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괴짜 과학자가 없는 이유는 뭘까

[리뷰] 『과학자의 생각법(과학자는 생각의 벽을 어떻게 넘어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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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호(yital)등록 2017.11.12 13:01
괴짜 철학자라고 하면 '김용옥', '강신주', '진중권' 등 몇몇 이름이 떠오른다. 그런데 괴짜 과학자라고 하면 딱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대체로 성실하고 연구에만 매진할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우리에겐 왜 괴짜 과학자가 없는 것일까.

과학사에서 혁명적인 사고로 위대한 발견을 한 과학자들은 대부분 괴짜들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범주를 넘어서는 사고를 한 이들인 것이다. 지식 탐험의 방법을 가르쳐줄 안내서는 없다. 방법을 찾는 건 자신만의 도구상자를 이용해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현재 완성된 과학은 인간이 아는 지식 중 가장 객관적이다. 그러나 진행 중인 과학은 주관적이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어떻게 생각을 이끌고 확장시켰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과학자의 생각법(과학자는 생각의 벽을 어떻게 넘어서는가)』(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저, 권오현 역, 을유문화사, 2017.7.30)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우리에게 왜 괴짜 과학자가 없는지 더불어 살펴볼 수 있다.

과학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과학이란 과학자만의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자연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다. 세상에 호기심을 가지는 누구라도 과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학창시절에 과학을 배웠다. 그러면서 DNA 모형, 벤젠 고리, 주기율표, 유전 암호 찾기 등을 외웠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과학지식을 초기에 고안한 사람들이 정식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이라는 점이다.

책 표지. 루트번스타인은 '괴짜' 과학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김재호


과학은 의심해야 한다

새겨들어야 할 격언이 있다. "열 명의 화가는 동일한 풍경을 보고 서로 다른 그림 열점을 그리지만, 열 명의 과학자에게 동일한 문제를 주면 모두 동일한 답에 이른다." 현재 과학자들의 모습과 과학 교육을 풍자하는 문구다. 예로 우리가 아는 유전 법칙에는 멘델의 법칙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다른 유전 방식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과학자들은 멘델 유전을 더욱 굳건히 입증하는 데만 전념할 뿐 다른 유전 법칙을 확고히 할 생각은 않는다. 다른 유전 법칙을 분석할 개념이나 도구가 부족하다는 것이 게으른 과학자들이 제시한 이유다.

또 다른 예로 '센트럴 도그마'가 있다. 센트럴 도그마에 따르면, DNA의 유전정보는 선형적이다. 즉 DNA의 유전정보는 RNA를 거쳐 단백질로 전달된다. 거꾸로 된 방향은 고려되지 않는다. 여기에는 단백질이 DNA나 RNA로 가는 설명은 없다. DNA에서 바로 단백질로 가는 설명도 없다.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때문인지 과학자 누구도 지금껏 전해 내려오는 '센트럴 도그마'를 의심하거나 시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백질인 면역 항체가 다른 단백질 항체를 만드는 것을 보자면 단백질이 단백질을 만든 것과 같은데, 이는 센트럴 도그마에 위배되지 않는가. 왜 과학자들은 이를 연구하거나 의심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들의 관점이 교과서에 실린 내용대로 굳어져 버린 때문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말한다. "교수님 제가 알아야 할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만 주세요. 저는 그냥 받아들일게요." 자신이 알아야 할 내용을 왜 타인에게서 얻으려 할까. 여기서 학생들이 받아들일 지식은 타인의 주장일 뿐이다. 과학이란 연구해온 수단들이 모여 만들어진 역사다. 지식을 아는 것보다 어떻게 과학자들이 특정 지식과 통찰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들이 이룬 발견을 재창조하여 그들처럼 생각하는 법을 배움으로 과학을 배워야 한다. 자연을 철학해야 하는 것이다.

