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크러쉬한 그녀들를 완성시켜 주는 건 백마탄 왕자님들 ? - <황금빛 내 인생>, <미스티>,

검토 완료

이정희(ama2010)등록 2018.03.14 17:52
"여자는 국장되지 말라는 법 있어?"

JTBC 드라마 <미스티> 고혜란(김남주 분)의 이 대사는 최근 드라마 속에서 변화하는 여성상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말이다. 오랫동안 맡았던 앵커 자리를 "나이 들었으니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는 동료의 말에 고혜란은 당당하게 말한다. "그만둬도 내가 그만두고 싶을 때 그만 둬!" 이 말은 '뉴스의 꽃'으로 존재했던 여성 앵커의 지위에 대한 당당한 반격이다.

드라마 초반부에서 이재영(고준 분)을 사이에 두고, 앵커 자리를 다퉜던 고혜란과 한지원(진기주 분)는 이제 '유리 천장'을 함께 뚫기 위해 연대에 나섰다. "여자 주제에" 장기 앵커로 집권했던 고혜란을 마뜩찮게 여기는 보도국 남성들을 제치고, 진기주는 기꺼이 고혜란을 위해 나선다. 그녀의 성공이 곧 후배 진기주가 가는 길을 닦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허튼 속설'에 <미스티>는 반격을 가한다. 그녀들은 힘을 합쳐 남성들의 사회가 그녀들을 향해 파놓은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이렇게 드라마 속 여성이,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이 변한다. KBS 2TV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의 긴 여정은 '88만원 세대'였던 서지안(신혜선 분)이 자아를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남들처럼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정규직에 목을 매던 서지안은 엄마 양미정(김혜옥)의 딸 바꿔치기로 재벌가를 경험한 이후 삶의 궤도를 수정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상처 받은 그녀는 옛친구 선우혁(이태환 분)의 목공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진정 자신이 원하던 것을 찾는다.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기 위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포기했던 미대 진학의 꿈을 '목공'을 통해 풀어나가고 자신의 힘으로 '핀란드 연수'까지 실행시킨다. 그 과정에서 재벌 집안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겠다. 내 꿈에 만족하며 살겠다"고 결심한 서지안에게는 사랑마저 자신을 흔들어 놓는 '방해 요소'일 뿐이었다. 50회 방송분에서 서지안은 그토록 원했고 돌아가신 아버지 서태수(천호진 분)도 바랐던 '핀란드 연수'의 꿈을 최도경(박시후 분)이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잠시 뒤로 미루자"고 종용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사랑을 이기적이라 질타하며 말이다.

이렇게 사랑보다 기꺼이 자신의 일을 택하는 여성의 스토리를 주요 서사로 삼는 최근 드라마의 경향은 우리 사회 여성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토록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여성들인데, 정작 드라마의 진행 과정에서 그녀들은 현대판 '백마 탄 왕자'들에게 여전히 둘러싸여 있다. 물론 현대로 온 왕자들은 그녀들에게 '신데렐라 구두'를 신기고 왕궁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외려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왕궁(<황금빛 내 인생> 최도경의 해성그룹 집안, <미스티> 강태욱의 명망 있는 법조가문)을 걷어찬다.

'호구'라고 쓰고 '순정'이라고 읽는다?

<황금빛 내 인생>에서 동생으로 돌아온 서지안의 적응을 위해 애를 쓰던 최도경은 그녀가 친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후 '분노'도 잠시 해성가의 거짓 딸로 애쓰는 서지안을 돕던 중 사랑에 빠지고 만다. 최도경의 서지안에 대한 사랑은 '해성가'의 부속품으로 어릴 때부터 '정비'되어온 인간 최도경을 처음으로 알아봐 주었다는 그 '눈밝음'으로 부터 비롯된다.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라는 그 흔한 연애 드라마의 공식은 재벌가의 최도경을 변화시킨다.

<황금빛 내 인생>이 여주인공 서지안의 입장에서는 '자아 실현기' 였다면, 남자 주인공인 최도경에게는 한결같은 '서지안 바라기'의 여정이었다. 서지안이 최도경이 없이도 '목공은 나의 인생'으로 홀로 서려 애쓴 반면, 최도경은 재벌이었을 때나, 재벌가를 나와 갖은 알바로 고생을 할때나, 심지어 심장 발작을 일으킨 할아버지 때문에 다시 재벌가로 돌아갔을 때도 서지안 때문이었다. 동생일 때는 재벌가가 낯선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 동생이 아니면 그 사실로 인해 고통받는 동생이 안쓰러워, 그리조 밀어내건, 함께 하건 그는 늘 서지안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인정받고, 그런 서지안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려 했다.

그렇다고 그런 최도경의 '일편단심'에 보상이 따른 건 아니다. 여주인공은 늘 그를 밀어냈고, 심지어 그를 자신의 앞에서, '치워달라'고 외면했고, 그의 선의를 곡해해 '닦아세우기'가 여러 번, 그래도 그는 서지안 앞에서는 늘 약자가 되어, 그녀를 위해 달려갔고, 품을 내어주었다. 심지어, 그와 헤어져 핀란드로 떠난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지금까지의 사랑이 '이기적이었다' 다시 반성하며, 평생을 기다릴 수 있다며, 핀란드로 달려간다.

