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우리 고장의 '동학기념사업회'가 창립될 때부터 주역으로 활동했다. 오랜 기간 부회장직을 수행했고, 지금은 고문으로 계속 참여하고 있다. 20년이 넘는 세월이다.
그동안 우리 고장의 동학과 관련하여 많은 글을 써왔다. 대부분이 칼럼 형태의 토막글이지만, 300매가 넘는 희곡도 있고, 100매가 넘는 수상문도 있다.
1998년 가을 <태안문학> 창간호를 만들 때는 '우리 고장에서의 동학혁명의 모습'이라는 이름으로 큰 특집을 꾸미기도 했다. 그 특집을 알차고 진실하게 꾸미기 위해 하루는 1984년 동학농민혁명군 북접(北接) 최초 기포지인 원북면 방갈리(현 태안화력본부)에서부터 태안읍 남문리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 '갑오동학농민군추모탑'까지 60여 리를 걷기도 했다.
▲ 기포지 기념비 주 서부발전의 태안화력본부 안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북접 기포지임을 증거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15년 5월 22일 제막식을 가졌다. ⓒ 지요하
1894년 가을 동학농민혁명군이 태안군 관아를 향해 진격했던 그 길을 내 두 다리로 따라 걸으며 동학과 관련하는 많은 생각들을 했다. 그 역사적인 길 위에서 건져 올린 갖가지 생각들을 차근차근 정리하여 '도보 수상 – 동학농민혁명군이 걸었던 60리 길을 걷다'라는 글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 정도로 나는 우리 고장의 동학 기념사업에 열정적이었고, 우리 고장이 동학의 얼이 어려 있는 고장이라는 사실에서 남다른 자부심을 가져왔다. 그것은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동학 선열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 최소한의 책무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 글을 쓴 때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갑오동학혁명군이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는 기분으로 오늘을 살고 있다. 동학명군이 온몸으로 외쳤던 절규와 함성, 그 지고한 가치 지향들은 오늘에도 현재진행형임을 절감하곤 한다.
태안지역 동학유적지 탐방
▲ 홍주의사총 지난 6월 30일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홍성에 있는 홍주의사총을 참배했다. ⓒ 지요하
지난 6월 30일 우리 고장에서는 뜻 깊은 행사가 있었다. 우리 고장 곳곳에 산재되어 있는 동학혁명의 유적지들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이 행사에는 내포동학농민혁명유족회 문영식 회장, 태안군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정동협 전 회장(현 고문), 최기중 현 회장, 태안향토사연구회 정우영 회장을 비롯하여 동학에 관심 있는 많은 이들이 참여했다. 대형버스 한 대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나는 이 행사에 기꺼이 참여하면서 처음에는 기쁜 마음이었다, 우리 고장 곳곳의 동학혁명 유적지들을 모두 둘러본다는 사실이 즐겁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갖게 했다. 그러나 곧 부끄러운 마음을 갖기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오랜 기간 고장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에 참여해오면서도 고장 곳곳의 유적지들을 아직 한 번도 제대로 둘러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안하고 참담하게 느껴졌다. 그런 마음은 두어 곳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표지나 표석도 없는 유적지들을 둘러보면서 더욱 심화됐다.
우리는 맨 먼저 근흥면 수룡리 토성산을 찾았다. 일본군이 동학군 상당수를 작두로 목을 자른 장소였다. 그 작두는 1976년에 발견되어 현재 천안독립기념관'에 안치되어 있는데, 내년에 백화산 기슭의 태안군동학농민혁명관이 건립되면 옮겨 올 예정이다. 토성산 유적지는 간단한 표지조차 없는 형태였다.
다음에 찾은 곳은 원북면 방갈리 북접 기포지였다. 1994년 당시 동학 북접 접주였던 문장로 선생이 기거하며 동학을 전파했던 집, 여러 동지들과 함께 기포(起泡)를 계획하고 결의했던 집이 있었던 장소였다. 그 집터는 현재 태안화력본부 안에 있어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러나 다행히 2015년 5월 서부발전주식회사에서 그 터에 '기포기념비'를 세워주어 가장 덩두렷한 유적지로 남게 됐다. 다시 한 번 서부발전과 태안화력본부에 고마운 마음을 표한다.
취임 전에 백화산 동학추모탑 참배부터 한 가세로 군수
▲ 신임 태안군수의 백화산 동학명명군 추모탑 참배 가세로 제14대 태안군수는 지난 2일 군정을 시작하기 전 태안읍 백화산 교장바위 아래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을 참배했다. ⓒ 지요하
세 번째로 찾은 곳은 이원면 사창3리 '목네미샘(목 넷이 떨어진 샘)이었고, 그 다음은 이원면 관리 '통개(桶漑)였는데, 지면 관계상 자세한 소개는 생략한다. 목네미샘과 통개 역시 아무런 표지도 없었다.
다음으로 예정된 곳은 태안읍 남문리 백화산의 '교장바위'와 추모탑이었는데, 해마다 추모제 등의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 탐방을 생략했다. 그리고 찾은 곳은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내포 최후의 격전지였던 홍주성과 '홍주의사총이었다.
홍성읍 대교리에 있는 홍주의사총은 국가사적 제431호이며 원래 이름은 '구백의총(九百義塚)이었다가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바뀌었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홍성에서는 의병 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등 신무기에 의해 의병 수백 명이 전사했다. 1949년 유골 발굴이 이루어져서 유골들을 모아 분묘를 조성했고 매년 5월 30일 추모제를 지내게 됐다.
그런데 그 의병들 중에는 태안 출신도 있고, 대부분이 동학과 관련 있는 분들로 추정되므로 탐방유적지에 포함됐다는 게 태안향토사연구회 정우영 회장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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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일 오전 가세로 제14대 태안군수는 백화산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을 참배하는 것으로 군정을 시작했다. 태안군수가 첫 출근 전에 백화산 동학추모탑부터 찾은 것은 가세로 군수가 처음인데, 비장함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가세로 신임 군수는 백화산 동학추모탑 참배를 마치고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오래 전부터 군수가 되면 우리 고장 동학혁명 선양 사업을 제대로 실현시키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그런 다짐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오늘 군정을 시작하기 전에 백화산 추모탑 참배부터 하게 됐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이의 뇌리에 가장 오래 남을 고맙고도 인상 깊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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