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지만 감동없는 <기생충>, 천만 넘기면 안되는 이유

영화 <기생충> 보며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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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kjk5259)등록 2019.06.22 12:02

1.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2019년 칸영화제의 대상이라할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그의 영화는 천만 관객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나는 <기생충>을 보면서 2016년 칸영화제에서 역시 황금종려상을 받은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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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재미있다. 영리하게도 그는 관객들에게 재미를 선사하면서, 동시에 영화 곳곳에 자신만의 상징을 숨겨놓고 찾아보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이런 방식은 그가 전작 <설국열차>(2013)에서 사용한 방법이기도 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기생충>은 <설국열차>의 2019년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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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국열차>의 열차 앞칸과 뒷칸이라는 전후의 수평적인 개념은 <기생충>에서는 햇빛 잘드는 고급주택과 어두침침한 반지하 혹은 지하방을 연결하는 계단이라는 수직개념으로 바뀌었다. 프랑스 만화를 원작으로한 영화답게 <설국열차>속의 열차는 자본주의에 기초한 우리 문명의 모순을 상징하고, 그 속에서의 권력투쟁을 다루는 방식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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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 나오는 고급주택과 계단 아래 반지하 방 그리고 고급주택 지하 방공호는 자본주의에 기초한 우리 문명의 폐해인 빈부격차를 상징한다. 우리 본능의 어두운 그림자인 경제적 지위 혹은 정치적 권력서열은 이 고급주택과 지하방에 각각 또아리를 틀고 그 계단을 오르내리는 우리 삶을 지배한다는 것을 봉준호 감독은 보여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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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설국열차>가 열차 뒷칸에서 앞칸으로 전진하기 위한 상하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SF형식의 영화라면, <기생충>은 기생충과 숙주 간의 권력투쟁 보다는 기생충 상호간의 치열한 경쟁에 중점이 있고, 결국에는 기생충이 숙주를 죽임으로서 기생충 자신들의 삶도 막을 내리는 희비극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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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작가 헨리 드러몬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생충은 그들 종이나 형태나 모습의 완벽함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다. 단지 음식과 은신처 두 가지만을 원할 뿐이다. 어떻게 그것을 얻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개개의 기생충은 각자가 완전히 자신만의 고립되고 나태하고 이기적이며 퇴보하는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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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몬드의 이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오스트리아 출신의 한 정치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하루하루의 식량을 얻으려는 경쟁에서 약하고 병들거나 의지가 모자란 자는 굶어죽고,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경쟁에서도 가장 건강한 자에게 그 기회나 권리를 양도할 수 밖에 없다. 경쟁이란 늘 인종의 건강과 저항력을 향상 시키는 방법이고, 그럼으로써 더 높은 단계로 진화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짐작했겠지만 그는 유태인 6백만명을 학살하려 했던 히틀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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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제국>의 저자 칼 짐머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유대인이나 다른 '퇴화'된 인종들을 기생충으로 여겼고, 더 나아가 그들은 숙주인 아리안 종의 건강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인종의 건강한 진화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의무였고, 그래서 그 기생충들을 없애야 했던 것이다….자신들의 적에게 기생충이라는 낙인을찍은 것은 나치만이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레닌에게 부르주아와 관료들은 사회가 반드시 제거해야할 기생충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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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에서 던지려 했던 메시지가 뭘까? 또 그가 체제의 희생양으로서의 하층계급을 '인간 기생충'으로 묘사하고, 최소한의 생존확보 수준을 넘는 인간 기생충들이 보여주는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행태를 적나라하게 그려내어 얻으려 하는 것은 무엇일까. 설마 봉감독이 히틀러처럼 '인간 기생충'을 확 쓸어버리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을 영화에 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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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영화에서는 마르크스나 레닌류의 부르주아나 관료에 대한 봉감독의 혐오의 감정도 읽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봉감독은 반지하에 살고 있는 기택(송강호 분)네 가족, 방공호에 살고 있는 문광(이정은 분) 가족과 같은 하층민도 인간 기생충으로 보고 있을뿐만아니라, 이 하층민의 숙주역할을 하고 있는 고급주택의 소유자 박사장(이선균 분) 가족 역시 자본주의체제라는 더 큰 숙주에 기생하는 또 다른 의미의 인간 기생충으로 보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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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층민들을 굳이 이렇게 사생결단을 하고 살인도 불사하는 인간 기생충으로 비유한 의도는 여전히 모호하다. 생존 자체를 압박하는 벼랑 끝에 서서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훨씬 많지 않은가. 