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한자어는 조금 안다. 책의 제목인 공생충을 접했을 때 함께 살고 있는 벌레라고 뜻을 떠올렸었다. 부정어로 누군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같이 살고 있되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벌레같은 인간. 그게 주인공을 가리키는 건가 책을 읽기 전에는 선입관이 형성되었고 책을 읽은 후에도 달리 해석하지 않는다면 살인자이자 정신병자인 주인공이 그렇게 가리키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군 생각했다. 대개 소설은 함의를 가지는 문학의 대표적 양식이다. 액면 그대로 줄거리만을 독해한다면 별반 가치 없는 것일 수 있다. 소설이 함의를 가진다는 말은 그것이 포함하는 인생의 다면성을 독자에게 배달할 의도나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공생충이 그러한 함의를 가지는 뛰어난 작품일 때 그것이 배달하는 메세지는 더욱 더 다면적인다. 우리가 공존이라는 미명으로 함께 사는 저 많고 많은 악마들을 보라! 작가가 배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그의 텍스트를 통해 산포하는 죄악의 핏방울들이 주인공의 책임이 실제로는 아닐 수 있다는 형사법적 변호문이다. 책에서 주인공은 여러 차례의 살인을 한다. 패륜이라는 말로 이중 재단될 수 있게 아버지와 형을 살해하고 우연히 알게 된 방송인들을 독가스로 중독시켜 살해한다. 대개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되면 거기에서 사람들은 마음을 잃게 된다. 이유나 원인을 잘 살피기에는 전혀 자신과 관계없고 자신의 일이 아닌 알고 싶지 않은 남의 범죄이다. 책의 말미로 오면 그주인공은 체포되지 않고 처벌받지 않고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 지하철 역에 독가스를 설치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어차피 나와 관계 있는 내 일도 아닌 바에 여전히 무뚝뚝하게 성마른 표정으로 일관하는 게 대개의 사람들이다. 책의 전체적 맥락으로 폭력의 죽은 역사가 일본의 근대사로 포장되어 나타난다. 주인공의 살인의 이유가 어떤 식으로 건 역사나 사회와 관계된다는 시사가 나타난 것이다. 이차 대전에서의 일본의 패망과 관련한 여러 종류의 설명이나 묘사가 사건의 형식으로나 사건 없이 마치 자료문처럼 주어진다. 그것들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잘 살핀다면 주인공의 행위 규범의 정당화하는 기제로 쓰이는 것이다. 순간 아연실색하면서 아, 이래도 되는 것인가 하고 한탄을 하는 늙은 일본인 비평가 한 명을 상상해 내어도 좋다. 작가는 플롯의 힘을 빌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게임을 걸고 있구나 미국 공포 영화의 어떤 설정들이 불현듯 떠오를 수 있다. 문예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시공간에서 작가는 그것의 한계나 한도를 한참 남게 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철학과 이념의 메세지를 소설화로 보여주는 것이다. 문예물은 그 정체성이 무엇일까 마지막 질문이 성급히 결론으로 도달한다. 문예물이나 문예물의 표현의 자유의 보호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선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그렇다면 누구인가 추측할 때 그 창작된 인간은 일본인 자체이거나 인류의 인간 자체이다. 개인성이라고 한하지 않아도 자유로운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체로 살고 그것에 방해되는 목적물은 제거하거나 파괴한다. 그 개체에게는 함께 살 수 없는 자가 어쩌면 자기 자신이 된다는 측면은 없는 것이다. 주인공이 보기에 또는 그의 복화술사인 작가가 보기엔 함께 살 수 없은 자는 따로 있고 거기에 이 소설의 충격적인 면모가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아버지이거나 형이거나 방송인들이거나 거리의 무명의 시민들이다. 거기로 소설의 작법은 별반 핑계나 이유대기가 없다. 그다지 중언부언하는 설명도 없이 스펙타클의 정치로서의 살인쇼가 그것도 문학의 미명으로 진행한다. 거기에 관해 객관적인 언도문이자 자료문들이 간접화해 소설의 성긴 플롯의 사이 사이에 얼음 조각처럼 박혀있다. 소설의 본 사건들과는 무관하게 풍경화의 사물들이나 정물화의 정물들처럼 얼핏보면 그것들의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다. 본 플롯을 겉돌거나 장식이나 토핑처럼 본 플롯의 피맛을 꾸미고 있다. 그것들과 그것들은 무관할까? 만약 그것들 간의 인과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첩보부에서 보낸 비밀 명령문처럼 타버릴 것이고 그것들은 부인된다. 명심하라! 소설은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평판과 달리 가공의 편지이다, 독자에게 배달된. 독자는 거기에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는다면 소설의 이데올로기의 독과 최면에 걸린다. 아닐까? 아니라고 생각할까? 메세지를 담은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목적물은 텍스트가 아닌 대다수의 독자들이고 그들을 변용하여 변형 생성하려 한다. 책의 목적성은 함께 사는 벌레로 부르는 사실은 함꼐 살 수 없는 벌레들의 진혼곡이다. 그 진혼곡의 레퍼토리 중에서 주인공이야말로 함께 살 수 없는 벌레로 되어 함께 사는 벌레 중 하나다고 허탈하게 호명되고 있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공생충/무라카미 류/양억관,장정일/이상북스 #공생충 #잔혹 미학 #무라카미 류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