과학적 발견들을 배워야 한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셸던 리 글래쇼(Sheldon Lee Glashow)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물리학에서 성공을 거두는 사람들이 스승에게 배우는 내용은 이미 확립된 지식이 아니라, 과학적 탐구에 있는 애매모호함과 혼란을 다루는 법이다." 다윈의 예를 보자. 우리는 다윈이 진화론을 정립했다고 배웠다. 진화론 설명에는 항상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함께 따라 나온다. 마치 다윈의 위대함을 더욱 드높일 비교 대상으로서 말이다. 다윈과 어떠한 연관도 짓지 않은 채 그저 실패한 이론으로서만 교과서에 나온다.

그러나 라마르크의 주장은 다윈에게 전해져 실제로 다시 연구가 되었다. 그리고 새롭고 흥미롭게 조합되어 진화론으로서 발표되었다. 부적절하고 잘못되었다고 여겨졌던 라마르크의 이론을 관찰해 모순된 증거를 보고 불충분함을 돌이킨 결과 다윈은 뜻하지 않은 기회를 얻은 셈이다. 이러한 다윈의 생각법 역시 교과서에 실려야 옳다.

다윈의 사례 외에도 버려졌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가설들이 과학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왔다. 그러나 교과서에는 폐기된 이론들은 제시되지 않으며, 과학자들이 폐기된 이론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역시 실리지 않는다. 그 결과 우리는 과학이 성공을 향한 일방통로로써 발전해왔다고만 배우게 되었다. 예를 들어, 다윈 이전에도 진화에 대한 의견들은 있어왔다. 다윈 보다 일찍 진화론을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적 발견의 방법들은 교과서에 싹 빠져있다. '진화론=다윈' 같은 공식과 함께 진화가 무언지에 대한 사실만이 실려 있다. 우리는 진화론적 사실이 아닌 진화가 일어나는 기제를 먼저 배워야 한다. 사실을 조직화 하는 원리를 말이다.

'과학적이다'는 말의 양면성

'과학적이다'는 말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몇 사람이 "원래 까마귀는 검다."는 말을 한 뒤 "그건 과학적 사실이다"고 덧붙이는 순간 논쟁은 끝나버린다. '과학적이다'는 문구 자체에 지적인 권위가 있어 사람들은 무조건 맹신을 한다. 그렇게 과학자와 지배자들이 만든 과학이라는 지식 속에 갇혀 사람들은 "다른 색의 까마귀는 없을까."라는 비판조하 하지 못한다.

다른 의미로 '과학적이다'는 말은 철학적이자 예술적이라는 의미가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자연이 쓸모 있어서 연구하지 않는다. 자연을 연구하는 일이 기쁘고 좋아서 할 따름이다. 이들이 자연을 연구하는 근원은 자신들의 지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다. 이들 과학자 다수는 미술, 음악, 글쓰기, 건축 등 예술가이기도 했다. 예술적 미학이 자연으로 뻗어나가 자연을 예술과 같이 탐구하면서 과학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미국의 화학자 찰스 마틴 홀(Charles Martin Hall)의 경우 알루미늄을 정제하던 중 문제가 안 풀릴 때면 언제든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 또 다른 예술을 느끼곤 했다.

예술뿐 아니라 철학하는 것 역시 과학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유명 과학자들은 철학을 하다가 과학을 하게 되었다.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방법을 배우고 유연성과 지혜를 얻는 훈련을 한 결과다. 그 뒤 과학적 체계의 확실성을 배워 상상력을 펼쳐나갔다. 이들의 철학이 인간 사회로 뻗어나갔더라면 사회 철학자가 되겠지만, 자연으로 뻗어나갔기에 과학 철학자들이 된 것이다. 이들 과학자들은 자신만의 철학을 증명하기 위해 깊이 있는 실험과 생각을 해나갔다. 캐나다의 지질학자 투조 윌슨(Tuzo Wilson)의 경우 자신의 지질학적 철학을 연구해 하와이섬에 대한 19세기 연구의 모순을 깨닫고 새로이 고려하여 현대 지질학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우연으로 보이는 철학적 발견들 … 준비된 마음이 일상의 숭고함 이끈다

과학 철학은 많은 과학 분야가 새로이 생기거나 기존의 과학과 대치될 경우 격렬하게 대치되어 토론 거리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과학의 개척자는 동시에 철학의 개척자이며, 과학이란 자연의 현상을 해석하려는 방법적 철학이다.

