다.

학교는 사회를 비추는 맑은 거울인 동시에, 기존의 사회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수단이다. 민주시민을 양성을 이야기하지만, 학교가 가르치는 민주주의에는 노동이 없고, 학교 주체들의 자리는 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없다. 학교의 수많은 비정규직들은 학교 주체에서 배제될 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하위주체로 남아있다. 민주시민의 자질이 경쟁 우위를 선점하는 능력은 아닐 텐데 학교에서도, 학교에서 일할 교사를 뽑는 시험에서도 무한경쟁에서 승리하는 '독한 능력'은 권장된다. 이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괴리라고 여기는 것이 이상한지도 모른다. 학교는 사회를 유지시키는 장치이니, 오늘날의 학교는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저자도 여러 번 이야기하듯 교육은 학교 밖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에 학교가 아이들의 가장 가까운 사회일 수 있기에 학교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만들어내는 장소가 될 수도 있다.

학교가 사회 변화의 씨앗을 품는 장소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교육이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것들을 드러내고, 과연 진정한 교육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하는 일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 노동없는 교육, 사회가 지워진 교육은 과연 교육인가? 스탠리 오로노위츠는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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