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억원은 5만원의 만 배

숫자 읽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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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smug21)등록 2018.01.17 14:22
얼마 전 한기업인의 교도소 노역 일당이 무려 5억원이라는 뉴스가 연일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의 일당이 5만원인데 비해서 무려 만 배나 차이가 나기 때문인데요. 더군다나 각종 벌금과 세금을 합해서 수백억 원을 내지 않고 국외로 도피했다가 돌아와서 받은 판결의 내용이 그랬기에보통 사람들이 법과 정부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이 배신감을 넘어서 허탈에까지 이르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일들 때문에 미국 하버드대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센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 미국에서보다 무려 13배나 더 많이 팔렸을 거라고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이 두 가지 상황이 왠지 모르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괜한 게 아니겠죠. 

이 이야기는이쯤 하고 화제를 좀 돌려볼까요? 5억원이 5만원의 만 배라는말, 쉽게 와 닿으셨나요? 혹시 '5억원이면 500,000,000원이니까 0이 하나 둘 셋 넷…… 여덟이고,5만원이면 50,000원이니까 0이 넷이라, 가만있자 0이 4자리더 있으니까 일, 십, 백,천, 만 음 만 배가 맞겠네'라고 속으로 계산하시거나종이에 써보신 분은 안 계신가요? 억이 만의 만 배라는 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이런 것 밖에는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죠.

우리는 흔히숫자를 쓸 때 천 단위, 그러니까 0이 셋 들어가고 나면쉼표를 하나씩 찍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우리나라가 서방 세계와 활발한 교류를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거의 전 세계가 그 방법을 따르고있죠.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방법이 이미 국제표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나라가 땅 덩어리도 좁은 편이고 자원이 부족한 데다가 무역에의존해서 경제성장을 추구할 수 밖에 없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서양은 왜 그런 표준을 만들었을까요? 잘 따져보면 거기엔 작은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식민지배에서벗어나 현대의 세계 경제 무대에 등장했을 때 세계 경제의 중심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영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나라죠. 영어에서는 숫자를 일컫는 말이 바뀌는 기본단위가 '천'입니다. 즉'thousand'죠. 어디 한 번 볼까요? 1은 one, 10은 ten,100은 hundred, 그리고 1,000은 thousand입니다. 여기까지가 기초 단위고 10,000부터는 ten thousand, 100,000은 hundred thousand죠. 쭉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천, 백만, 십억에해당하는 thousand, million, billion 등이 큰 단위가 되고 거기에 one과 ten, hundred가 앞에 붙어서 숫자를 세는 겁니다. 예를 들면 천만은 10,000,000인데 영어로는 ten million이고 오십만은 500,000인데 five hundred thousand가 되는 거죠.

뭔가 규칙성이보이시나요? 맞습니다. 바로 0이 셋 들어가는 자리에 쉼표를 찍은 뒤 쉼표 앞의 숫자만 읽으면 되고 나머지는 쉼표가 하나인 경우 thousand, 쉼표가 둘인 경우 million, 쉼표가 셋인 경우 billion이 되는 겁니다. 말로 읽는 단위와 숫자로 표기하는 단위가일치하는 거죠.

다시 한 번볼까요? 700,000,000은 얼마일까요? 우리말로 읽으려면맨 뒤에서부터 일, 십, 백, 천, 만…… 하면서 세어야할 겁니다. 하지만 영어로 읽으려면 쉼표 앞의 숫자 700을 seven hundred라고 읽고 나서 그 뒤에 쉼표가 둘 있으니까million을 붙이면 되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숫자를 많이 다루는 사람이 아니고서는여기에 붙은 0이 몇 개인지를 일일이 세지 않으면 이 숫자가 7억이라는걸 바로 알기는 쉽지 않죠. 하지만 영어로 읽을 때는 어린아이도 훨씬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말로는그렇게 할 수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어떻게 가능하냐고요? 우리말에서 숫자를 나눠 읽는 기본 단위는 '천'이 아니라 '만'입니다. 0이 넷 들어가는 자리죠.한 번 살펴 볼까요? 앞에서 언급했던 5억을예로 들어보죠. 우리가 지금 쓰는 표기법으로 하면 5억은 500,000,000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기본 단위 '만'을 기준으로 다시 표기해보면5,0000,0000입니다. 낯설죠? 한 눈에봐도 익숙하지 않은 표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말로 숫자를 읽는 방법의 관점에서 보면 놀라운 점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우리말에서 숫자를세는 기초 단위는 일, 십, 백, 천, 만입니다. 또한숫자를 일컫는 말이 바뀌는 단위는 '만'이고 그 뒤로는 억, 조, 경 등이 있죠. 즉 50,000은 오만이고 500,000,000은 오억인데 이걸 원래우리말의 숫자 표기법으로 바꿔보면 5,0000과 5,0000,0000이됩니다. 쉽죠. 영어로 읽은 걸 그대로 우리말로 바꾸면 오십천, 오백백만이 되는 숫자를 한국어의 숫자 표기법으로 바꾸면 0을 뒷자리부터세지 않아도 됩니다. 쉼표가 하나 있으면 '만'이 되고 쉼표가 둘 있으면 '억'이되는 거죠. 영어에서처럼 쉼표 앞의 숫자부터 차례대로 읽어서 훨씬 빠르고 간편하게 인식하고 소통할 수있습니다.

