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 엄동설한에 연거푸 이사를 두 번이나 하게 되었다. 지난 12월 22일 서울 사는 아들 자취방을 옮겼다. 6500만원에 전세 살던 원룸이었는데 2년 계약기간이 지나자 집 주인이 보증금 1000에 월세 50으로 바꾸던지 아니면 이사를 가라고 했다.
다행히 그리 어렵지 않게 근처에서 신축원룸을 구했는데 전세 보증금으로 9000을 달라고 했다. 2년 사이에 보증금이 2500만원이나 올랐지만, 그래도 월세 부담 없는게 어디냐며 마음 달랬다. 아들 자취방 보증금 마련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작년 연말로 계약기간이 끝나는 내가 살고 있는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을 팔려고 내놨는데 안 팔린다면서 "싸게 줄 테니(부동산에 알아보니 시세와 같았다) 집을 사던지 아니면 집이 팔릴 때까지만 살다가 팔리면 곧바로 비워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언제 집이 팔릴지 모르는데 그렇게 불안하게 살 수 없으니 계약을 2년 연장해달라고 했다.
사실 내가 사는 집은 작년 봄부터 부동산에 매물로 내 놨지만 연말까지 단 한 명도 집을 보러오는 사람이 없었다. 공인중계사들 이야기도 집 주인이 내놓은 시세로는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최소한 시세보다 2000~3000은 가격을 낮춰야 겨우 거래가 된다고 했었다.
▲ 국회에서 개최된 세입자보호 정책 토론회 ⓒ 참여연대
집 값 떨어지는데 집 사라...안 산다다니 나가라
아파트 값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대출을 끼고 집을 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했고, 전세로 2년 정도 더 살면서 집값이 더 내린 후에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하고 의논해보겠다고 했고 혹시라도 이사 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 며칠을 보냈다.
며칠 후에 연락이 와서 "전세 보증금은 걱정하지 말고 이사 갈 집이 구해지면 집을 비워달라"고 하였다. 집을 여러 채 가진 집 주인 이번에 꼭 집을 팔려고 마음먹고 빈 집으로 두더라도 전세로 내놓을 생각은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생각이 짧았거나 순진하였다.
결혼 후에 2년 쯤 전세살이를 하고 그 뒤엔 작은 평수지만 내 집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세입자가 겪는 '설움' 같은 건 모르고 살았었다. 그런데 막상 집주인이 자기 집을 비워달라고 하니 서운한 마음이 확 밀려들었다. 집주인이 날짜를 꼭 지키라고 조르지 않았지만 계약기간 끝나는 날에 맞춰 이사를 가야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많이 생겼다.
2년 전 전세살이를 시작할 때는 "작은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도 꼬박꼬박 재산세 내야 하는데, 아파트 보다 비싼 전셋집은 세금도 안내고 참 좋다"면서 만족스러워 했었는데, 막상 집 주인이 자기 집을 비워달라고 하니 '집 없는 설움'이 이런거구나 싶어 많이 서글펐다.
그날부터 부랴부랴 전셋집을 찾아봤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같은 평수는 전세로 나온 집이 없었다. 한 달 넘게 집을 알아보던 차에 지금 사는 집 보다 작은 평수 아파트가 하나 전세로 나왔다. 무작정 같은 평수 아파트만 기다리다 작은 평수 전세마저(월세는 더 큰 부담이라서) 놓쳐버릴까 걱정이 되어 계약을 하였다.
계약 직전에 집 주인에게 "오늘 계약하면 1월말에 이사를 하게 된다고 보증금을 준비해 달라"고 연락하였더니, "이사 날짜 맞춰 보증금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이사준비 잘 하라"고 하였다.
매사에 긍정적인 아내는 작은 평수로 옮겨가면서 남는 전세보증금으로 아들 자취방 보증금 인상된 걸 은행 대출 안 받고도 올려줄 수 있어 오히려 잘된 것 같다고 했다. 내심으로는 작은 평수로 옮겨가는 게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아내 말도 일리가 있다 싶어 계약서를 쓰고 이사준비를 시작하였다.
지난 연말 서울 사는 아들 자취방을 옮기면서 저축 500만원과 나머지 부족한 돈은 부모님께 빌려서 보증금을 올려줬다. 내가 사는 아파트를 작은 평수로 옮기면서 남는 보증금 차액으로 빌린 돈을 갚고 이사비용으로 (이사, 부동산 중계료 등)써야하니 아내 말대로 잘 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집 판다고 나가라더니...두 달만에 딴 사람에게 전세로 내놔
그런데 어제 오후 두 달 전에 이사 갈 집을 알아봐달라고 부탁해놨던 부동산 사무소의 공인중계사에게 전화가 왔다.
"사장님 부탁하신 OO아파트 OO동 전세가 하나 나왔는데...혹시 이사 갈 집을 구하셨나요?"
