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잃은 비극의 현장을 가다.

일본 강제 연행 역사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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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구(sinm1129)등록 2019.06.17 14:24
나라를 잃은 비극의 현장을 가다
일본 강제징용 역사기행
 
6.5 ~7일 간 일본 강제징용을 위한 답사를 떠났다.
새벽 2시에 문화예술회관 후문에서 일본 강제징용 역사기행을 떠나기 위해서 6.15학교 회원 9명이 모였다. 김해공항으로 이동해서 후꾸오까 공항으로 갔다. 후꾸오까  형무소 터는 윤동주 시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순국한 장소이다. 일본은 패전 이후 형무소 부지 대부분을 아파트단지와 놀이터 등으로 바꾸었다.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을 기념할 어떤 공간이나 기념물도 보이지 않았다. 일본 내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 회원들이 이곳에서 해마다 윤동주의 기일(2월 16일)이면 시를 낭독하는 행사가 열린다. 또한 이들은 윤동주 시時비를 세우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후쿠오카 시와의 갈등으로 아직까지 세우지 못하고 있다.
 
 

후꾸오까 감옥 터에서 묵념 6.15학교 회원들이 후꾸오까 형무소 터 앞에서 윤동주시인과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해서 묵념하고 있다. ⓒ 신민구

 
후꾸오까조선학원에 갔다. 강제연행된 재일조선인들은 해방 후 귀국하려 했으나 자식들이 한글을 몰라서 국어강습소을 수 백개를 만들었다. 그런데 남북한의 혼란한 정세, 한국으로 귀국시 재산제한되면서 53만명은 일본에 장기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초등교육을 실시하였다. 북측은 조선학교에 교육원조를 1957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다. 일본은 2010년부터 고교무상화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조선고급학교는 배제되었다. 여기에 더해서 2011년 부터는 조선학교에 대한 20% 가량의 보조금을 중단하였다. 조선학교의 교육목적은 민족교육 실시(국어, 역사), 일본에서 살아갈 능력, 통일에 기여할 유능한 인재 육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큐슈 조선학교 정문앞에서 615회원들 3일 간 고령인데도 우리를 끝까지 안내해주신 배동록 선생님과 함께 ⓒ 신민구

 
조선학교 뿐만 아니라 다음 날까지 우리를 안내하고 소개해주신 배동록선생님을 만났다. 조선학교를 방문하니 수업 중이었다. 교장선생님은 평양으로 2주 간 수학여행 인솔 책임자여서 교감선생님이 우리를 안내하고 학교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이곳의 조선학교는 처음에는 목조건물이었으나 나중에 학교를 옮기면서 일본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세워주어 건물이 화려하단다. 이 학교는 1956년 설립하여 졸업한 학생만 4천명이 넘는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조선학교가 북측과 연계되어 있다하여 무상교육에서 제외되어 학부모들의 학비부담이 커서 일본학교로 빠져 나가고 있다. 고교무상화를 위해 5년간 투쟁하고 있으나 패소하였다. 이유인즉 북측의 일본인 납치문제와 조총련의 북측과의 관계를 문제 삼았단다. 조선학교의 국적은 대부분 조선45%(실제로 무국적자), 한국 48%, 일본2%이다. 이 조선학교 기금 마련을 위해서 폐휴지 모으는 일도 한다. 민단이 설립한 학교는 일본처럼 고교무상화의 적용을 받고 있다. 이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있다. 일본내 조선학교 10개가 있는데 이곳 큐슈에는 1개가 있다.
 
 

조선학교의 수업 장면 조선학교의 수업참관을 하였다. 수업 방법은 영상을 제공하면서 강의식과 질문.응답 형태를 결합하면서 하기도 하고, 모둠별로 공부도 한다. 어려운 현실에서도 우리 한글을 배우고 한복을 입으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감동 그 자체였다. 학생들의 수업 태도가 매우 진지하였다. ⓒ 신민구

   

조선학교의 모둠별 수업방법 생물시간에 모둠별 수업을 하고 있다. 학급 게시판에는 '조국의 배려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자'란 표어를 보고 조국에 대한 사랑을 학교에서 배우고 있어 뿌뜻하였다. 한국의 교육은 철처히 개인중심과 비교된다. ⓒ 신민구

 
 

조선학교 학생들과 함께 조선학교 학생들과 함께 복도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어려운 환경인데도 표정이 밝고 친절하였다. ⓒ 신민구

 
우리 일행은 교감선생님이 수업하고 있는 중·고등학교 교실을 인도하였다. 수업 방식은 컴퓨터를 활용하여 학생들과 질의하는 방식이나 모둠별 토론 수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반이나 수업 태도가 진지하고 참여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일본인들의 차별이 매우 심한데도 불구하고 우리 말글을 지키고 한복 등 우리 풍습을 지키려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한 학급 게시판에 이달의 목표로 '조국의 사랑과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학과 학습을 잘하자!!'라고 되어 있었다. 조선학교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필집인 꽃송이에는 놀라울 만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자본의 논리에 따라 무한경쟁을 하면서 오로지 혼자만의 이익을 위해 공부하는 모습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재일동포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하면서 단결을 밤을 가졌다.
 
