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돌을 앞둔 오늘,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당시 숭고한 피를 흘린 분들 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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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두(kbdblue)등록 2018.02.26 15:21
>현재 대한민국은 명목 GDP기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이다.
아래는 그 위상을 대변해 주는 베트남인 L씨와 인터뷰이다. 인터뷰 내용을 보듯 한국은 전세계에서(특히 베트남) 강한 영향력을 가지는 국가 중 하나이다.  그걸 더 부가 설명하자면 기자가 1/14-1/23까지 체류했던 베트남 붕따우의 경우 기자가 본 학생들은 한국 아이돌의 노래를 듣고 있으며 삼성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롯데마트에서 쇼핑을 한다. 심지어는 CJ CGV영화관에서 영화를 본다.
기자: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L씨: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발전한 나라,음식이 맛있어요,한국 사람 친절해요,대학교가 환상적이고 좋아요
기자: 한국 제품을 많이 쓰던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L씨:한국 제품이 좋고 다양해서요 그리고 유명해서요 또 그냥 한국이 좋아서 한국 제품을 사용해요
기자: 한국 가수를 좋아 하는 사람이 많나요?
L씨:엄청 많아요 한국 아이돌 좋아 하는 사람이 많아요.베트남 사람은 한국 아이돌 좋아 해요
기자:한국인과 베트남인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L씨:한국 사람은 많이 공부해서 지식이 많고 시간에 맞고 예의가 있어요. 한국 사람이 예절이 있어요
기자:추가로 하고 싶은 말은 ?
L씨:한국어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위상을 가진 대한민국은 그냥 어느 순간에 온 것이 아니다. 바로 피눈물을 흘렸던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3.1절을 맞아 그 숭고한 희생을 기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에 여러분과 공유해 보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와 군부 정권시기가 가지는 유사점
숭고한 희생을 치르신 분들을 소개해 드리기 전에 그분들이 싸웠던 투쟁의 대상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 싶다. 먼저 투쟁의 대상에 따라 독립투사 와 민주열사로 나뉜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경우 독립투사, 대한민국 군부 독재에 투쟁한 분들은 민주열사로 불린다. 그런데 이 두시기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이유는 일제강점기와 군부정권이라는 것 모두 근대화 과정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근대화를 해석하는 관점이 산업화와 경제력(먹고 사는 문제)만 보고 민주화를 제외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유형의 희생모두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완전한 근대화된 국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차이점은 무엇인가? 독립투사들의 목표는 일제치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주요되었다. 하지만 민주열사들은 자유와 평등을 가져오는 것이 였다.
그래서 이번 3.1절 99주년을 기념하여 총 3분의 독립운동가를 여러분께 소개드릴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숭고한 희생
우선 유관순,김좌진,홍범도,김구와 같이 유명한 독립운동가분들의 희생도 중요하지만 교과서나 아동 서적에서 나오지 않는 독립운동가 분들 특히 무명열사 분들도 우리가 관심을 갖고 그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할 책무가 존재한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국가보훈처에서 홍보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중심으로 이야기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학교등의 공공기관에 많이 붙여있는데도 잘 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그 분들은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도 출제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2018년 01월,02월,03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되신 분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2018년 3월의 독립운동가 김원벽 선생 [1894. 〜1928.]
1928년 4월 12일 조선의 각 신문에 한 남자의 부고 기사가 일제히 실렸다. 행여 살릴 수 있을까 부인이 단지(斷指)까지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중외일보󰡕는 남자의 일생을 핵심만 추려서 보도하였다.
선운동우회(鮮運同友會)의 상무이사 김원벽(35세)씨는 지난 2일 이래 사리원 자택에서 발진티푸스로 치료중이더니 9일 오후 여섯 시에 불행히 별세하였는데 씨는 기미운동 당시 47인 중 1인으로 활동을 하다가 그 후 출옥 이후에도 교육계 기타 조고계(操觚界)에 비상히 헌신적으로 분주하다가 최근 이삼년은 조선 운수업계에 몸을 바쳐 작년 이래 다사다난한 문제를 일으키는 일역일점주의에 맹렬한 반대운동의 투사로 그간 조선 운송사업에 없지 못할 한 페이지를 차지한 청년지사였는데 씨의 장의는 선운동우회 회장(會葬)으로 11일 발인하리라더라.
부고의 주인공은 35세의 김원벽이었다. 3·1운동 때 학생시위의 주역이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과 달리 만세시위를 기획하고 집행한 지도자였다. 출옥 후에는 교육계와 언론계에서 활동하고, 죽기 직전에는 조선총독부의 소운송업 통합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원벽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지 않지만 의외로 그의 생애는 안개 속이다. 공적 기록이 서로 다르고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일화도 떠돈다.

2018년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 [1880~1969]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선생은 시대의 전환기인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운영하는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했다. 1904년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에 근거하여 육군무관학교를 통제했다. 그리고 러시아를 통해서 일본의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함경도 출신 학생들을 차별했다. 무관이 되어 조국 부강을 염원했던 선생의 꿈은 일제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1905~6년경 기독교인이 되었다. 선생이 기독교에 입교한 것은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을 통해서 무너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1907년 훈춘(琿春)으로 망명한 선생은 민족종교 단체인 대한성리교(大韓聖理敎)를 만들었다. 조선총독부가 1915년에 포교규칙(布敎規則)을 공포하자, 이에 반발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다. 스스로 무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청년들을 독립전사로 양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것으로 1914년 이동휘와 함께 중국에서 설립한 동림무관학교를 들 수 있다. 독립전쟁을 통해서 독립을 달성하려는 선생의 노력은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결성으로 이어졌다. 3.1운동에 호응하여 결성된 대한신민단에서 단장으로 활동했으며, 여기서 보여준 그의 헌신은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1925년 2월 중국 전역에서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목격한 선생은 한중연대를 통해 일본제국을 타도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1924년 윤자영과 함께 상해에서 조직한 상해청년동맹(上海靑年同盟)을 통해서 중국 학생계와 연대를 구축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피습을 당하여 부상을 입게 되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활동 전개에 한계를 절감한 선생은 연해주로 갔다. 1933년 빨찌산위원회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지만,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의 탄압대상이 되었다. 모스크바로 피신한 후 더 이상의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가 없었다. 선생은 러시아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귀국을 하지 못한 채 1969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김규면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선생 [1883~1979]
피치 일가는 1900년대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정부수립 및 6.25전쟁을 거치는 긴 시간을 함께 했다.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외국인들 중에서 피치 일가는 2대에 걸쳐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점에서 수많은 외국인 지원자들 중에서 하나의 독특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피치 일가는 가족이 전부 기독교 선교사로 중국에서 활동하며 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 서구적 교육, 구호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며 제국주의의 폭압적인 성격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타도에 앞장섰다. 또한 피치 일가는 일제강점기의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과 타이완(臺灣)에서 활동했다. 해방 직후인 1947년 한국 YMCA 총간사로 한국에 온 애쉬모어와 제랄딘은 한국의 YMCA 조직과 함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제랄딘은 1947년 중앙여자전문학교를 중앙대학교로 개편하는 과정에 도움을 주며 명예학위를 받기도 했다. 피치 일가의 활동에서 보이듯이 대한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성향이 다분한 한국인들만의 투쟁은 아니었다. 대한독립운동에는 피치 일가를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이유는 한국독립운동이 지니는 가치 때문이었다. 대한독립운동은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힘을 모아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세계인의 보편적 가치인 인류애와 자유라는 기치를 되찾고자 한 자유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관련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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