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M87이라고 명명된 블랙홀이 발견되어 천문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세계 각국의 물리천문학자들이 결성한 이벤트 호라이즌 망원경 프로젝트 연구진이 세계 각국에 있는 전파망원경 8대를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5500만 광년 거리에 있는 블랙홀을 발견한 것이다. 말이 발견이지 망원경으로 수집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화상으로 만드는데 걸린 기간이 2년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지구인이 보았던 블랙홀은 추정에 의해 그린 가상의 블랙홀이며, 이번에 발표한 사진이 진품 블랙홀 모습이라고 한다. 질량이 태양의 65억 배라고 하는데 지구인의 개념으로는 가름할 수 없어 안타깝다. 아인슈타인도 존재를 부정했던 블랙홀은 그동안 이론 물리학자들의 수학적 계산에 의해 존재해 온 이론적 존재였다.
5500만 광년이란 빛의 속도로 5500만 년 동안 가는 거리이며, 지구인은 5500만 년 떨어진 M87 블랙홀을 보고 있은 셈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M87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이 아니며 이미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 하여튼 지구인의 눈에는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M87은 빛의 속도로 5500만 년 동안 대우주를 가로질러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 빛이 출발했을 무렵엔 지구에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나타나기 훨씬 전, 그러니까 공룡이 멸종되고 포유류가 서서히 지배구조를 바꾸어 가고 있었다.
우주에는 빛 만 빠른 게 아니다. 138억 년 전 빅뱅 후 우주는 암흑 에너지로 인해 계속 팽창 중이다. 그리고 그 팽창 속도는 가속을 한다고 한다. 우주의 끝 부분에서는 속도가 매우 빨라서 빛 보다 빠르다. 고무풍선 불 때의 현상을 연상하면 조금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우리 은하의 중력에 갇혀 그 팽창 속도를 감지할 수 없다. 은하수들의 거리가 멀어지므로 해서 속도가 발생하지만 지구는 안전성을 보장받는다는 것이다. 하여튼 우주는 빅뱅 후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광속에 근접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사실 우주에서의 속도 개념은 천문물리학자들에게나 설득력이 있지 대다수의 대중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하여 지구가 속한 태양계가 우리 은하를 공전하는 속도를 측정해 보면 조금은 실감이 나지 않을까. 태양계는 우리 은하 중심에서 30,000광년 떨어진 외곽에 있으며 초속 220km로 공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은하를 한 바퀴 도는 데 2억 5천만 년이 걸린다. 그래도 광년이란 개념을 벗어나 미터법으로 돌아오니 조금은 이해가 될 성싶다.
이것 또한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를 보자. 지구의 자전 속도는 시속 1,669km이다. 이제 광년을 사용하지 않으니 한결 마음 편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속도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럼 비행기 중에서 가장 빠르다고 하는 전투기의 속도와 비교해 보면, 마하 1은 음속으로서 초당 340m이고, km로 환산하면 시속 1,224km이며, 따라서 자전 속도를 마하로 환산하면 마하 1.36이 된다. 전투기 최고 속도가 마하 2~3이니까 평상시 속도라고 보면 될 거 같다. 하여튼 지구는 마하 1.36으로 돌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국망봉 용수동에서 국망봉 산판길로 오르는 너덜지대 ⓒ 안호용
블랙홀 M87이 발견된 비슷한 시기에 모바일 통신업계에서 차세대 통신기술인 5G가 판매되어 다시 한번 속도라는 개념을 환기시켰다. 기존 4G보다 20배 정도 빠르다고 하는데, 그것을 영화 한 편을 다운로드할 때 시간과 비교하면 실감이 난다고 한다. 10분 걸릴 게 30초면 끝나고, 1분 걸릴 게 3초면 끝난다는 의미이다. 그런 비교는 극히 일부분이고 수많은 정보를 수집 분석하는 등의 동시성을 요구하는 각종 통신기술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한 예로 무인 자동차를 사용할 때 초고속 통신기술 기반이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정보를 수집하고 빅데이터를 처리하여 공유하기 위해서는 속도가 관건이다. 기가급의 엄청난 데이터를 운반하려면 빠른 통신이 필수인 것이다. 통신 세계에서는 곧 빠름은 선이며 미덕이다. 이제 지구문명은 철기시대 석유시대를 거쳐 통신시대에 돌입했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바일로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프로그램과 극장에서 상영되는 대다수의 영화와 그 외 수많은 동영상을 HD 고화질로 볼 수 있다. 버퍼링도 없고 텔레비전을 보듯 자연스럽다. 불과 몇 년 전 3G 시절의 불편함은 전혀 없다. 4G의 속도에 완전히 적응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우리는 당연하게 5G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4G가 얼마나 느렸는지 그때 실감할지 모른다. 빛처럼 빠른 수많은 주파수들이 우리 주변을 움직이며 몸을 관통하기도 하고 에워싸기도 하지만 그 빠름을 우리는 감지하지 못한다.