하지만 <황금빛 내 인생>에서 최도경이 줄곧 서지안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면, 정작 서지안에게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건 아버지다. 서지안은 딸이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그녀와 단 둘이 데이트를 할 만큼, 아버지를 제일 닮은 편애의 대상이다. 이 드라마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큰 아들은 물론 작은 아들도 아닌, 큰 딸 서지안에게 계승된다. 경제적으로 보험금도 제일 많이 나누어줬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줄곧 큰 딸 서지안을, 딸 서지안은 아버지를 가장 최우선으로 고려한다. '어머니'는 낳아준 사람이지만, 서지안에게 부모란 곧 아버지인 듯, 아버지가 수모를 받을 때마다 그녀는 이성을 잃고, 흔들리며, 사랑조차 거부해 버린다.

사랑하는 여자의 범죄조차 믿고 품어주는 넉넉한 강태욱

제 아무리 한대 칠 기세로 닦아세워도 그래도 서지안과 최도경의 사이를 가로 막는 건, 사회적 위치가 달라도 두 집안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법'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갸륵한 사랑이 있다. 바로 고혜란의 남편 강태욱(지진희 분)이다.

아버지가 대법관인 법조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나 대를 이어 검사로 활약했던 강태욱, 기자였던 아내를 사랑하여,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녀를 기꺼이 품었던 그는 앵커 자리를 꿰어차기 위해 아이를 지운 아내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케빈 리의 살해범으로 지목된 아내를 보며 '널 포기할 자신이 없다'며 기꺼이 그녀의 편에 선다. 케빈 리 아내가 시시때때로 고혜란과의 사이를 벌려놓기 위해 갖은 '정보'를 흘려도 강태욱은 고뇌할 지언정 흔들리지 않는다. '법'의 편에 서야 할 그가 케빈 리와 아내의 블랙 박스 정보를 지우고, 유일하게 그녀의 편에 선 '변호사'라는 백마를 타고 법정에 나선다.

하지만 고혜란에게 왕자님은 강태욱 한 사람만이 아니다. 세상의 남자들이 그녀가 자기 밥그릇을 빼았는다고 질시할 때, 아니 그 이전 세상 남자들의 밥그릇을 걷어 찰 수 있기 그 전에, 그녀가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무모한 도박을 벌였을 때, 그 위기에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가며 그녀를 세상으로 나서게 해주었던 하명우(임태경 분)도 있다. 이제 강태욱이 세상 앞에 나선 고혜란의 옆에 서있다면, 하명우는 그녀의 그늘이 되어 여전히 그녀를 지킨다. 이 두 '백마 탄 왕자'와 '흑기사'야 말로 고혜란을 완성시켜주는 존재들이다.

'환타지'가 남긴 성평등의 과제

'사랑한다면서 널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가둬놓고, 내가 정해놓은 정답만 너한테 강요하면서 널 힘들게 했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랑 때문에 내 자신이 견딜 수 없게 초라해 질 때가 있습니다. 난 그게 사랑때문이라고 그래서 괴로운 거다 라고 생각했다......내가 괴로운 건 사랑 때문이 아니었구나. 남자의 못난 자존심 때문이었구나.'

강태욱의 이 대사들이야 말로, <황금빛 내 인생>의 최도경과, <미스티> 강태욱, 그리고 그와 비슷한 드라마 속 2018년 버전 백마 탄 왕자들에 대한 정의이다. 동화 속 왕자들이 재투성이 아가씨를 구해 자신의 왕궁으로 데려 가는 대신, 2018년의 왕자들은 기꺼이 그녀들이 사는 재투성이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원하는 '신발'을 그녀가 얻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도대체 왜? 라고 반문한다면, 그들은 그게 그들이 원하는 사랑이라 답한다. 기꺼이 그녀의 범죄조차 믿어줄 수 있는, 만리타국에서의 그녀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놓고 그녀에게 가는 걸, 그 '이타성'을 그들은 사랑이라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마치 산업사회의 사랑이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남자'를 응원하는 여성의 사랑을 갸륵하게 여겼다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황금빛 내 인생>과 <미스티> 속 남자들의 멋진 사랑은 바로 그런 '전근대적 사랑'의 '현대적 '미러링'인 것이다. '미러링'은 말 그대로 마주보기이다. 과거에 남자들을 향한 여성의 사랑이 그러했듯, 이제 그 남녀의 위치가 역전된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드라마 속 남성들은 그저 '사랑의 역학 관계'에서의 미러링만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고전적 왕자의 역할을 고스란히 떠맡는 '이중 부하'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미스티> 속 고혜란에게 강태욱이 그리고 과거의 하명우가 없다면 어땠을까? 해성가에 들어가면서 부터, 가짜 딸의 위기를 겪어내던 서지안에게 최도경이, 그리고 친구 혁이, 그리고 아버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심지어 극이 절정에 이를 수록, 진취적 여성보다 그런 그녀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남성들의 희생적 사랑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역설적으로 이런 '환타지적 설정'은 우리 사회의 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여전히 그저 전도된 '역학 관계'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혹은 심지어 남녀의 평등한 사랑에 대한 '담론'에 있어 지체 되어 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남자들에 의해 보호받고, 지원받음으로 그녀의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삶'이 완성되는 여성들, 어떤 의미에서 그녀들은 또 다른 종류의 '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여성이, 그리고 남성이 함께 동등하게 사랑하고 살아가는 삶은 과제로 남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