 

조선학교 학생들의 표정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두 학생이 기꺼히 포즈를 취해주어서 고마웠다. 조국통일의 큰 기둥이 되리라 믿는다. ⓒ 신민구

 
아침에 일어나니 더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야하타 제철소를 답사하였다. 이미 양심적인 일본인 5명이 도착해있었다. 이중 재일동포 3세로 재일동포 여성의 삶을 연구하는 교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성 자료가 많지 않아서 연구하기 쉽지 않단다. 일본인들은 조선인 징용·징병과 조선인 위안부를 연구하는 분야를 달리하고 있었다.
야하타제철소는 1895년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중국 철을 가져와 1901년 설립되었다. 일본과 가까운 부산에서 배로 시모노세키로 12,000명 징용되었다.

 

야하타 제철소 앞에서 설명하는 모습 615회원들이 야하타 제철소 앞에서 배동록선생님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일제의 조선인의 강제연행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신다. 태평양전쟁 기간에 조선인 67만명이 강제연행되어 이 제철소에서도 하루에 12시간 가량 노예같은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제철소를 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 하면서 일제만행을 지우려고 한다. 배선생님의 부모님이 엄연한 증거인데도. ⓒ 신민구

 
배동록선생님의 아버지는 경남 합천 출신으로 1939년 강제연행당하여 도일하였고, 어머니는 힘든 삶 때문에 자살을 하려고 하였으나 자식 5명 때문에 살기로 하고 1941년에 일본에 건너갔다. 이후 배선생님의 어머님인 강금순여사님은 재일동포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징용의 땅에 뿌리 내린 꿋꿋한 민족혼>이란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실리었다. 필자가 이번 역사기행 답사 추진 단장이라고 어머니의 자서전인 [우리 엄마 강금순] 책을 배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하게 받았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 젊은이들이 동원되었으나 부족한 노동력을 조선인으로 채웠다. 제철소에서는 하루에 10~12시간 중노동을 하였다. 일제의 패망 후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60여 만명이 분단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70여년이 흘렀다.
이 제철소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시도하면서 일제의 강제 연행한 역사적 사실을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배선생님의 부모님이 생생한 증인인데도 말이다. 일본인 활동가들은 진실을 알려 달라, 한일 관계는 과거가 청산된 호혜적 미래관계를 만들자고 하였다.
 
 

야하타 제철소 앞에서 이 제철소는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지었다. 탑 위에 1901년란 숫자가 선명하다. ⓒ 신민구

 
무궁화당은 약속시간보다 늦은 시간인 11시 20분에 도착하니 이곳 조총련 위원장인 리종곤과 민단 부위원장 그리고 일본인 활동가가 반갑게 맞이하였다. 하야타제철소에 에너지의 공급원인 지쿠호석탄생산지에서 사망하여 거의 무연고로 묻힌 납골당인 무궁화당이다. 이 납골당은 조총련과 민단이 함께 힘을 모아 건립하였다. 민족 명칭도 조선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려인이라도 하였다. 두 단체가 사용하는 명칭이 다르기에. 두 선생님이 일본인과 같이 설명해주었다.
이곳 석탄은 품질이 우수하여 일본탄광의 40% 이상을 차지하였다. 태평양 전쟁 전시하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1939년~1945년 동안에 67만명 이상의 조선인이 강제연행 되었습니다. 그중 지쿠호에는 적어도 15만명이 끌려왔습니다. 이들은 10대에서 40대까지 연령대로 민족차별과 열악한 대우, 가혹한 강제노동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많은 탄광노동자들이 귀국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 무궁화당에는 11개 유골이 안치되어 있는데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서 유가족을 계속 찾고 있다. 매년 10월에 추도식을 갖는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일본극우세력과 일본 정부는 인정하지 않고 방해만 일삼고 있다. 이들은 강제연행된 광부들이 스스로 돈벌러 일본에 왔다는 말로 왜곡을 일삼아왔다.
 
