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주항 석지장

금반마을 돌부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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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안나(arabianna)등록 2018.03.23 09:49
금반마을 돌부처

삼례역과 대명 아파트 사이에는 금반마을 있다. 이 마을에는 주민들이 돌부처라고 부르는 사람모양의 불상이 있다. 돌부처라 부르기는 하지만 불상의 형태보다는 둥근 머리모양과 길쭉한 몸의 윤곽만 있는 사람모양이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개구쟁이들의 놀이터였기에 거기서 놀았던 추억은 하나씩 다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어른들 몰래 불장난을 하다 시꺼멓게 그을음까지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금반마을에는 이 돌부처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에는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수로가 지나고 있는데 돌부처의 이야기는 모두 이 수로와 관련되어 있다. 옛날 수로를 만들기 위해 땅을 파는데 돌부처가 나왔다. 그런데 수로의 제방을 쌓으려고 흙을 쌓으면 자꾸만 흙이 무너져 내려 공사에 진척이 없었다. 공사는 난관에 봉착하여 마을주민들은 난감하기만 했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지금 돌부처가 있는 곳에 돌부처를 모시면 제방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지금 위치에 돌부처를 모셨고 이후로는 흙이 무너지지 않아 제방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다른 이야기는 이 수로에 많은 사람이 빠져 죽어 인명피해가 많아지자 마을은 큰 근심에 싸여 있었다. 이 때 마을 지나던 스님이 돌부처를 세우고 그를 모시면 괜찮을 것이라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돌부처를 세우게 되었다고 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수로가 복개되기 전 도랑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서 수리하기 위해 일본 사람들이 도랑을 파다가 돌부처 모양의 돌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일본사람들은 돌부처에 울타리를 치고 보호 하였는데 그 후로는 도랑이 무너지지 않았다고 한다.

금반마을이라는 이름도 역시 돌부처와 관계가 있다. 돌부처를 모시라는 스님의 말에 마을사람들은 돌부처를 모시기 위해 땅을 팠는데 땅 속에서 금반지가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이름이 금반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일련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금반마을의 돌부처는 제방을 축조하는 과정에 발견되었고 돌부처를 현재의 위치에 안치하면서 각종 사고들이 해결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독주항 석지장

이렇게 전설로만 전해지던 돌부처에 관한 기록을 찾게 되었다. '만경강의 숨은 이야기'의 저자 이종진 선생은 1930년에 발간된 후지간타로의 불이농촌 홍보책자인 '불이농촌'에서 이 돌부처와 관련된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기록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독주정굴할(의)석지장(돌 지장보살)
전익수리조합의 도수거(도랑)는 옛날 비비정의 산기슭을 둘러 조성된 것이나 만경강의 물이 산기슭에 밀려와 수로를 파괴하였으므로 별도로 수로를 필요로 하여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 삼례의 부자 백대석이라는 자가 이 대굴할공사를 할 때에 대단한 어려움을 겪어 꿈속의 암시에 의해 송아지가 달리는 방면으로 굴할을 하여 간신히 완성할 수 있었기에 이 산에 독주정의 이름이 생겼고 당시 파낸 돌을 제사지낸 것이 이 석지장으로 본조합공사의 전에 소재불명이었으나 수로 확장공사 시에 파서 나온 것으로 장래 집을 지어 보호하고 제사를 지내고자 한다.(김영식 작가 번역)

1770년 대 삼례의 부자 백대석이라는 사람이 수로를 만들려고 하는데 바위 때문에 수로 공사에 진척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아침 일찍 수로 공사현장에 나가면 어린 송아지가 있을 것인데 송아지가 지나는 길을 따라 수로 공사를 하면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계시대로 송아지가 지난 길로 수로가 완성되어 그 수로의 이름을 독주항(犢走項)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독주항 수로를 만들 때에 발견된 돌지장을 어느 때인지 잃어버렸으나 수로를 확장 하면서 다시 찾았고 석지장을 위해 집을 짓고 제사를 지내려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독주항 수로에 대한 기록은 광해군 때부터 발견되고 있다. 조선시대 호남에는 3개의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익산의 황등제, 김제의 벽골제, 정읍의 눌제이다. 전라도를 호남지방(湖南地方)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전라도가 황등호수(제) 이남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이 황등제는 늘 물이 부족하여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는데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만경강의 물길을 끌어오는 도수로이다.

광해군 일기 6년(1614년) 3월 16일 기록에 의하면

훈련도감이 아뢰기를,
"전주(全州)의 옥야(沃野)가 40여 리인데 5일 안에 그 쌓인 찌꺼기를 파내어 수로를 개통시키는 역사를 마쳤으니, 그 공이 더욱 큽니다. 도감 낭청 심곤(沈閫)과 차사원 익산 군수 윤조원(尹調元)을 강인(姜絪)의 예에 따라 논상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상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심곤과 윤조원 등은 가자하고 중군 최영길(崔永吉)은 올려서 실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광해군 이전에 이미 삼례 아래쪽부터 황등제에 이르는 40리의 도수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후 현종, 숙종, 경종, 영조 대에도 꾸준히 40리 도수로 정비에 관한 기록들이 나오고 있다. 이 삼례 아래쪽에서 황등제에 이르는 도수로가 독주항 수로이다. 그러므로 '불이농춘'에서 밝히고 있는 백대석의 이야기도 새로운 수로를 놓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무너져 내린 도수로를 정비할 때의 이야기로 보인다.

결국 금반마을의 돌부처가 발견된 때는 1770년대이지만 한 때 잃었다가 1930년경에 다시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독주항 석지장이 방치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잡초가 무성하고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곳에 안내판도 설치하고 지속적인 관리를 해야 할 것이다.

관리의 손길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소외된 문화재'를 찾아, 생활 속에서 지속적으로 가꾸고 즐김으로써 문화재를 보다 가깝고 친근한 존재로 함께 하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한문화재 한지킴이를 제안한다.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단체에서 독주항 석지장의 지킴이가 되어서 꾸준히 관리하는 역할을 맡아주길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완주군 문화재단에서 나온 완주군 마을문화실태조사 보고서인 "기록과 기억의 문화사"를 참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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