"아 예 구하놓기는 했는데... OO동 전세가 나왔습니까? 몇 동 몇호인데요?"
"부동산에서는 동호수를 그냥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네 혹시 4층인가요?"
"네 4층 맞는데요....(말끝을 흐리고 당황해 하였다)
"402호 맞지요? 저희 집 주인이 제가 사는 집 전세로 내놨나 보네요? 참 어이없네"
공인중계사는 402호가 아니라는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리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통화를 하는 순간 배신감, 서글픔, 황당함 같은 감정들이 한꺼번에 들이 닥쳤다. 집을 팔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살던 집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집을 다시 전세로 내놓았다고 하니 그런 마음이 들었다. 집을 팔려다가 못 팔아서 전세로 내놓은 집 주인의 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집 없는 세입자가 느끼는 서운하고 서글픈 마음이 가시지는 않았다.
밤에는 2년 전 지금 내가 살던 집을 소개해줬던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집주인이 매매를 전세로 바꿨는데 전세 얻을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니, 집을 좀 보러 가고 싶다"는 거였다. 시간 약속을 정해 집을 보게 해달라고 하였다.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그러마'하고 약속을 정했다.
나는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집 주인은 새로운 새입자를 들이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손해고 집 주인도 손해다. 나는 이사비용과 부동산 중계수수료를 합쳐 300여 만 원을 지출해야 하고, 집 주인도 80여 만원 중계수수료를 지불해야 하고, 도배나 바닥 공사를 추가로 해줘야 할 수도 있다.
지은지 12년이나 된 아파트라 나무 바닥이 많이 낡았다. 나야 2년 살았던 집이기 때문에 2년 더 그냥 살았겠지만, 새로 전세 입주하는 세입자는 낡은 나무 바닥 그대로 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냥 전세 기간을 2년 연장해줬다면 확실히 아무도 손해를 안 볼 수 있었던거다.
결국은 서로가 손해 보는 가장 나쁜 결과로 이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나중에 알고 보니) 집 주인도 공인중계사가 권하는 대로 했던 것 같다. 집 주인과 계약 기간 연장을 의논할 때 부동산에서 계약 연장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는 전화도 왔었다.
"1월 초까지(두 달 정도) 집을 매물로 내놔보고 그 때가도 안 팔리면 전세로 내도된다. 매매는 거래가 뜸하지만 전세 아파트는 금방 세가 나가니 보증금 반환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인중계사 입장에선 그야말로 손해 날 게 없는 장사다. 집이 팔리면 더 많은 중계 수수료를 받을 수 있고, 그러다 안 팔려도 다른 세입자에게 전세를 소개하면 중계수수료를 한 번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공인중계사가 "어차피 시세 그대로는 집을 팔기 어려우니 전세 기간을 2년 연장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면 아마 그냥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그렇게 되면 공인중계사에겐 아무런 수입도 생기지 않는 제일 나쁜(!)결과가 된다. 앞서 내가 순진하거나 무지하였다고 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아파트 시세의 2/3는 전세보증금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파트의 1/3은 집주인 재산이지만, 나머지 2/3는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맡긴 내 재산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계약 기간이 끝나면 기간 연장이든 보증금 인상이던 중요한 의사결정은 집 주인 마음대로 다 한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집 값 2/3는 전세보증금...2/3는 내 집이나 다름없는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전세 사는 사람들이 한 집에서 좀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주택임대차보호법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전세보증금도 집주인 마음대로 올릴 수 없도록 물가인상률을 감안하여 최저임금처럼 사회적 합의 기구를 만들어 정부가 인상폭을 결정하는 방법도 가능하지 않을까?
세입자에게 2회의 계약 갱신 청구권을 보장하는 법 개정안과 최소 기간을 3년으로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라고 하지만 집 가진 사람들,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으니 조만간 법이 개정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공인중계사 이야기로 내가 사는 집 주인은 아파트를 여러 채 소유하고 있다. 최근 지방도시 집값이 많이 떨어졌지만 단 한 채도 싸게 팔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전세 기간도 연장해주지 않았고, 2년 살던 세입자를 내 보내고, 새로운 세입자를 들이기로 한 것이다. 집을 싸게 파는 것에 비하면 중계수수료 정도는 푼돈에 불과하니.
보름 쯤 후에는 지금 살던 집을 떠나 작은 집으로 옮겨야 한다. 아내는 남는 돈으로 아들 보증금 올려주면 딱 맞다며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하지만, 살던 집에서 쫓겨나고 그 집에 또 다른 세입자가 들어온다고 하니 웬지 서글프고 서러운 마음이 든다. 이 넓은 지구에 내 이름으로 된 땅 한 평도 없다. 아~ 이 엄동설한에 이사를 가야하는 집 없는 자의 설움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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