얼마 전 오대산을 가기 위해 강릉행 KTX 시간을 알아보았는데, 상봉역에서 진부까지 고작 한 시간 10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강릉행 KTX가 없던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최소한 무박 2일을 해야 오대산을 갔다 올 수 있었는데 요즘은 하루면 거뜬히 해결된다는 것이다. 산행 후 저녁에 여유롭게 동치미 막국수를 먹고 서울에 올라와도 시간이 남는다. KTX는 지상 운송의 꽃이라고 한다. 가끔 부산으로 출장 갈 때면, 집에서 아침을 먹고 KTX를 타고 가서 업무를 보고 저녁은 서울에서 먹어도 일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요즘 서울 주변에 제2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강동구에서 세종시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는 도심 지역에서는 터널화하여 빠름을 극대화시킨다. 그것뿐만 아니라 현재도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는 서울 주변의 도로망에 계속 새로운 도로들이 연결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못 보던 도로가 떡하니 눈앞에 펼쳐져 있을 정도로 공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지도를 보면 그래픽카드의 기판처럼 정말 촘촘하게 도로가 얼키설키 이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주택 면적보다도 도로 면적이 더 클 날이 올지도 모른다. 빠름에 대해 어떤 집착증이라도 걸린 듯 도로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문명의 발전은 빠름과 비례된다. 빠르지 않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속도와의 전쟁이다. 386컴퓨터와 몇 개의 고속도로 망으로 글로벌 경제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64기가 메모리급 컴퓨터와 그물망 같은 고속도로를 생산해야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빠름은 필수조건이다.
이미 대한민국엔 통신과 도로망이 거대한 집적회로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 네트워크는 우리의 일상이 되어 강원도 산골에서도 인터넷 화상 통화를 할 수 있고, 전국 어디든 하루에 왕복할 수 있다. 그것뿐만 아니라 택배 속도도 기가급이어서 하루 만에 주문한 물품을 받아 볼 수 있다. 빠름은 경쟁력이 된 지 오래다.
잠실 광역버스 터미널엔 서울 근교에서 출발한 버스들이 수많은 사람들을 토해낸다. 오전 7시 15분, 버스에서 내린 인파는 전철을 타기 위해 개찰구로 빠른 걸음을 재촉하고,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도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타고 오른다. 모두 잰걸음으로 각자 목적지를 향해 움직인다. 역시 역 주변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인파가 지하철을 향해 벌 때처럼 빠르게 걷는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각자 삶의 터전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 국망봉 국망봉에서 견지봉 능선 허리를 끼고 도는 산판길 ⓒ 안호용
3G시대 때만 해도 업무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이메일로 상대방에게 보냈으나 요즘은 동영상을 찍어 카톡으로 즉시 보낸다. 퇴근 후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있을 때 상사로부터 카톡이 와 업무내용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또한 어느 기업체에서는 모바일 CCTV로 직원들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감시한다고 한다. 요령 부릴 틈이 없다. 그리고 맛집의 음식이나 어느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들도 실시간으로 지인들과 공유할 수 있다.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들이 전파를 타고 우리들 주변을 빠르게 지나친다. 우리는 그 빠름의 일부가 되어 이젠 거부할 수 없게 된다. 빠름은 당연한 것이다. 누군가 빅브라더처럼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윈스턴 스미스가 결국엔 빅브라더를 찬양한 것처럼 우리도 빠름에 순응한다.