 

무궁화당 앞에서 재일동포의 설명 일제가 강제연행한 조선인 15만명이 지쿠호탄광에서 희생되어 묻힌 납골당이다. 대부분 무연고인데 몇 유골은 찾아주었다.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의 영향으로 조총련과 민단이 함께 세웠다. ⓒ 신민구

 
이 납골당은 초대 이사장을 지낸 배래선씨에 의해 1995년~2001년 까지 제안하였다. 그를 지지하는 조선인과 일본인들에 의해 10년간 유골수습 운동 전개을 하면서 이즈카시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맞서 2년 여간의 투쟁 끝에 설립하였다. 배래선씨도 탄광에서 끌려와서 탈출하다가 다시 끌려와 탈출하였다. 납골당은 2000년 6월 15일 남북 공동선언 후인 2000년 12월 2일에 설립되었다. 남북화해가 되면서 일본 내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과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협력하여 납골당을 세웠다. 재일동포들은 하루빨리 통일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몇 구의 시신은 유가족 품에 돌아갔다.
 
휴가묘지에 있는 무연고 37구는 지쿠호 탄광에 근무한 광부로 고문, 기아,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하였다. 이 시신을 동료들이 화장해서 이 묘지에다가 묻고 돌로 표시하였다. 묘지에 가는 길에 아소시대에 만들어진 대리석 다리와 2만평에 달하는 저택을 지나치듯 지나갔다. 조선인을 강제연행하여 탄광에서 착취하여 만든 부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임을 확인한 후 대중에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안부였던 이금주 외 8명이 이 묘지에 와서 대성통곡을 하였단다. 이런 모습을 보러 왔는가 하면서. 태평양 유족회는 과도로 나무에 광주를 새기고 다음에는 전남이라고 새겼다. 3년 전 학교버스를 타고 온 조선학교 학생들과 온 배동록선생님이 37기 묘에 꽃을 드리고 향을 피웠다. 그런데 묘지 인근에 사는 일본할머니가 와서 이 조선인의 무덤을 개·고양이 무덤과 비교하면서 개·고양이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하였다. 그러면서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을 해대는데 배선생님은 그냥 잘못했다고 사과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사유지인 묘지에 조선인 출입금지라도 하면 올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민족학교 학생은 애국교양사업으로 1년에 한 번씩 오는데 다음 달 15일에 온단다.
 
 

휴가묘지 지쿠호 탄광에서 희생된 37구의 조선인 묘지. 고문이나 병들어서 죽은 조선인들을 동료들이 화장하여 묻혔다. 일본인의 애완 개나 고양이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 매년 조선학교 학생들이 이곳으로 답사를 온다. ⓒ 신민구

 
안용한씨는 탄광생활의 고달픔을 노래한 신세타령 노래하였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일본땅 와 보니 배 고파 못살겠네, 숯을 팔
때는 배 고파 죽겠는네, 그말하면 몽둥이 맞았네
어머니 보고 싶소,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내었네,
고향으로부터 쌀가루 부쳐왔네,
쌀가루 받아들고 눈물만 흘렸네
 
일본극우세력은 이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협박편지와 함께 면도칼을 보냈다. 할아버지의 자식이 장사가 안되니 부르지 마라해서 하지 않았단다. 그래서 배선생님이 배워서 이번에도 구슬프게 불렀다. 이 휴가묘지를 찾는데 기여한 시바타 교수는 백색극우 테러를 여러 번 당하였다. 청룡사에는 이노에 스님의 노력으로 이 무연고 광부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념탑을 1975년 세웠다.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써 제국주의는 저렴한 노동력과 싼 원료를 확보하고 자본과 상품을 수출할 수 있는 시장을 담보하기 위해서 식민지를 개척한다. 자본주의 기본모순인 노동자와 자본가가 외화된 제국주의-식민지 관계로 확대・발전된다. 따라서 식민지는 제국주의의 착취와 약탈이 극대화되어 노예화된 삶을 강요한다. 제국주의 노동자들 또한 이윤극대화를 위해서 동원되기에 피폐화된 삶을 강요당한다. 세계 1차 대전과 세계 2차 대전은 자본들 간의 경쟁으로 인한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이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행한 잔혹한 행위는 마땅히 규탄하고, 사과를 받아내고 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배상을 하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당시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에 대한 잔혹상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오늘날 신제국주의에 의한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과 저강도 정책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현실적 과제이다. 이번 답사를 하면서 주권을 잃은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하고 힘든지를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과연 온전한 주권국가인가를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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