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불편한 영화, '택시운전사'

검토 완료

이철수(chulsoo71)등록 2017.08.13 16:42
영화의 제목이 "택시운전사"다. 독일인 기자의 경험에 기초해서 한국 현대사의 사실(혹은 진실)을 알리는 데 역할을 한 택시운전사를 기억하고, 호명하기 위한 작업으로 만든 영화로 나는 봤다.

2017년 현재도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에서 남파된 무장공비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받아들이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있는 상황에서, 당시 취재했던 상황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더불어, 광주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니까 그 시대에 없었던 사람들과 광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때 광주는 어떠했다는 것을 스냅숏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 딱 그까지가 이 영화의 미덕이다.

영화를 잠깐 복기해보자. 독일 기자가 이틀에 걸쳐서 광주에 들어가서 당시 상황을 촬영하고 다시 출국해서 광주의 상황을 독일 언론에 보도했다. 그리고 다시 그 택시운전사를 찾으려고 하는데 안되었다. 기자는 당시 자신을 데려다준 택시운전사를 정말 보고 싶어 했고, 기자는 끝내 택시운전사를 만나지 못하고, 2015년에 죽었다는 것이 영화의 얼개다. 나는 이 영화가 이 지점에서 멈추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실망한 부분은 2003년 기자가 한국에 들어와서 상을 받고 그게 신문 기사로 났을 때, 택시운전사 만섭 씨의 모습이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 그 사건을 겪지 못하고, 나중에 광주를 알게 된 사람들은 독일 기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그 택시운전사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건 우리의 바람이고 희망이다. 우리의 바람대로 만섭 씨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과연 그 택시운전사의 삶은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면 정말 끔찍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봤던 피터 기자의 상황에 따라서 그려진 만섭 씨의 삶을 재구성해보자. 아내 없이 딸 하나를 키우며 택시를 모는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 대 초반의 범부. 어떤 손님이 서울 광주 왕복해주면 일당 십만 원이라는 거금을 제의하면, 그 일은 광주의 상황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거리다. 위험하다는 경고를 받지만,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위험하겠냐고 여기며 그 일을 수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광주로 가서 그 살육의 현장을 본다. 광주에서는 택시운전사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이 그 장면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다. 그리고, 우여곡절을 거쳐 서울로 올라와 독일 기자를 보냈는데, 서울은 아무 일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언론에서 이야기하고 있고, 모두 빨갱이들의 책동이기 때문에 우리 국군들이 진압 작전을 충실히 진행해서 곧 평화를 찾아가고 있다고 대부분의 시민이 믿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택시를 계속해서 몰아 밥벌이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렸다.

이런 상황을 그 택시운전사는 어떻게 느꼈을까? 자기가 본 광주는 살육의 현장이었는데, 그것도 우리나라 군인이 우리나라 민간인을 총으로 죽이는 것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서울에서는 그런 사실이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한 일상. 마치 당나귀 귀를 봐버린 이발사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이건 아니야'를 밖으로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외치며 살아냈어야 했을 것이다. 살 비비며 살 아내도 없고, 그냥 어린 딸 하나밖에 없는데, 누구에게도 자신이 본 것을 말하지 못하고 살아냈어야 하는 그 택시운전사의 삶.

그 택시운전사는 온전히 혼자서 그 시간을 버텨냈을까? 아닐 것이다. 자살하거나 잡혀가서 소리 소문도 없이 세상을 뜨지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술을 마시다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든지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던지가 아니었을까? 나는 만섭 씨가 그 시대를 버텨내지는 못했을 거로 생각한다. 삼백여 명이 타고 있는 세월호의 침몰이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것을 보고서도 그걸 같이 견뎌내는 것이 힘들었는데, 혼자 보고 온 광주의 모습을 혼자 견뎌내는 것이,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택시 운전사가 삶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내 상상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감독이 기대한 것은 현재 그분을 찾지는 못했지만, 잘 버텨내셨을 것이라는희망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 희망의 형태로 그 '택시운전사'를 호명하는 것은, 그분의 고통을 외면하는 잘못된 방식이라 말하고싶다. 대신 그분이 오롯이 겪었을 고통을 같이 공감하고, 이제껏사회가 그 고통을 외면해온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말하고, 앞으로는 그런 고통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겠다는다짐으로 그분을 호출하는 것이 옳은 방식이 아니었을까? 아쉬운 지점이다.
덧붙이는 글 택시운전사 영화의 포스터를 같이 올리려고 생각했는데, 블로그라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겠으나, 혹시 저작권에 이슈가 될 수 있을거 같아 사진 없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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