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통일 기행

강화도와 파주 일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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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구(sinm1129)등록 2017.07.31 17:51
분단. 통일 기행

-강화도와 파주일대를 중심으로

2017년 민주노총광주지역본부의 통일일꾼 수련회가 비무장지대(DMZ) 강화도와파주 일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비무장지대에서 3년 간 군복무한 지도 30년이 훌쩍 지나고, 몇 번을 걸쳐서 이곳을 답사하러왔는데 올 때마다 새롭다.

요즈음 북미간의 대결양상은 갈수록 강도를 높이면서 진행되고 있고, 촛불시위로 탄생한 정권은 민족과 민중의 열망을 담아내지 못한 민족문제 해법을 제시하고 있어서 아쉽다. 이럴수록 민족모순이 우리 민족과 민중의 삶을 억누르고 있어 문제 해결이 얼마나 절실한 지를 더욱 깨닫게 된다.

첫째 날(7.22)

이른 아침에 만나는 장소인 시청에서 버스로 강화로 출발하였다. 광주에 출발할 때에는 폭염이었는데 강화도에 가까울수록 흐린 하늘에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한 날씨였다.

연미정의 모습 고려시대에 지어진 정자로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 신민구


처음 도착해서 강사선생님이 설명해주신 곳은 연미정이었다. 제비의 갈라진 날개 모양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연미정은 삼남지방(호남, 호서, 영남)에서 남해와 황해에 따라 조곡선이 한양에 가기 전에 정박하는 곳이었다. 당시에 조곡선이 천 척의 배가 정박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상업 중심지였다. 배가 정박하는 섬은 앞바다에 있는 유도이다. 정조는 지배세력인 노론과 맞서기 위해서 불법화되어 있는 난전을 합법화하여 세금을 걷고 이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성장시키려고 하였다. 이후에 상공업자들이 주체적으로 농민과 연대하여 새로운 근대주체세력으로 성장하여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 점은 연구해볼만한 주제이다.

연미정과 유도 연미정은 제비꼬리 모양 같아서 이름 붙어진 이름이고,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에서 조곡선이 1000척이 와서 앞에 보이는 유도에서 정박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대몽항전을 위해 간척사업을 넓다랗게 논이 펼쳐져 있다. ⓒ 신민구


고려 때 대몽항쟁을 위하여 개경 부근 백성 50~60만명이 이주하였단다. 이 많은 백성들이 자급자족하기 위하여 연미정 주위에 간척사업을 통해서 만든 논이 넓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몽골의 침략은 한반도가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었다.

강화중앙교회 임시정부 초대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입문한 곳이다. 이 교회는 농지개혁을 주도하고 진보당을 만든 조봉암이 세례를 받은 곳이었다. ⓒ 신민구


강화중앙교회(잠두교회)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가 조선말(1902년) 강화 진위대장으로 왔다가 그만두고 입문한 곳이었다.

1918년 윌슨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이나 베트남 등 식민지를 겪고 있는 제3세계가 독립운동의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였다. 조선은 3.1독립운동을 일으켜 1920년 파리강화회이에 우리 조선이란 국가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중국 5.4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일 끼쳤다.

미국이 제3세계 독립을 민족 자결주의에 의해 지지한듯하였으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여 독립운동가들이 크게 실망하였다. 이 사건 이전에는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을 식민지 해방세력으로 보고 도움을 받고자 하여 기독교에도 많은 수가 입문하였으나 이 후에는 소련으로 발길을 돌리다.