오늘날 약의 작용이나 암의 정의 등 해결되지 않은 과학적 문제가 아직껏 남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다룰 적합한 철학이 없어 해결되지 않은 건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의학사학자 헨리 지거리스트(Henry Sigerist)는 1932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모든 실험은 철학적 준비를 요구한다. 많은 암 연구는 철학적 배경 없이 수행되었고 그래서 쓸모가 없다." 지거리스트의 말이 옳은 건지, 철학 없이 실험과 연구만 하는 현실 속에서 암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인식론 없는 과학은 원시적이며 뒤죽박죽이다."는 말을 했다.

뉴턴은 중력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사과가 떨어진 때에 사과 속에 집어넣었고, 플레밍 역시 균류에 대한 철학을 오래 생각하고 실험한 결과 푸른곰팡이를 알아보았다. 우연이라 여겨진 이러한 과학적 사건들이 오랜 생각 속의 도화선이었던 것이다. 만약 자신만의 철학적 습관이나 정보가 부족했더라면 떨어지는 사과나 페니실린 균을 보고서도 뉴턴이나 플레밍은 아무런 통찰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자의 생각법』의 저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의 말마따나, 준비된 마음만이 예기치 못한 일상의 숭고함을 인식할 수 있다.

과학적 도구보다 앞서야 하는 과학적 생각법

현재 과학 교육은 어떨까. 학생들은 '과학 하는 사람들' 하면 하얀 가운을 입고, 복잡한 도구나 기계가 있는 거대한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과학을 기구가 있는 특정 현장에 속에 있어야만 하는 권위적이고 다가갈 수 없는 분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하얀 가운을 입고 기계를 다룰 능력이 되기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인슈타인, 뉴턴, 다윈, 파스퇴르 등 유명 과학자들은 기술에 앞서 생각을 먼저 고안하라고 말해왔다. 그래서 '과학 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의미는 과학에 필요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인슈타인, 뉴턴과 같은 과학적 생각을 가진 이라면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 있든 과학을 할 수 있다. 자기만의 작은 실험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네덜란드 화학자 반트 호프나 독일 화학자 오스트발트, 스웨덴 화학자 아레니우스도 과학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 중 일부다. 이들은 실험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하급 기관에서 연구를 했었다. 플레밍의 경우 아주 비좁아서 침대 겸 소파가 겨우 두 개 들어갈 정도의 실험실에서 연구했다. 내분비학자 섈리는 제대로 된 장비가 없는 재향군인회 병원에서 뇌 펩티트를 분리해 냈다. 또한 왓슨과 크릭은 판지로 만든 DNA 염기 모형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생각을 가진 영리한 과학자라면 시험관과 피펫 몇 개만으로도 실험하는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발견을 이루는 주체는 사람이지 과학 장비와 넘쳐나는 연구실이 아니다. 현재 연구원들은 끊임없는 출장과 들쑥날쑥한 연구비, 연구비 지원 대상을 자주 바꾸는 관료 기관들의 행태로 인해 생각을 키울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말하곤 한다. "영리한 과학자를 배출하는 것은 과학자의 수에서 나오지 않는다. 과학자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적절한 조건이 필요하고, 소수의 과학자도 독립적이면서도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의 지원에 앞서 과학이 무엇이고 과학을 지원하는 이유 등을 과학자 입장에서 생각해야 할 때다.

괴짜 과학자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

과학은 조립 라인처럼 조직될 수 없다. 다양성을 최대화해야 한다. 정부와 민간, 기부자, 벤처 기업들은 과학과 기술에 재정적 지원을 해야 하고, 과학자들은 제한 없이 자유롭게 연구비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기관들은 연구실을 키우는 것이 아닌 사람에 투자한다고 여기고, 주변의 작은 기관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도 동등한 투자를 해야 한다. 연구자들이 즐겁고 여유를 가지도록 성과를 산업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도 묻지 말아야 한다.

