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사고력'보다 '기억력'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교육…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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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주(jmj9315)등록 2017.09.25 10:4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 겸 평론가로, 환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작품들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통념을 깨트리고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놀라운 상상력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1980년에는 '에스파냐 문학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르반테스상을, 그리고 1961년에는 국제출판인상인 포멘터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비록 노벨 문학상은 수상하지 못했지만, 많은 저명한 작가들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권위 있는 작가였다. 대표적으로 그의 단편소설집 『픽션들』과 『알렙』에 수록된 '보르헤스적 단편소설'들은 전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의 2부 <기교들>에 실린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서는 "아무와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으며 항상 시계처럼 정확하게 시간을 알고 있고 몇몇 기괴한 행동으로 익히 알려진 이레네오 푸네스라는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농장에서 야생마에게 내동댕이쳐지는 사고를 겪게 되고, 그로 인해 전신이 마비됨과 동시에 특별한 기억 능력을 얻게 된다. '나'라는 소설 속 화자는 이러한 푸네스와 하룻밤 동안의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보르헤스는 이 대화를 통해 독자들이 기억력, 사고력, 상상력 등 인간의 지각 능력과 인식 체계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나'가 푸네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자기가 그 푸른색 얼룩무늬 말에서, 떨어진 비 내리던 저녁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자기도 장님이며 귀머거리였고 얼간이였으며 건망증이 있었다," "십구 년 동안 그는 꿈을 꾸듯 살아왔다는 것이다. 즉, 보지 못한 채 보았으며, 듣지 못한 채 들었으며, 모든 것, 거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 상태였다고 했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그는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회복했을 때 현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굉장히 풍요로웠고 굉장히 선명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전신이 마비되었음을 알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은 최소한의 대가라고 합리화했다. 아니, 그렇게 느꼈다. 이제 그의 지각력과 기억력은 완전해져 있었다."

푸네스는 새로이 주어진 그의 능력에 대해 "나 혼자 지니고 있는 기억이 이 세상이 생긴 이래 모든 인간이 가졌을지도 모르는 기억보다 더 많을 거예요."라고 하였고, 이야기의 화자는 "그는 이런 것들을 적어 놓지 않았는데, 그가 생각한 모든 것, 심지어 딱 한 번만 생각한 것이라도 그의 기억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당연히 푸네스를 지칭한다.) 이 두 문장은 푸네스의 기억력이 얼마나 세세하고 정확한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푸네스는 딱 한번 생각했던 것들조차 모두 그대로 저장해버릴 만큼,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축적된 기억의 양이 전 인류가 현재까지 가졌을지도 모르는 기억의 총량보다도 더 많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기억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푸네스를 "거의 참을 수 없을 만큼 정밀하고 순간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세계를 지켜보는 외롭고도 명민한 관객"이라 표현했다. 이는 그의 기억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기억과 같지 않은, 오히려 컴퓨터에 저장된 메모리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인간의 기억은 생명 연장이라는 주요한 목적 아래 왜곡되고, 삭제되며, 변형된다.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5년, 10년 전의 기억과 바로 어제의 기억이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푸네스에게 있어서는 다르다. 그에게는 하루 전, 한 달 전, 일 년 전, 십 년 전의 기억이 모두 같은 비중을 차지하며, 고통스러운 기억이라고 해서 지워진다거나 행복한 기억이라고 해서 왜곡되는 일이 없다. 그는 말 그대로 시시때때로 달라지는 세상을 지켜보며 똑같이 저장하는, 하나의 CCTV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비범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푸네스가 유일하기 때문에 그에게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이러한 삶에서 어떤 느낌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는 푸네스 본인만이 알 뿐이다. 따라서 그는 매우 외롭고도 고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또한, '나'는 푸네스의 기억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에게는 일반적인 사고, 즉 플라톤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실질적으로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명백하게 작가가 단지 기억력이 좋다고 해서 사고의 수준이 높아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기억력과 사고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와 함께 『픽션들』에 수록된 「원형의 폐허들」이라는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이와 연결 지을 수 있는, 교육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 "그는 씁쓸한 심정으로 자신의 가르침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학생들에게서는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가끔씩 합리적으로 반대 의견을 개진하려고 모험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생들은 사랑과 애정을 받을 가치는 있었지만 결코 하나의 개인으로 상승할 수는 없었다. 한편 가끔씩 의문을 던지곤 하는 학생들에게는 좀 더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는 - 어쩌면 진부한 생각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 학생들이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때 필요한 것은 결국 수동적으로, 주는 대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닌 스승이 전해주는 지식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품고 반론을 제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보는 남들과 다른 '사고'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통합사고능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그저 하나의 정보수집체계에 지나지 않는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푸네스가 과연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부딪히게 된다.

보르헤스의 관점에서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자면, 그는 겉으로는 푸네스를 '기억의 천재'라고 일컬으며 상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푸네스가 오직 '기억'하는 데에만 뛰어나며 이를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반어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보르헤스가 푸네스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나'의 생각이 서술된 본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하지만 나는 그가 사고하는 데는 그리 훌륭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본다. 사고라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다. 푸네스의 비옥한 세계에는 상세한 것들, 즉, 곧바로 느낄 수 있는 세세한 것만 존재했다." 이는 푸네스처럼 그저 있는 그대로를 기억하고 그 즉각적이고 세부적인 기억 때문에 차이를 잊지 못하여 종합적 사고와 일반화가 불가능한 상태는 단순히 순간순간을 인식하고 축적할 뿐이며, 순수한 기억으로서는 완벽하다고 평가될 수 있겠지만 인간이 사고하는 기반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푸네스의 남다른 기억 능력은 오히려 기존의 통념을 이긴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소설의 본문 중 화자 '나'와 푸네스가 만나는 대목에서는 로마의 대(大)학자 플리니우스가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모든 자연현상을 기록한 방대한 백과사전인 『자연사(Naturalis Historia)』 중 7권 24장의 마지막 문구가 인용되는데, "한 번 들었던 말을 정확하게 반복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는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말이다. 들은 지 얼마 안 된 말은 몰라도 일 년 전, 십 년 전에 한 번 들었던 말을 정확히 반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푸네스의 능력을 이용하면 한 번 들은 말을 정확하게 반복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 식은 죽 먹기와 같다. 그에게 한 번 들은 말, 한 번 본 것을 똑같이 기억하는 것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다른 기억 능력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대단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인간으로서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국 그의 생각은 그의 감각기관이 받아들인 남의 것들을 모방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기억력과 사고력의 조화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여전히 사고력보다 기억력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교육이 다시 한 번 되짚어보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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