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명인들의 춤, 그리고 춤의 향연

정읍사예술회관, 춤의 향연 여섯 번째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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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찬(chans0007)등록 2019.05.27 09:43
오늘날 한국 전통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밋밋한 편이다. 우리 춤의 기원이 원시 고대사회 무속인들의 주술적인 몸짓으로부터 출발하였다는 것이 학계의 판단이지만 현전하는 춤에서 종교적 의미나 상징적인 형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하지만 K-Pop 가수들의 노래와 춤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반응과 비교해 보았을 때, 현전하는 한국 전통춤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밋밋하다 못해 오히려 싸늘한 편에 속한다.
 
그래서 어쩌다 명인들의 명무(名舞) 춤판이 벌어져도 대중들의 이목을 집중되는 일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있어서 춤의 명인들이 벌이는 춤판에 대한 대중들의 일반적인 선입견은 한마디로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이 보편적인 판단이다.
 
하지만 다변화 사회에서 나타나듯 아직도 우리의 전통춤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은 여전히 다양한 계층에 걸쳐 수많은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애정마저도 대중들에게 쟁점 사안이 될 만큼 뭇시선으로는 붙잡지 못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특히 K-Pop에 열광하는 청소년 마니아층을 전통춤의 매력으로 쏠리게 한다는 것은 웬만한 기획력이 없고서는 성공조차 낙관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또한 이변은 있었다. 지난 24일 정읍사예술회관 무대에서 펼쳐진 '명무들의 춤의 향연' 무대가 그 이변의 현장이었다.
 
이날 무대는 성기숙(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사회로 근대 한국 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의 춤의 맥이 그의 1대 제자인 김보남(1912~1964년)을 통해 2대 신관철(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9호 수건 춤 예능보유자) 명인에게 이어져 3대 김일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우정 출연한 명무들의 춤판이 펼쳐졌다.
 
하지만 청소년들이 공연 중간 공소의 틈을 이용해 연호했던 이름은 이날 공연에 참여한 명무들 특히 신관철, 김일환, 원미자, 백현순, 이영훈, 백년욱, 윤덕경, 이명자 등의 내로라하는 명무들의 이름이 아니라 수건 춤과 소고 춤에 함께 군무를 펼쳤던 앳된 소녀 무용수 김유리라는 이름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청소년들과 가장 가까운 연령대인 김유리에게 쏠렸던 청소년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난 2016년 명인명무 세 번째 무대에서 용인대 무용학과 이병옥 명예교수에 이어 이날의 사회 성기숙 교수의 "한국의 국악과 춤에 있어서 정읍의 재인들이 이바지한 공로는 매우 큰 것이었다"는 말처럼 남다른 감회의 무대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02년 궁중음악까지 폐지되자 이후 국내에서는 최초로 극장식 무대인 '조선협률사'가 등장하여 실낱같은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 '송만갑 협률사'의 고수로 활동하던 한성준은 1915년 이왕직아악부가 일제로부터 기존의 일부 조직을 인계받아 우리 음악과 춤의 맥을 잇게 되는 과정에서 당시 조선 최고의 춤꾼 김인호와의 인연도 시작됐다.

실제로 한성준이 장단이나 북 고수가 아닌 무용가로 이름을 올렸던 시기도 김인호(1855~1930)가 사망하던 1930년대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조직하면서 부터다. 그마저도 당초 무용을 담당하려했던 이강선이 남편의 반대로 표면에 나설 수 없게 되자 본격적으로 무용가로 변신하게 되면서 1934년에 한성준 명의의 '조선무용연구소'를 열면서부터다.
 
한성준은 본래 무가(巫家) 출신으로 기본적으로 음악과 춤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수원 화성재인청 소속의 춤꾼으로 활동했던 김인호의 춤사위를 뛰어 넘는 완벽한 춤꾼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김인호의 춤가락 반주자로 활동했지만 그의 춤사위를 뛰어 넘지는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김인호의 사망 이후 스승의 온전한 춤사위를 잇기 위해서는 앞서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춤사위를 체득해 온 또 다른 스승이 필요했고, 그래서 찾아갔던 사람이 바로 정읍의 율객이자 만능 예능인 이었던 전계문이었다.
 
이 시기의 조선음악과 춤은 1623년 시행된 인조의 '장악원(掌樂院) 여기(女妓) 제도의 혁파' 이후 각 기관에 소속돼 있던 기생과 악공들이 생계를 위해 민간풍류방에 쏠리게 되면서 민간 풍류방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며 궁중의 예술적 음악수준을 넘어서던 상황이었다.
 
여악제도 폐지 이후 궁중에서 연행을 담당하던 관기들이 자연스럽게 민간으로 흩어져 적극적인 기업(妓業) 활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궁중음악이 민간 풍류방에 유입되며 민간의 풍류음악으로 정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정읍 풍류방(정읍진산동영모재) 주인이었던 고부(정읍?)의 호장출신의 중인 김평창(본명 김상태, 1853~1943)이 풍류방을 열어 현재의 구례와 익산(이리)의 풍류음악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정읍에서 만들어진 정악보가 현재의 국립국악원에서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당시 정읍 풍류방의 음악적 위상을 짐작케 한다.
 
이것은 인근 지역 고창에서 신광흡(1771~1844)의 아전직을 세습했던 동리(桐里) 신재효(1812~1884)가 말년에 광대,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는 호장(戶長) 직을 역임하며 판소리 여섯바탕을 정리했다는 점에서도 과거 각 지역 호장 출신의 중인들이 얼마나 음악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들 이었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 당시 정읍에서 율객들을 지도하던 악사는 무계 출신의 재인 전계문(1872~1940)이었다. 훗날 평창의 풍류방 가업을 이었던 차남 김기남도 정읍의 아양산(초산동) 자락에 '풍류방 아양정'을 개소하여 악사로 기용하였던 이도 전계문의 제자인 추산(秋山) 전용선(1884∼1964)으로 '풍류방 아양정'은 1950년대까지도 운영된바 있다.
 
따라서 근대 춤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성준이 당시까지 최고의 춤꾼으로 알려진 김인호의 춤사위를 잇기 위해 정읍의 전계문을 찾았다면 그것은 어느 시기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장소는 '풍류방 영모재(다유락으로 불림)'나 '풍류방 아양정'에서 전계문에게 김인호의 춤사위를 익혔을 것이다.
 
그렇게 전계문에 의해 재현된 김인호의 춤사위는 다시금 한성준을 통해서 오늘날 현대 무용의 기본 춤인 살풀이춤을 비롯해 굿거리 춤, 수건 춤, 입 춤, 허튼춤 등 무려 80여 장르의 다양한 춤사위로 현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지역사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아직도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나 전계문에 의해서 재현된 김인호의 춤이 한성준을 통해서 김보남→ 신관철→ 김일환을 거쳐 그의 제자인 김유리에게 이어져 그런 김유리를 통해서 지역 청소년들이 전통 춤에 열광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날 무대는 잊혀있던 정읍 춤이 재현된 것이라는 논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한편 이날 무대에서는 젊은 무희들의 섬세한 동작을 엿볼 수 있었던 '교방검무'와 '진주교방의 굿거리 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59호 신관철 수건춤 전수자들의 '수건 춤' 군무, 그리고 매우 동적인 춤사위로 웃음을 자아내게 했던 경남 지역의 '신덧배기 춤', '강선영류 태평무' 등이 선보여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호평도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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