한 번 연습해볼까요? 47,000,000,000을 읽어보세요. 웬만한 사람은 아마 뒤에서부터일, 십, 백, 천, 만을 세지 않고는 읽어내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표기하면이야기는 달라지죠. 470,0000,0000은 얼마일까요? 바로사백칠십억입니다. 하나만 더 해보죠. 321,500,000은얼마일까요? 쉽지 않죠? 하지만 3,2150,0000 이렇게 하면 어떤가요? 삼억이천백오십만이라고쉽게 읽을 수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말로도 영어에서처럼쉼표 앞자리의 숫자만 읽고 그 뒤로는 쉼표가 몇 개 있느냐에 따라서 '만'이나 '억'을 붙여주면되는 겁니다. '경' 이상의 단위는 생활 속에서 흔히 쓸일이 없으니까 이 정도만 익히면 거의 아무런 불편은 못 느끼고 살 겁니다.

우리나라의 화폐단위가좀 큰 편이라서 98,000이나 620,000 같은 숫자는한 눈에 읽는 훈련이 워낙 잘 되어있긴 하지만 그것도 9,8000이나62,0000처럼 쓰면 한 눈에 구만팔천, 육십이만으로 더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교육하기에도 훨씬 더 쉽겠죠. 어떤가요? 재미있지 않나요? 이렇게 직관적으로 알아보고 읽기 쉬운 숫자 단위표기법을 놓아두고 우리는 우리말과 맞지 않는 영어식 숫자 표기법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제가 여기서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그렇기 때문에 당장 숫자 표기법을 바꾸자는 말이 아닙니다. 글로벌화된 21세기에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나 소통에 불편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으니 당장 바꾸지 않는 게 좋을 테고, 백만 이하의 비교적 자주 쓰이는 단위에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도 있으니 표기법을 바꿀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번쯤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서 숫자를 천 단위로 나누어 쉼표를 찍어 표기한 데에는 그들언어의 읽기 방법을 반영한 배경이 있다는 겁니다. 즉 숫자 표기법도 넓은 의미에서 문자 언어라고 본다면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는 서로를 잘 반영해야 하고, 그것은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습관이나 문화, 나아가서는 생각과 사상을 잘 담아야 한다는 겁니다. 숫자를 쓸 때쉼표를 어디에 찍느냐 하는 문제로 너무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끼시나요?

비단 숫자 표기법뿐만이아닙니다. 정부에서 몇 년 동안 엄청난 예산을 들여가며 공들여 마련한 도로명 주소 제도가 여전히 우리국민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뜩이나 부동산 경기가 안 좋은 마당에 낯선 주소가집값에 미치는 나쁜 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퍽 설득력이 있지만, 혹시 그 밖의 근본적인이유가 우리의 생각과 문화에 있는 건 아닐까요? 어쩌면 우리에겐 정착을 기본 성격으로 하는 농경 문화공동체의 '마을'이 이동과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유목 문화공동체의 '길'보다 문화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언어는 우리의생각을 반영하고 우리는 그 생각을 반영한 언어를 사용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생각과 사상을 만들어 냅니다. 세계가서로 활발히 교류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21세기에 지나치게 내 것 네 것을 따지는 것도 그리 현명한일은 아닐지 모릅니다. 또한 우리가 흔히 전통이라 일컫는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이웃들에게서영향 받은 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이며 우리의 어떤생각과 사상과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지, 그리고 거꾸로 그 말이 우리의 어떤 생각과 사상과 문화에 영향을미치고 있는지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각이 있고나서 그 생각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기록하기 위해, 즉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언어라고 한다면언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생각이 영향 받는 일은 최소화하는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주객이 전도됐기 때문이고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굳이 올바른 사용과 잘못된 사용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를 가져다 대지 않는다하더라도 언어가 사회적인 약속이라는 걸 생각해 볼 때 약속된 뜻과 다르게 쓰이거나 그 뜻의 혼동을 불러일으킬지 모르는 말과 글은 바로잡을 필요가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 함게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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