그렇게 우리는 빠름에 순응하는 나를 발견한다. 마트 계산대 앞에 몇 사람이 줄 서있는 것을 못 참고 옆 계산대로 두리번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온갖 보안 프로그램이 깔겨 속도가 느려 터진 컴퓨터를 보며 자판기를 속절없이 두드리는 나를 발견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십 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을 때 주방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퇴근길 집으로 가는 광역버스에 빈 좌석이 없을 때 바로 뒤에 오는 다음 버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서서 가는 나를 발견한다. 지하철 환승역에서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바삐 걷다가 앞사람이 느리면 제비처럼 재빠르게 추월하는 나를 발견한다. 우회전하는 내차 앞에 직진하려는 차가 있을 때 신호등 한번 바뀌는 것을 못 참고 크랙션을 눌러대는 나를 발견한다. 병원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못 이겨 손가락으로 연신 카톡질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는 빠름의 노예가 되어 매일 늦음과 씨름을 한다. 늦음을 경멸한다.
우주가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팽창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빠름을 느끼지 못한다. 지구가 마하 1.36으로 돌고 있지만 우리는 그 빠름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이 공간이 빠르게 움직이지만 그리고 그 빠름이 무의식화되어 우리를 통제하지만 어느 땐가 문득 정지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거창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돈오 같은 깨닮음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빠름이 결코 나를 규정짓게 하지는 않는다. 그 정지된 순간을 인식할 때 느림이 시작된다. 그것은 추상이나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인식의 문제이다. 움직이지 않은 나를 발견한다는 것은 내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문'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느림의 첫 음표를 듣는 순간이리라. 긴 온음표를.
빠름은 맞지 않은 옷을 입혀 놓은 것처럼 어색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빠름이 우리 앞에 나타난 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친구처럼 친숙한 것 같지만 사실은 욕망이 개입하여 확대 재생산된 현상이라는 사실을 안다. 빠름은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요소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빠름이 세상을 작동하는 중요한 매질이며 인간의 욕망과 결탁하여 급속도로 지배력을 확보하지만, 그것만이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빠름은 인간의 욕망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빠름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또한 월래 인간은 느렸기 때문이다. 느림의 안온함을 모른다면, 빠름으로부터의 도피도 꿈꾸지 못할 것이다.
상리를 들머리로 해 금수산을 넘어 상천리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택시를 부른다. 제천 가는 버스가 있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변변한 그늘 하나 없는 주차장 입구 부근에서 기다린 지 30분 만에 택시가 모습을 나타낸다. 늙은 택시 기사의 느린 말에 대꾸하는 사이 택시는 굽이져 이어지는 충주호를 따라 청풍면 읍내로 간다. 제천 가는 버스가 오려면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읍내는 느리고 조용하다. 버스는 제 시간보다 빨리 올지 늦게 올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10여분이 연착한 버스가 지친 모습으로 달려온다. 버스는 어딘지 모를 마을과 넓은 길과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 드디어 1시간 만에 제천에 도착한다. 하지만 제천역을 가려면 한 20분은 걸어야 한다. 한적한 제천 시내를 천천히 걷는다. 사람 사는 모습은 어디든 다르지 않다. 대합실은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서울로 가는 열차는 오후 6시 29분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러니까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한다. 나는 또 기다린다. 하행 열차에서 내린 한 무리의 인파가 개찰구를 통해 나온다. 이미 커피 한잔을 마시고, 가락국수 집에 가서 느린 속도로 가락국수 그릇을 비운다. 드디어 플랫폼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열차는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 20분 연착할 것이라는 방송이 나온다. 그렇게 또 기다린다. 그리고 열차는 30분이 지난 후 굉음을 울리며 거대한 몸집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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