이동휘 참모 박진순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보강하여 식민지 입장에서 민족해방론을 정교하게 다듬어서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의제를 만들었다. 오늘날 남한 사회의 운동세력 중 하나인 NL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다.  조그만한 조지아(그루지아)에서 태어난 스탈린은 민족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쓴 논문이 알려져 레닌이 관심을 갖고 공부해서 자신 이론에 내부화하였다.
이 교회는 농지개혁을 주도하고 진보당을 만든 조봉암이 세례를 받은 곳이었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북방식 고인돌을 맞이하였다. 화순이나 고창 등지에서 본 남방식 고인돌과는 차이가 있었다. 북방식과 남방식을 쉽게 구분하자면 긴 탁자 다리 모양으로 굄돌이 위로 올라온 것은 북방식, 짧은 다리에 윗돌이 노출되어 있는 것은 남방식으로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3군데 모두 유네스코 등재 한국 세계문화 유산이다. 한반도에만 고인돌이 4만~5만개 정도가 있어 전 세계 고인돌의 4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강화 북방식 고인돌 화순과고창과 더불어 유네스코 등재된 한국 세계문화 유산이다. 한반도는 전 세계 고인돌 40%이상이 밀집되어 있다. 비스듬한 상석을 받치고 있는 지석은 역학원리가 적용한 것이다. 고대 국가 초기 단계의 묘소라 할 수 있다. ⓒ 신민구


고인돌은 선사시대 유적으로 초기 고대 국가 성립 시기에 형성된 묘로써 잉여생산물이 가능한 농경 생활을 할 때이다. 이때는 씨족 공동체 사회에서 족장이 공동체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명예를 소중하게 하는 단계를 지나 잉여생산물을 향유하는 지배자로 등장하는 시기라 봐야 할 것이다. 커다란 고인돌을 옮기려면 최소한 400~500백 명의 장정 노동력이 필요할 만큼 권력자야 한다.

거대한 넓은 상석을 받치고 있는 두 개의 지석이 비스듬하게 받치고 있으면서 넘어지지 않은 이유는 직각삼각형의 원리가 기하학이 아니라 역학이 적용된 것이다. 이는 기울어지게 하려는 힘인 모멘트이다. 이는 부조화 속에 감춰어진 조화, 비정형의 정형이다. 남북문제 또한 이렇게 자신의 입장에 따라 세울려고 할 것이 아니라 비스듬한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고조선은 느슨한 거사국(맥국, 예족,고구려족 등)동맹체로 조세가 1/20이나 중국은 1/2이다. 중국은 세금을 백성들에게 수탈해서 중앙집권정치를 꾀한 반면, 고조선읁 각 지역 자치를 폭넓게 인정한 국가였다.

강화평화전망대에 갔다. 여기에서 경기도 비정규직 학교 노동조합원들을 만났다. 미국이 6.25전쟁에 16개국을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실은  법적 근거가 없고 각 개별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참전했음을 각 나라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6.25를 한국전쟁으로 규정하면 북측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내전으로 규정하여 미국이름으로 참전하면 내정간섭이 되어 유엔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6.25전쟁 참전국의 상황 미국이 6.25전쟁에 16개국을 유엔군으로 참전하였다고 알려졌으나 실은 법적 근거가 없고 각 개별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참전했음을 각 나라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 신민구


평화전망대에서 보니 배 한척도 없었고, 뿌연 운무사이로 희미하게 바로 앞 북측 땅이 보였다. 밀물과 썰물이 만나는 지점에서 기다랗게 물결이 겹치고 있었다.

정전협정에서는 한강하구와 서해바다는 남북방한계선이 규정되어 있지 않기에 관리만 할 뿐이다.

평화전망대 평화전망대에서 보니 배 한척도 없었고, 뿌연 운무사이로 희미하게 바로 앞 북측 땅이 보였다.정전협정에서는 한강하구와 서해바다는 남북방한계선이 규정되어 있지 않기에 관리만 할 뿐이다. ⓒ 신민구


안내선생님이 2005년 한강 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가 유엔사와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된 듯 하더니 관할권이라는 이유로 못하게 하였단다. 이를 우회하는 방법은 항행권이 아닌 다리 놓고 가기, 비행하기 등으로 이곳을  평화공간으로 활용하여 남북 평화협정 시발점이면서, 평화협정 후에도 혹시 이를 파기하려고 하면 이를 견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남북이 한강 하구와 서해에 공동 주권, 공동 관할권을 합의하고 선포하면 유엔사가 비무장지대에서처럼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정전협정체제 틈새를 이용하면 부분적인 통일 지역, 통일 특구같은 것이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강하구의 민간 선박 항행을 비롯한 모든 출입행위는 유엔사에 잘못 부여되어 있던 권리들에 대한 준법행동의 성격을 가진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란 시장 확보를 위해서 광성보에서 일으킨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유적지이다.

