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인 김이뭐뭐씨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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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smug21)등록 2018.01.17 14:22
몇해 전에 치러진 지방선거와 관련해서 연일 뉴스에 오르내렸던 소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성 우선 공천' 또는 '여성전략 공천'입니다. 여성 우선 공천이란 특정 정당이 몇몇선거구에서 말 그대로 여성 후보를 우선적으로 공천하겠다는 이야기인데요. 일부 지역에서 그 동안 지방선거를위해 공을 들여온 남성 후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기도 하고, 역차별이라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하면서 최초의계획에 비해 대폭 축소된 채로 실행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이 방안을 기획해낸 사람들도 이런 다양한반응과 변수들을 생각하지 못했던 건 아닐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시도를 했던, 또는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청년 실업이라는말이 우리 사회의 핫 이슈가 된지는 벌써 몇 년째가 되어갑니다. 그와 관련하여 한 가지 주목해 볼 점은여성의 사회, 공직 진출을 확대하기 위해 여성에게 일정 비율의 자리를 할당하는 제도인 '여성고용할당제'입니다. 88만원세대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할 만큼 일자리 얻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운 이 시기에 특정 성(性)을 가진 이들에게특별한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습니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의 활약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있는 현상은 이제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을 정도이고, 사법고시에 합격하는 이들 가운데 여성이 차지하는비율도 점점 높아지고 있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여성들이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전통 시대에 비해서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나 여성이라는 이유로역량과 가능성을 공정하게 평가 받지 못한 채 남성의 그림자 속에서 차별 받고 있는 여성들도 적지 않은 게 사실이죠.

이런 상황을개선하고자 활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이 더 많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앞당길 거라 믿고 싶습니다. 여성들에게 좀 더 밝은 미래를 안겨주기 위해서 힘있는 변화의 노력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페미니스트라고 부릅니다. 여권운동가라는 말로 불리기도 하죠. 일반인들과 여권운동가들을 구분하는가장 손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들의 이름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이나방송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성(姓)을 두 글자로쓰는 사람들의 이름을 종종 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이뭐뭐'나 '박최뭐뭐'처럼 말이죠. 흔히 아버지의 성을 따라 본인의 성으로 쓰고 그 뒤에 이름을 두 글자를 붙인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이렇게 성을 두 글자로 쓰는 사람들은 '남궁'이나 '황보', '선우'처럼 원래 두 글자로 된 성을 쓰는 사람들이 아닌 다음에야 대개 어머니의 성을 아버지의 성과 나란히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성과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성을 함께 쓰는 거죠.

이유인즉슨 아버지의성과 함께 어머니의 성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쓴다는 겁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뿌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일에 공감하고 양성(兩性)을 고루 존중할것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걸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재미있는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성을 존중한다는의미에서 함께 쓴다는 그 어머니의 성도 사실은 어머니의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여성의 뿌리를 존중하고 계승하는 의미에서 쓰는 성도 알고 보면 남성의 것이라는 얘기죠. 뭐 그거야 그렇다하더라도 어머니가 평생을 써오신 성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춰 생각하면 물려 받아 쓰는 일이 여성을 존중하는 일이라고 못할 것도 없긴 합니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그 여성이 후손을낳아 이름을 지어줄 때 그 문제는 발생하는데요. 김이뭐뭐라는 이름을 쓰는 여성과 박최뭐뭐라는 이름을쓰는 남성에게서 태어난 후손의 성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김이박최뭐뭐라고 해야 할까요? 이렇게 된다면 손주의 손주쯤 되면 성이 굉장히 길어질 수밖에 없겠죠? 그럼그런 현상을 피하기 위해서 양쪽의 두 성 가운데 하나씩 골라서 쓰면 될까요? 하나씩 고른다면 어머니의성을 골라야 할까요 아니면 아버지의 성을 골라야 할까요?

이쯤 되면 문제가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까지 오래도록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아 썼으니까 이제부터는어머니의 성만 쓰자고 주장하면 될까요? 사회적 합의만 전제로 한다면 그렇게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럼 외국의경우를 볼까요?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문명 국가에서는 모두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아 사용합니다. 물론 어머니의 성을 이른바 middle name으로 사용하는 서구의나라들도 있긴 하지만 그 성을 계속 물려받아 성을 한 없이 길게 쓰는 나라는 흔치 않습니다.

더구나 세계문화의 중심을 자처하는 미국의 경우 여성이 결혼을 하면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을 따라서 자신의 성을 바꾸어 쓰기까지 합니다. 힐러리 클린턴도 남편 빌 클린턴의 성을 따라 쓰는 건 그가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가져서가 아니라 적어도 몇백 년 동안 또는 그 이상 사회가 약속해온 방식을 따르기 때문인 거죠. 몇 년 뒤 세계에서 가장 강한나라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한 인물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현상을 놓고 그 나라의 여권이 어떠한지를 논의하는 일은 자칫 무의미한 일이 될지도모릅니다. 그걸 기준으로 한다면 여성이 결혼 후에도 결혼 전의 성을 그대로 쓰는 우리나라가 훨씬 더나은 형편이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상황이 이럴진대우리 사회에서 생각이 좀 깨었다고 자처하는 여성 인사들 사이에서 자신의 아버지의 성과 함께 어머니의 성을 나란히 쓰는 걸 마치 의식 있는 사람의징표인양 여기는 현상이 있는 건 아닌지 한 번 돌아볼 일입니다. 후대에 물려줄 수도 없고 따지고 보면어머니의 아버지를, 그리고 그 아버지를 계승하는 일일 뿐인 게 '어머니의성도 함께 쓰기'라면 그 또한 일종의 보여주기식 이벤트와 크게 구별되지 않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기계적인 균형은그 동안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인 용도로만 추진되어야지 그것이 지금까지의 불균형을 영원히 바로잡을 수 있는 열쇠인양 사용되어서는안 됩니다. 여성 우선 공천이나 여성고용할당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그 또한 역차별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거센 반발에 부딪히지 않으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취지와 의미를 양성 모두에게 친절히 설명하고자발적인 공감을 유도해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한시적인 움직임 때문에 자칫 피해를 입을 수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빠뜨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남성들이 이익을 봤으니 이번엔 좀양보하라는 말로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 동참을 이끌어낼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이익을 본남성들은 적어도 중장년층 이상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일 테니까 말이죠.

여성의 권익을제대로 신장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해왔던 걸 하나하나 바꾸려는 근본적이고도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어머니의 성을 가져다 쓰는 일이 단기적인 방편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조차도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쓰지않는 사람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잣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우리가흔히 쓰는 말 가운데 알게 모르게 여성을 낮잡아 보는 말이 없는지부터 살펴보는 일을 먼저 하면 어떨까요? 그런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미망인(未亡人)'입니다. 미망인은 배우자를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낸 여성을 일컫는 말이죠. 그런데그 뜻을 자세히 살펴보면 살짝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자를 그대로 풀어내면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남편을 먼저 앞세우고도 아직 살아있는 죄인'쯤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녹아있는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요즘 이말을 쓰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의 유래가 그렇다는 걸 안 이상가능하면 그 말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말을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약속해서 쓰는 것이 좋아 보이는 건 분명합니다.비단 '미망인'뿐만 아니라 몇 가지 예를 더찾아볼 수 있습니다. '안내양'을 '차장' 또는 '승무원'으로, '식모'를 '가사 도우미'로, '간호원'을 '간호사'로 바꾸어썼던 것처럼 '미망인'을 대신할 수 있는 말도 얼른 만들어지거나찾아지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신문이나 방송에서 '미망인 김이뭐뭐씨'라는 표현은 보지 않도록 말이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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