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소녀>를 통해 본 인간의 모순

유독 여자에게만 규정지어진 모순의 굴레

검토 완료

현지민(wlals523)등록 2017.07.17 10:28
  김용언의 『문학소녀』를 읽고 난 왜 하나의 세상을 깰 힘이 없음과 동시에 깨려는 노력도 없는 사람인지 생각해본다. 곧이어 내 인생이 그렇게 퍽퍽하고 내가 그렇게 게으른가도 생각한다. 난 왜 고민과 생각에 빠져있다가도 시원하고 맛있는 커피 한 잔에 둔해지는 지도 생각한다. 그리곤 그것이 인간 본성이라고 합리화 하는 나도. 그 합리화를 끊지 않고 계속 하는 나도. 끝없이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책 덕분에 흩어졌던 생각을 다시 조금 이어 붙여본다. 문학소녀는, 말처럼 문학을 좋아해 읽고 쓰는 소녀라고 믿고 싶지만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담긴다. <독서에의 몰두, 탐닉, 열렬한 환상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의 전유물처럼, '사랑과 낭만'에만 매달리며 현실이 아닌 꿈만을 좇는 물정 모르는 '미성숙한' 여성의 태도인 것처럼.(153p,154p)>이 책에서 말하는 의미다. 내 생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독서에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감정과 환상은 보통 '여성'의 것으로 일반화가 되어왔다. 이 책이 전혜린을 이야기한 책이란 건 너무나 당연하고, 여기서 내가 가장 크게 주목해 생각한 건 이 부분이다. 나에겐 이 예시 하나만으로도 불완전한 모순덩어리 사람이 보였기 때문에.
'사랑과 낭만'에만 빠져 현실이 아닌 꿈만을 쫓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사람은 여자. 예민한 감수성에 젖어 로지컬한 분석은 없이 이론을 감상으로, 기분으로 바꿔버리는 사람은 여자. 과거 여자를 설명한 문구들이(지금이라고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지만.) 보통 저런 것들이라면, 그런 감정을 조장하는 매체와 집단의 비상식적인 권력은 어떻게 설명 할 것인지. '이상적인' 연애를 조장하고 여자와 남자의 '역할'에 집착하고 사람 사이의 선을 그어 '계급'을 나눠버리는 '이상적이지 못한' 드라마와 노래와 기사, 문학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를 감정적으로 현혹시키려 드는 것들이 곳곳에 많은데 결코 감정 없이 올곧은 판단력을 가진 채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조롱받은 싸구려 '감상'을 버리고, 의식적이게 될수록 억지로 유지해왔던 이 세계 패턴에 오히려 균열을 낼 수 있을 힘을 가진다는 건 모르는 걸까. 우린 감정적일수록 무지하다 비난받고 의식적일수록 위협적이라 다시 비난 받는다. 우린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는 걸까. 우린 왜 누군가와 싸워야만 하는 걸까. 싸우지 않고는, 결코 어떤 위치에도 설 수 없는 걸까. 그저 괴롭힘 당하지 않기 위해선 애매한 입장만을 지켜야 하는가.
인간의 본성이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그저 무의식적인 감각에 있다면 이 책에서 말한 과거 여성의 행보는(역시나 지금도 완벽한 변화는 없다.) 왜 단순한 감각이 아닌 '악' 혹은 '위협적인'요소로 분류된 건지 생각한다. 모두가 누려야 하는 권리가 특정 집단에만 주어지면 곧바로 그 권리는 권력이 돼버린다. 그리고 노력으로 얻지 않은 그 권력이 주는 달콤함은 엄청난 폭력으로 뒤바뀔 여지가 충분히 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의 위기의식은 권리를 빼앗긴 자들의 계몽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지금도 싸움은 계속된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억압이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낳는 잔인한 굴레는 도통 끊기가 힘들다. 그럼에도 인과관계를 따지자면 원인에 분노한 결과는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왜 항상 논리적이어야만 명석한 것인가도 생각해본다. 감상과 논리를 이분법적으로 나눠 어리석거나 예리하다는 프레임을 씌운 것은 누구의 기준을 통해 나온 결과인지. 감상에 빠지면 사실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과, 판단 능력을 상실할 거라는 것은 모두의 동의를 거치고 나온 명제인가? 감상이 주관적이고 논리는 객관적이라는 증거는?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어떤 객관성이 존재할까. 통계(숫자)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
사람은 모두 적당히 논리적이고 적당히 감상적이고 제멋대로다. 패턴을 읽을 수 없다. 어떤 기준도 남자와 여자, 상류와 하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나눠 오류 없이 설명할 수 없다.
내게도 무서운 편견들이 많다. 내가 만약 여자가 아니었다면, 젊은 세대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내가 있는 위치에서 판단하고 해석한 또 다른 불합리를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집단에나 말도 안 되는 규정은 많고 그 입장이 돼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우리를 규정짓는 폭력적인 틀과 억압 속에서 우린 개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살아가지만 모두가 개인이 되지 않는 한 그 바람은 실현되기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간편히 생각을 접고 일반화의 틀에 들어가거나 위협적인 대상으로 취급 받아 고독해지느니 애매한 입장의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차라리 택하기도 한다. 물론 그 안에서도 작은 움직임으로 자신이 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하겠지만 이 모든 것은 어떤 한계에 부딪혀 깊게 파고들 수 없다. 각자 삶에서의 작은 행보로 그저 위로 할 뿐이다. 기껏 용기를 내서 개인적인 저항을 한다 해도 어떤 결과를 맞을지 알 수 없다. 큰 틀에서 보자면 삶의 이런 현상을 명확하게 설명 할 길이 없기에 그저 옆에 있는 것을 물어뜯고, 어떤 작은 것에서 비난 할 원인을 찾고, 사소한 것들을 나눠버리고, 바로 눈앞의 것들에 분노한다.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가능한 일들에, 배려와 인정이 없다면 고통은 계속된다. 우린 이 고통과 폭력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언제나 숙제로 남겨놓는다. 행복과 기쁨도 물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나태해선 안 될 것이라 본다. 사실 사람과 세상을 알 수 없는 것은, 알려는 노력을 딱 그 정도까지만 해서 인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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