자신만의 과학적 생각에 답을 얻으려면 최신 논문 뿐 아니라 오래된 문헌들도 뒤져야 할 때가 많다. 저자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50~100년이 된 오래된 연구들을 읽는 방식이 새로운 문제를 찾는 한 가지 방법이다." 100년 전에 제시된, 송과선이 사춘기를 억제한다는 이론은 최근 독일 괴팅턴 대학의 호이브너 교수가 실험 결과를 설명하고자 재인용했다. 또한 중력파의 이론은 100여 년 전 아인슈타인이 제시하지 않았던가. 과학은 오류 없이, 무모한 상상 없이 벽돌을 쌓듯 발전하지 않았다. 오래된 논문을 들추어보는 시간까지 고려한 꾸준한 연구비 지원이 필요하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그런 새로운 생각이 무슨 쓸모가 있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아기는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현실에 쓸모 있는 과학에만 지원을 하는 것은 과학자가 아닌 기술자를 키우는 일이다. 다윈처럼 20년의 시간을 들여 생물학을 재편하는 일이 오늘날 과학자들에게도 가능해야 한다. 특허청 직원으로서 논문을 발표한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희귀하고 가치 있는 과학자들을 양성해야만 우리나라에도 위대하고 혁신적인 과학자가 나올 수 있다. 지금껏 수많은 사회 혁명이 역사 속에서 처절한 피를 흘리고 사그라져왔다. 과학 혁명에도 기존 세태에 반하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피가 묻어 있다. 태어나자마자 권위적인 과학에 죽어버린 어린 과학의 피가 말이다.

되돌아보아야 하는 과학 교육

과학을 깔끔하게 정돈한다면 교과서밖에 안 된다. 세상이 하나로 흘러가지 않는 것처럼 과학적 생각에도 다양한 변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 심리라는 것이 수많은 진리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이리저리 흩날리기 보다는 마음잡을 하나를 원한다. 인간 존재는 늘 아무런 설명이 없는 상태보다 부적절한 설명이라도 갖길 원한다. 그러한 마음은 과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과학이 진리라면 답은 유일해야 하는데 왜 또 문제가 생기고 답이 만들어지는 걸까. 왜 과학자들은 오래된 답을 끊임없이 재평가하는 걸까.

과학자에게 위험이 닥치는 순간은 스스로 조직을 이룰 때이며 학계, 대학, 사회, 정부가 과학에 내린 선고를 존중하고 지키기 시작할 때이다. 그런데 진짜 위험은 연구비를 주는 단체에만 있지 않다. 자연에는 오직 하나의 답만 있고, 답은 수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공식이어야 한다고 훈련을 받은 과학자들 역시 위험하다. 답을 말해주길 기다리는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도 위험하다. 이러한 눈망울은 과학자가 수년에 걸쳐 밝힌 복잡한 특성을 짧은 시간에 습득하고 필수 개념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학생들의 안타까운 눈망울이다.

10대 학생들이 대학교 전공 서적을 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고, 위험하다는 호통을 들으며 실험도구들을 만지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과학을 배워야 할 특정 학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학생들을 과학자로 만들려면 해답을 외우게 하는 것보다 질문을 많이 하고 스스로 탐구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새로운 과학 지식이 나올 때는 지났고,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자연을 보는 특정 시각의 한계에 다다른 것뿐이다. 과학적 생각법을 훈련받아 뉴턴의 사과나 플레밍의 곰팡이처럼 그냥 지나칠 법한 현상을 창의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책에만 향해 있는 눈을 자연으로 돌릴 때다.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배우면 누구든 예술가가 되고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상력이 자연으로 뻗어간다면 과학자가 되고 사회로 뻗는다면 사회학자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자의 생각법』은 사물의 아름다움을 보고 삶을 생각하는 철학적 방법이 제시된 고전적인 책과 같다. 남녀노소 누구든 이들이 어느 분야에 있던 한 번쯤 보면 좋을 책이다. 과학이 사상이 되어 버린 현실 속에서 거짓된 사상과 정보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우리는 과학자로서 생각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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