1885년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하였으나 조선에서는 이 섬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거의 무시하고 강화도와 한강 하구로 하는 서울로 이어지는 축이었다.

쿠데타로 스스로 황제인 나폴레옹3세로 칭하면서 프랑스혁명 성과를 무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식민지 전쟁을 벌이던 차에 조선에서 자국의 선교사 8명이 학살되었다. 이를 빌미로 침략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부인 은이 가장 많이 소유한 중국을 침략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침략이 쉽지 않아서 중국과 특수한 관계인 (조선과 베트남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조공무역을 하면서 왕을 책봉받은 관계) 이 두 나라를 침략하였다.

광성보의 포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조선군은 이 포로 2백년 앞선 프랑스와 미국에 맞서 싸웠다. ⓒ 신민구


프랑스군은 나폴레옹시대부터 (나폴레옹이 당시 선호하던 기마병이 아닌 포병 출신이어서) 포를 개량하여 조선군보다 2백년 앞선 포로 공격하였다.

여기에 조선군은 식량도 변변치 않게 공급하여 병사들은 장군인 양헌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물론 장군이 병사들을 위해 보급투쟁을 하였다.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양헌수는 중국 고사에서 나온 전투를 생각하여 엉뚱하게 산 정상에 위치한 정족산성에 진을 치면서 싸움판을 조선군이 주도하였다. 그래서 프랑스군은 의외라 생각하고 전투병이 아닌 정찰병을 보냈다. 이 때 조선군이 산위에서 공격하여 1명이 부상당하여 후퇴하였는데 다시 전투병을 보내지 않았다. 이 사건이 병인양요(1866)이다.

어재연부대 묘 광성보에서 미군에 맞서 열악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장렬히 싸우다 전멸하였다. 시신을 구분할 수 없어서 7개 묘지에 합장하였다. ⓒ 신민구


신미양요(1871년)는 미국이 조선을 개방할 목적으로 셔면호를 보냈으나(1866) 배는 불태워졌고 선원들은 죽임을 당하여 그 보복으로 공격하였다.

미군은 가장 규모가 큰 포대가 있는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이에 비해 어재연 부대는 열악한 군사장비.무기로 결사항전하였으나 전멸하였다.

다음 날 시신을 수습하러 온 관헌이 보니 시신들이 부패하여 알아볼 수 없어서 7개 무덤에 안장하였다. 어장군만이 칠적거구에 장군 갑옷을 입고 있어서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의 싼 원료와 노예 노동 뿐만 아니라 상품수출 특히 자본수출할 시장을 위해서 시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끊임없는 자본축적요구는 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더 확대된 시장을 계속 요구할 것이다. 임금억압과 복지축소(제3세계 수탈 포함)로 자본가들과 제국주의의 이윤확대는 되었으나 이를 실현할 시장축소로 신자유주의 이념은 그 생명을 다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70년 까지는 케인즈의 총수요관리정책으로(노사간 타협) 자본주의 호황을 누리나 1970년 석유파동으로 이윤율 하락으로 이를 포기한다. 자본주의가 생존할 또 다른 이념이나 정책이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저녁 식사 후에 대강당에서 안내 선생님의(이 선생님은 비무장지대 사진작가) 평화협정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동지들이 1명도 빠지지 않고 진지하게 강의를 들었다. 몇 번 봤던 정전협정 뿐만 아니라 평화협정안도 꼭 봐야겠다.

이후 동지들이 돌아가면서 소감도 말하면서 노래도 한 가락씩 하였다. 자정을 넘기니 내 체력이 바닥이 나서 끝까지 동참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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