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 국문과 강의실. 교수가 칠판에 술잔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렸다. 교수는 이게 뭐로 보이냐고 물었다. 학생들이 와인 잔이라고 하자, 교수는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내 눈에는 말야, 비키니 팬티 입은 다리로 보이는데……."라고 했다. 입을 한껏 벌리고 깔깔거리는 남학생들 속에서 여학생들은 웃을 수 없었다. 30년 전 강의실 풍경이다. 지금은 그랬다가는 교수는 징계를 피하기 위한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최근 부산대 공대의 한 교수는 "자신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교육적이었으며" 운운하는 글을 냈다. 나는 성폭력 교수가 해명을 할 필요도 없던 시대의 피해자다. 올해 부산대에는 3월 이후 6 건의 성폭력 피해가 접수되었고 피해자는 29명에 이른다. 그 중에는 나처럼 30년 묵은 것도 있지만, 다양한 시차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있다. 나를 포함한 피해자들은 피해를 인지한 시점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싸우고 있다. 싸워야 하는 대상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가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가해자의 동료교수, 어린 '한남'들이 집결한 학내 커뮤니티, 인터넷 포털사이트 기사에 악성댓글을 다는 사람들, 심지어 날마다 얼굴 보는 가족까지 포괄했다. 성폭력 피해자를 '우는 여자'로 맘대로 규정한 언론사들도 불편한 대상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적대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때로는 싸움의 표적이 나 자신이 될 때도 있었다. 나의 경우, 쓸데없는 자책과 싸우며 분노를 안으로 터뜨리던 때가 있었다. 우리들은 피해자로 자신을 규정하는 순간 얼마나 많은 적이 사방에서 창궐하는지 똑똑히 알았다. 내 사건에서,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가해자는 이제는 현존하지 않는 인물이다. 미투 운동을 하겠다고 주변에 알렸더니, 죽은 사람에게 소송을 걸 거냐며 '독한 년'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가까운 이조차 말렸다. 그러나 나는 생전에 사과 요구를 거부하고 나에게 소설 쓰냐고 비아냥거리던 가해자에게 죽음을 이유로 면책을 줄 생각이 없다. 나는, 우리는, 독해져야 했다. "몸 좀 대주고 학점 잘 받으면 되지." "좋아서 즐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돈 뜯어내려는 수작이냐." 따위 '악플'을 맨 정신으로 웃어넘길 정도의 내공을 쌓으려면 악종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학교 당국도 실망스러웠다. 부산대 인권센터는 학내 성폭력 사건을 조사하는 공식 기구임에도 피해자들의 동반자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우리 피해자들은 인권센터에 사건을 접수하고 나서도 원군을 얻기는커녕 싸워야 할 대상이 더 늘었다는 생각에 시달려야 했다. 인권센터는 5월 이후 센터장이 세 명이나 바뀌었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기관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센터장과 상담원은 성평등 의식보다 규정과 관행을 중시하고 권위를 차리는 일에 더 충실했다. 인권센터가 개소식을 하며 축하 잔치를 벌인 날, 우리들은 정문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피해자임에도 자신과 관련된 공식 문서나 학교 결정에 접근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가해자의 징계 결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고, 어떤 부분이 사유로 인정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예술문화영상학과 피해자 중에는 피해 당시 미성년자도 있었지만, 그것이 가해자의 해임 사유에 반영되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언론에는 부산대가 성폭력 교수를 과감히 중징계했다고 알려졌다. 나의 경우 학보사에 사과문이 실렸더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학교가 사과문을 낸 것을 알았다. 내 요구를 온전히 담지 못한 점을 양해해 달라는 어떤 귀띔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과문을 발표한 학교를 이해해야 할까.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교수가 강의실에서 와인 잔 희롱을 서슴지 않는 버릇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가 기대고 있는 세상은 조금이라도 변했다. 성희롱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대와, 성희롱이 부족하나마 규정된 시대, 교수가 여학생들 앞에서 여학생들은 웃을 수 없는 농담을 남학생들과 즐기던 시대와, 그런 희롱을 한 교수가 제 안위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물론 그 시대가 그저 주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일 것을 기꺼이 감당하고 악녀로 규정되는 길을 피하지 않은 피해자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이만큼의 진전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을 한 뼘이라도 더 옮기기 위해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문순 덧붙이는 글 첨부 사진에 피해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얼굴은 신원이 드러나지 않게 처리해 주십시오. 첨부파일 부산대 인권센터 개소식날, 항의시위가 열렸다.jpg #부산대교수성폭력 #미투운동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