그런데 아무리 영화라지만 불우한 하층민을 인간 기생충으로 묘사하는 것도 모자라 서로 피튀기며 싸우게 하고, 상층민도 잔인하게 살해하게 만든 것은 아무리 이 영화가 희비극이라고는 해도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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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편,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가난한 이들의 고단한 삶을 그려온 영국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이다. 80세의 백전노장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이 영화로 2016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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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사건에서 시작하여 시종일관 사건 중심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습벽(習癖)은 한국영화의 고질이다. 그러나 노련한 켄 로치 감독은 사람에서 출발하여, 사람들의 관계 속에 사건이 조용히 배여 들고, 사회적 배경도 서서히 그러나 강한 인상을 주며 드러나는 방법을 채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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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가 보름달을 둥글게 노랗게 강렬하게 그려 내려는 유화의 한 기법이라면, 후자는 구름을 그려 자연스레 달을 드러내는 동양화의 홍운탁월(烘雲托月) 기법 정도에 해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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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심장병으로 일을 못하게 된 목수 다니엘(데이브 존스 분)은 막막한 생계를 이어가려면 질병수당 이든 실업수당이든 타야할 처지다. 하지만 수당신청을 위해 시청 직원과 2시간 가량을 입씨름을 해야할 만큼, 관공서의 너무나도 기계적이고 무사 안일한 행정처리 절차와 방식에 노령의 다니엘은 분노하고 절망한다.
그러다가 역시 구호대책 때문에 관공서를 찾은 가난한 싱글맘 케이티(헤일이 스콰이어 분) 가족을 만난다. 동병상련의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부녀지간처럼 지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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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시인 최승자의 시 <삼십세>가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최승자, 삼십세, 부분, 문학과 지성사,1989)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라는 싯구는 나이를 떠나 목하 59세 노인 다니엘이나 20대 후반 싱글맘 케이티에게 닥친 진퇴양난의 곤경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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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극의 천재화가 빈센트 반 고흐를 연상시키는 시인 최승자는 고작(?) 나이 서른 살을 맞으면서 왜 저렇게 비장했을까. 우울과 광기로 끝내 자살한 고흐와 달리 최승자 시인은 자신의 정신적 병고를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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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이 되는 런던 외곽의 소도시 뉴캐슬(New Castle)은 이들에게 이름과는 달리 결코 새로운 저택이나 성채가 아니다. 뉴캐슬은 삶에 지쳐 절망하는 두 사람을 더욱 옥죄는 봉건영주의 새로운 아지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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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영화는 인권이니 노동이니 소외니 관료주의니 하는 용어들을 영상으로 억지로 풀어내어 관객들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사건에 대한 장열한 묘사도 없다. 억지로 최루(催淚)를 재촉하지 않는데도 오히려 더욱 감동적인 역설을 켄 로치 감독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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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공서 담벼락에 페인트로 자신의 이름과 구호를 써놓고 1인 시위를 하는 다니엘의 모습이 오히려 쓴웃음이 나오며 코믹한 분위기까지 느껴지지만, 한편으로 다가오는 코끝이 찡해지는 진한 감동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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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나, 다니엘 블레이크>가 이처럼 재미와 감동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면, 빛과 어둠, 비, 계단, 냄새, 인디언 등 시종일관 과도한 상징을 동원하여 관객들을 가르치려는 듯 계몽주의적 태도를 고수하는 <기생충>은 재미는 있을지언정 감동은 없다.
(*하긴 이러한 요소들이 합쳐져 오히려 칸영화제 심사위원들에게 어필하여 황금종려상을 받게 된 측면도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도 봉감독은 영리한 감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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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고나면 가난한 이들의 불우한 일상을 위하여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반면 <기생충>은 영화를 보는 중간에도 혹은 다 보고난 뒤에도, "그래서 어쩌자는거지?"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한편의 킬링타임용 애니메이션을 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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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우리나라 감독이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손치더라도, 무조건적인 칭송만 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특히<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우리나라에 들어와 10만 관객을 넘기지 못했다. 같은 영화제에서 같은 상을 받은 <기생충>은 한국인 감독이 만들어 국위를 선양을 했다고하여 1천만 관객을 바라본다.

아무리 우리 영화계 저변이 두텁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많이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 <기생충>이 천만 관객을 넘겨서는 안된다는 나의 '역설적인' 주장을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국 영화를 사랑하는 나의 진의가 <기생충>에 대한 무조건적인 폄훼에 있지않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페이스북 동시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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