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검토 완료

김윤지(ria0724)등록 2019.04.08 08:36
  어깨 넓이보다 검지 한 마디 정도 크게 구입한 남색 상의는 어색하기만 했다. 50여명의 아이들 중에는 나와 같은 초등학교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자 아이들은 모두 깡총한 단발머리였고, 남자 아이들은 모두 짧은 스포츠형 머리였다. 우리는 같은 옷을 입고 비슷한 표정으로 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3월은 아직 겨울이었고, 모든 게 새로웠다. 선생은 손바닥만 한 종이 뭉치를 제일 앞자리에 아이들에게 건넸다. 8줄의 1인용 책상 앞에서부터 종이를 든 손이 물결처럼 뒤로 넘어왔다. 선생은 종이에 적을 것을 불러주었다. 간단한 것이었다. 우선 이름을 쓰고, 가족관계를 적으라고 했다.

  아이들은 시험을 보는 것처럼 조용히 종이를 채워나갔다. 사각사각. 그 다음으로 부모 직업 같은 기본적 인적사항 질문이 이어졌다. 선생은 차분한 목소리로 솔직하게 적으라고 하였다. 처음 대면한 학생들을 빠르게 파악하기 위한 노하우였을 것이다. 얼마의 시간이 주어진 후, 각 줄의 맨 뒷자리 학생이 종이를 걷어오라고 했다. 나는 망설이던 질문의 답을 재빨리 채운 뒤 일어났다. 내 앞 41번은 뒤늦게 답을 적는 중이었다. 그 앞 커트 머리에게 먼저 갔다. 그 애는 종이를 반으로 접고 있었다.
 

  학기 초, 친해지는 무리는 앉은 자리와 무관하지 않다. 41번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약간 돌출된 입, 처진 눈매에 덩치가 좀 컸다. 말투도 느려 둔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와 다르게 커트 머리는 말랐고 얼굴이 하얬다. 안경 속 가늘고 긴 눈은 살짝 위로 올라가있어 매서운 인상이었다. 점심을 혼자 먹지 않기 위해 그들과 통성명을 했다.
부여받은 번호의 순열 외 공통점이 없던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멀어졌다. 1인용 책상을 붙여 짝꿍이 생기게 자리를 조정한 후였을 것이다. 커트 머리는 다른 무리로 옮겨갔고, 나는 주변 아이들 중심으로 관계를 넓히고 있었다. 그래도 도시락은 아직 41번과 먹었다. 갑자기 변경하기에는 애매함과 미안함이 있었다.
  어느 날, 주번을 같이 맡게 된 41번이 고민을 털어놨다.
  "혜진이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다른 애들한테 내 욕도 하고….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41번은 우리 반 은따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41번과 친해지려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고민이 부담스러웠지만 모른 체, 아닌 척 할 수 없었다.
  "혜진이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그런 거 같아. 처음에 선생님이 종이에 쓰라고 했던 거 있잖아, 그거 걷을 때 봤는데 부모님 이혼하셨다고 썼던데? 그래서 그러는 게 아닐까?"
  "그래? 나도 아빠 없는데…."
  41번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커트 머리를 이해하려는 듯 보였다. 나는 아차 싶었다.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응답이 커트 머리 종이가 아니라 41번 종이에서 봤던 건가 헛갈렸다.
  "혜진이 부모님 이혼했다는 거 절대 말하지 마, 알았지?"
  나는 41번의 입단속을 시키는 걸로 진실은 일단 덮어두었다.
 

  그 뒤 나는 41번과 커트 머리, 그 누구와도 엮이지 않은 여섯 명으로 구성된 무리의 일곱 번째 멤버로 들어갔다. 운 좋게 그 중 3명과 2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다. 단짝이 생겨 더 이상 혼자 있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는 많은 비밀을 공유했다. 좋아하던 남자애, 친구 엄마의 유방암, 사춘기 시절 소소한 고민, 성적, 시시콜콜한 일상 등. 교환일기를 7권이나 썼고, 심지어 각기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6개월 정도는 2주에 한번 씩 만나 일기장 교환을 빌미로 만났다. 다른 친구들은 모르는 이야기가 우리의 유대감을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런 단짝에게도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또 다른 친구들을 사귄 후에도, 서로를 위해 기도해주던 교회 친구와도, 대학 연극동아리에서 동고동락하던 동기들과도, 뉴질랜드에서 가족처럼 지냈던 패밀리와도, 서로의 습작을 보여주던 문우들과도 나누지 못했던 비밀이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담임의 첫 번째 질문에 거짓을 적어냈다. 아빠, 엄마, 나, 동생. 사실 아빠를 적지 않았어야 옳다. 그 후로부터는 계속 그래왔다. 일부러 거짓을 말하거나, 굳이 사실을 말하지 않아 부모의 이혼 사실을 숨겼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꼭 숨겨야 하는 치부처럼 되어버렸다. 남들에게 약하고 부족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비밀은 시간이 갈수록 거미줄처럼 마음을 옥죄었다. 옴짝달싹 못하게 하여 나른 예민하고 날카롭게 만들었다.
  얽힌 끈을 비로소 끊을 용기를 냈던 건 20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대학원에서 알게 된 나름 자기 글을 쓰는 사람들과 자료를 공유할 목적으로 만든 온라인 카페에서였다. 그곳 내 이름으로 된 게시판에 일생최대의 비밀이었던 가족관계를 밝혔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러워하여 숨겨왔다는 사실도 적었다. 조회 수는 있었지만 민망할 정도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람들은 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로 나를 다르게 보지 않았다. 나는 달라질게 없었다. 마음이 가벼워졌고, 여유가 생겼다.
 

  내 1996년 다이어리 주소록 제일 윗줄에는 41번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반에서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눴던 사이라는 흔적이다. 학년이 올라가 반이 갈린 후 가끔 복도에서 마주쳤지만 우리는 인사 없이 지나쳤다. 그래도 안심이 되었다. 주희 곁에는 새로운 친구가 생겼고, 여느 여중생처럼 재잘대며 깔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두려웠다. 나와 비슷한 주희와 있는 게 무서웠다. 그때는 몰랐다. 상처는 감추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싸매어 둔 뒤 자연치유를 기대하는 것보다 처음엔 따갑더라도 밖으로 꺼내 놓는 게 좋다. 주희는 분명 나보다 빨리 튼튼한 새살이 돋았을 것이다. 주희는 솔직하고 강했고, 나는 아둔하고 약했다.
 

  그때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 이대로 당당해져도 되고,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충분하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