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2)

영화 '버닝"을 통해 바라보는 땅에서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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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호(khjabi)등록 2018.05.24 13:21
영화 버닝은 원작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고"를 영화하면서 그 내용을 대사와 함께 최대한 인용해 왔다.무라카미 하루키는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격렬하게 한 전공투 출신 작가다.  

일본어 원제는 "納屋を焼く" "나야오 야쿠 " 원작 단편에서 이창동 감독은 원작제목 헛간을 한국에서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으로 교체를 하면서 비닐하우스의 투명함 속에 버려진 텅빈 공허함을 이야기하고 제목이 주는 의미에 상당한 고민을 한 듯한 말을 제작보고회에서 했다. 그 의미의 해석은 다양한 관객에게 맡긴다고 하면서. 

제목의 '버닝'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제목에서 따오기도 했다고 한다. "Barn burning' 남자 주인공의 이름 또한 벤이다.

벤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아이러니 하게도 종수에 의해 마지막에 불 태워지는 燔(번)제물이 된다.
燔(번)제물은 하늘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고대의 제사 형태에 제물로 올려지는 고기를 뜻한다.성경에서는 카인과 아벨의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종수는 글을 쓰려고 준비하는 작가 준비생. 그의 아버지는 자존심이 쎈 시골 농사꾼으로서 북한의 확성기 소리를 평생 들으면서 살아온 고지식 하고 고집이 쎈, 파주의 시골 농군이다. 분노조절 장애로 마을에서도 그렇게 친절하고 상냥한 이웃이 못되었지만 종수가 쓴 탄원서에 마을 사람은 싸인을 해준다. 그러나 결국 아바지가 실형을 받던 그날 종수는 아버지가 키우던 헛간의 암소를 시장에 팔아 버린다.

벤은 평생동안 한번도 울어 본적이 없는, 질투심도 한번 느껴본 적이 없는 그러나 차가울 것 같은 그런 그 이지만 매너와 재력은 우리 주변에서 보기 어려운 특별한 청년이다.

그는 정기적으로 날짜를 정해두고 비닐하우스를 태운다. 그 비닐하우스가 문학적 메타포인지 아니면 실제 비닐 하우스인지에 대하여 이창동 감독은 관객에게 상상력을 맡긴다고 했다. 벤은 지나칠 정도로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청년이다. 그의 가족은 용산참사 그림이 걸려있는 전시관 옆 고급 식당에서 여유롭게 음식을 즐긴다.
벤은 버려진 낡은 비닐하우스를 태우면서 베이스를 느낀다. 그리고 요리를 좋아한다. 인간들이 정성을 들여 요리를 하고 그 정성을 먹어 버릴때의 감정이 신이 느낄것 같은 기분은 아닐까 해서 그 기분을 위해 요리를 하고, 요리를 해서 파티를 하고 먹고 즐긴다..

해미는 카드빚에 시달리면서도 아프리카 여행을 위해 돈을 모은다.
아프리카에서 그레이트헝거와 리틀헝거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며 벤을 만나고 벤과 함게 돌아온다.

해미는 어린시절 종수가 구해준 우물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해미의 가족은 우물이 없었다고 하고 종수의 엄마는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종수의 엄마와 해미가 사는 세상은 다르지만 일맥 통하는 바가 있다.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사람들과 우물이 없다고 하는 사람과의 차이에서 오는 현실의 교차점을 상징하는 메타포다.

버려진 비닐하우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이시대 버려진 청춘들이 태워 버려야할  희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투명한 비닐하우스의 땅에 갇힌 젊은 청춘들의 자유.

투명한 하우스를 바라보는 종수와 버려진 하우스를 태우는 벤,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어하는 해미는 가족들 조차 카드빚을 모두 갚기 전에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버려진 해미.

세 주인공 모두 어쩌면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다른 형태로 살아가는 이땅의 리틀 헝거인지도 모른다. 배는 욕망을 나타내지만 우리의 배는 만족을 안다. 적어도 소화가 다 될때 까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은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위해 문화적인 삶이라고 만족해하며 인생의 의미를 부여한다.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배가 차면 정신적인 욕망을 찾아가는 그레이트헝거 그러나 그레이트헝거가 되기에는 비닐하우스에 갖힌 그들의 꿈은 공허하다.
해미가 맡기고 간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해미의 월세 단칸방 침대에서 해미와의 첫 관계를 떠올리며 자위를 하고 이후 몰려오는 공허함. 어쩌면 우리 인간의 꿈은 그렇게 공허한지도 모른다.

헛간을 태우고 제물을 태우고 하늘에 기도하며 신에게 감사하지만 인간들의 살인은 계속된다.
땅을 소유한 인간들에게 결코 평화로운 자유는 쉬운 일이 아니다.인간은 태어나면서 죄를 짓고 태어난다는 어느 종교의 원죄설을 나는 부정한다. 그러나 빚을 짓고 태어난다는 말은 현실이다.
그 빚은 어쩌면 우리들의 자유를, 우리시대 젊은 청년들의 그레이트 헝거가 되기위한 해미와 종수의 자유를 옥죄는 사회의 한 단면인지도 모른다. 그 빚은 모든 인류의 자유를 통제하며 허덕이게 한다. 카드빚에 시달리는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를 갈망하다가 석양이 지는 저녁노을과 함께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현실에서 만난 그레이트헝거 벤의 환영에 의해...

종수는 물류센터 일용직을 위해 면접을 보다가 자신의 순서가 오자 그냥 그 자리를 물러난다.
이 장면에서 종수는 스스로 자유를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에 구속되기 보다 스스로의 자유를 선택한 종수. 그리고 스스로 자유를 선택한 종수는 벤을 만나 해미를 죽인것으로 확신을 한 종수는 벤을 살인하고 그의 자동차에 자신이 입고있던 옷가지를 燔(번)잿물 가축의 가죽을 벗기듯 벗어 던지며 벤과 함께 불로 태워 버린다.

그레이트 헝거로서의 삶을 사는듯한 '벤'은 어쩌면 진짜 리틀 헝거였는지 모른다.
그의 무료한 욕망은 진짜 살인을 감행하는 싸이코 패스로서 살인을 멈추지못하고 주기적으로 감행하는 욕망에 굶주린 리틀헝거.

인간은 투명한 비닐하우스 안과 같은 현실에 갇힌 부자유한 삶을 사는 구속된 자유안에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자유가 갇혀버린 빚과 같은 땅, 그 투명한 하우스 땅의 구속으로 부터의  해방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영화 버닝을 보고 이창동감독이 말하는 분노의 메세지를 그렇게 읽었다..

원작을 읽었을때 허무하고 짧았던 단편, 그런 무라카미의 소설을 이토록 많은 의미를 던져내는 이창동 감독의 힘은 전혀 다른 색깔의 창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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