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닝'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2) 스포있음

영화 '버닝"을 통해 바라보는 땅에서의 자유

검토 완료

전경호(khjabi)등록 2018.05.20 18:07
무라카미의 원작을 영화한 한국영화 '버닝'의 일본 원작 단편의 원제는 納屋を焼く "納屋" '나야'는 들일'납'자와 집'옥'자를 사용한다. '무엇을 들여 놓는 곳'이라는 뜻이다.

보통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농기구나 혹은 철이 지난 곡물 여타 자질구래한 농촌 살림을 들여 놓은 농촌의 빈 공간에 허술하게 지은 집을 말한다.

영어로는 Barn 한글 표기로는 그 음이 '벤'이다. 뭐 혹은 '반'이라고도 읽지만 들리기는 '벤'으로 더 잘 들린다. 그런데 이 'Barn'이란 단어가 '태운다'는 영어 단어와 한자 '燔' 그리고 한글 '번'과 같이 읽히는 건 우연일까?

다시 억지를 부리면 '나' 를 '태운다'는 뜻으로 의미가 함축된다. 일본어 '納屋 나야'와 '태운다'는 'Barn '헛간, 그리고 한국어가 의미하는 '헛간' 같은  헛 소리의 '헛' 을 태워 버리는 것으로 의미 부여를 하자면 원작 소설 '헛간을 태우고'를 읽고나서 느끼는'허무함' 이란 마치 이영화가 그리는 허무함과 교차되는 건 억지일까?

성경에서 '카인'은 '얻었다'는 뜻이고 '아벨'은 '허무하다'는 뜻이다.

카인과 아벨의 성서에서 말하는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바로 '허무'를 죽인 '대장장이'란 뜻의 카인은 과연 무엇을 얻었기에 '가인'이라고 했을까?
대장장이는 창조자를 메타포 한다.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창조자. 이는 어쩌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재화인 땅을 매매하고 가지는 권력을 의미 할수도 있다. 그 대장장이 아벨이 카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카인은 자유를 얻는다. 구속된 자유를, 해석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아담과 이브가 얻은 첫째 아들이라 그 이름을 '가인'이라 지었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부모의 인칭에서 바라본 '가인'이고 '가인'이 스스로 얻은 것을 기준으로 보면 카인은 자유를 얻은 것으로 해석해 볼수도 있다.

창조주에 의해 버림을 받았지만 스스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그 자유가 어떤 자유이든지 땅에서의 방황을 허락받은 자유일지라도 인간의 자유 의지로서 창조주에게 허락 받은 최초의 땅에서의 자유다.

영화에서 종수는 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 해미를 대신해서 고양이에게 밥을 준다. 그러나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고양이는 없었다고 주인집 아주머니는 말한다. 정말 없었던 것일까?
고양이가 없었다는 것을 잊어 버리기 까지는...

종수의 아버지는 자존심이 전교1등이었다고 한다. 변호사는 종수에게 아바지의 과거를 이야기 하면서 도시에 부동산을 사라고 했지만 끝까지 고향 땅을 지키다가 결국 불행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종수에게 탄원서를 권한다. 벤은 땅을 상속받은 강남의 젊은 부자다. 그래서 그는 무료하고 땅을 소유해서 그냥 논다.

해미는 밀감을 먹는 판토마임을 하면서 손에 귤이 없다는 생각을 하지말고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라고 한다. 고양이가 없는것을 잊어 버리면 고양이는 보인다. 마치 인간이 살아 있음으로 죽음을 동반하고 있듯이 죽음이라는 종착역에서 삶이 더러나는 것과 같이.

해미는 아프리카를 다녀오면서 벤을 만난다.
벤은 그냥논다. 그러다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무료해지면 그의 이름처럼 하우스를 태운다. 그러나 종수는 벤이 태운 하우스를 찾지 못한다. 하우스가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리고 종수는 해미가 사라진 후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반갑게 달려가지만 실망을 하고 나오려다 어머니에게 해미의 집에 우물이 있었는지를 물어본다.우물은 생명의 탄생의 의미하는 메타포다.

해미의 가족이 없다고 한 우물을 엄마는 있었다고 한다. 그 어머니의 옷을 아버지의 힘에 의해 종수는 태워 버렸었다.

해미가 바라본 석양 투어에서 혼자인 해미는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어했다. 해미가 찾아간 아프리카에서 해미는 배고픈 두 인간을 만났다고 한다. 실제 그들을 만나고 싶어 아프리카를 찾았다.
하나는 배가 고픈 인간 그리고 하나는 정말 배가 고픈 인간, 배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면서 또한 만족을 뜻한다. 배가 만족하면 인간은 나를 찾는 욕망을 보인다.

그리고 종수의 집을 찾은 해미는 셋이서 대마를 돌여가며 피우고 아프리카의 배가정말 고픈 원주민들처럼 석양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자신의 옷을 벗고 새처럼 춤을추며 사라질 것을 암시한다.

이는 고귀한 욕망이다. 해미는 바로 그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갈구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빌어 떠난 아프리카 그곳에서 그녀는 벤을 만났고. 벤은 그냥 논다. 벤 그는 그런 해미의 모습을 바라보며 무료함을 달래고 요리를 한다. 무엇을 위해?

요리는 마치 신을 위해 인간이 정성을 다하고 그 정성을 신들에게 받치면 신이 먹어 치워 버리는 것 처럼 그는 그렇게 노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요리를 좋아한다고 한다. 어쩌면 벤은 해미를 요리하고 자신의 신에게 바치고 그가 그의 무료함을 위해 해미를 껍질들을 모우고 소유하며 번제해서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 먹어 치워 버렸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종수는 사라진 해미가 벤에 의해 재물이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벤을 칼로 찌르고 피를 흘리는 벤을 그의 자동차 포르쉐에 집어넣고 자신의 옷을 마치 번제에 올리는 제물의 껍질을 벗기듯 자신의 허물을 속옷까지 벗어 벤의 차에 담고 불을 붙여 태운다.
그리고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의 전편에 흐르는 허무감은 영화가 끝난후에 자리를 한동안 비울 수 없게 했다.

땅은 인간이 만들어 낼수 없는 재화다.
자유시장 경제라는 자본주의 경제는 자유라는 이름하에 인간의 자유를 땅으로 옭아매고 있다.

그것도 젊은 청춘들을 비닐 하우스라는 땅 안에 가두고 그 땅 조차도 빌려쓰게 하면서 언젠가 자신을 쓰주기를 바라며 하늘이 가려진 투명한 하우스 안에서 시간을 기다리게 한다. 그마저 기회가 없다. 그 비닐하우스 안을 지키는 벤과 같은 이 땅의 신들은 자신들이 땅을 차지하고 하우스 헛간에 버려놓고 필요하면 자신들의 제물로 태우고 무료해지면 제사장이 권력을 행하듯 배가 고픈 인간들의 배를 가르고 껍질을 벗겨 하늘에 정성으로 고기 향기를 전한다.

그래서 태운다.땅을 소유하고 땅에서 얻어지는 모든 수확을 땅에 존재하는 생명이 함께 배당받기위해 땅을 두르고 있는 비닐하우스 헛간을 의미없이 덩거르니 "born in the barn" 본떼 없이 자란 서양의 자본주의를 태운다.

이창동 감독님 이제 진실을 이야기해봐!

젊은이여 자유를 찾아라. 태워라.
땅에 묶인 자유를!
토지 해방을 위해!
나를 가두고 있는 집를 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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