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전문가 시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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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신(lysn)등록 2019.06.30 14:29
지금은 전문가 시대, 하지만......
 
요즈음은 어떤 사회적 이슈가 생기면 온갖 매체에 이슈현안과 관련된 전문가들이 나와서 나와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쥐락펴락한다. 가히 전문가 시대다. 그들의 복잡하고 난해한 설명을 듣다보면 문외한인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 회피하고 싶어진다. 그래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전문가의 손에 권력을 쥐어주고 말았다.
 
오늘날 사회에는 온갖 분야의 전문가들이 넘친다. 나는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을 전문가에게 의존하고 있다. 육아전문가, 교육전문가, 음식전문가, 패션전문가, 금융전문가, 부동산전문가, 법률전문가 등등등..... 심지어는 아파트게시판에 친구사귀기 전문가를 홍보하는 게시물도 보았다.
 
그러다보니 전문가들이 나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나는 그들에게 종속된 하찮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래도 그들의 결정이 나를 비롯한 나와 관련된 대개의 사람들에게 유익한 영향과 결과를 보이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니 문제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들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 설정해야할 화급한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장면 '하나'
 
최근 전남영광 한빛원전에서의 잦은 사고들, 지진피해와 노후시설이 걱정되는 월성, 고리원전 등으로 원자력발전에 대한 일반의 우려가 크게 증가 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수력원자력발전을 비롯한 소위 원자력 전문가들은 원전의 안전성, 경제성과 불가피성을 들어 원전의 유지와 증설을 주장하고 있다.
 
원자력전문가들은 그들의 전문영역과 관련하여 직접적 이해 당사자이다. 그들은 그 일로 먹고산다. 그런 그들에게 그 분야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부여하고 공정성과 공익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에 충실할 것이고 그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론물리학자, 복잡계과학의 대부라고 불리우는 저명한 과학자 '제프리 웨스트'는 원전의 안전성 문제와 관련하여 국내에 번역된 그의 저서 '스케일'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P339)
 
"원자력 발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모든 원자력 발전소들이 가동되기 시작한 때부터 다 합쳐도 100명이 안되며, 그들 중 대부분은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사고 때 발생했다. 후쿠시마 사고 때에는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다. 반면에 그런 사고로 방사선에 노출되어 암에 걸려 죽거나 일찍 사망할 수도 있을 사람은 수천 명에 달한다. 체르노빌 사고 때 특히 그러했다. 하지만 그런 사례까지 고려한다면, 자동차사고로 해마다 다치거나 불구가 되거나 장애를 안고 살아갈 사람들이 5,000만 명으로 추정이 된다는 점도 이야기해야 '균형 잡힌'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서 그가 나름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균형 잡힌 생각이라고 언급한 부분에 대해 최소한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내게는 바로 그 지점에서 전문가의 한계와 오류가 보인다. 그의 말대로 자동차사고로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불구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러한 불행은 지속적으로 발생할 것이 거의 확실하게 예견된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를 사용할지에 대한 선택은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판단에 의존한다. 또한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효과적인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사자 이외에 타인은 그에 따른 양심이나 도덕적 가책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또한 국가는 교통사고의 피해를 최소화 하기위해 많은 사회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고 그에 따른 직간접 비용은 계량이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하다. 예를 들어 온갖 교통시설물, 도로, 의료시스템, 그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 국가기관 등을 비롯하여 자동차 생산에 있어서도 안전 확보비용이 최우선으로 고려된다.
 
원전에도 이런 정도의 전국민적관심과 국가, 사회적 비용이 투입 된다면 나는 원전전문가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겠다. 왜냐하면 그 정도면 원전사고가 그들 말대로 거의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발생한다 해도 그 피해를 극소화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지속해야 할 만큼 원전이 가치 있는 것일까?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일까?
 
게다가 원전은 잘못되면 인접지역 주민에게 피해가 집중될 수밖에 없다. 피폭 우려가 있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니까 그냥 무시해도 될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전으로부터 피폭위험이 있다고 인정되는 일정거리 이내의 거주자에 대해 인권침해 등 수많은 부작용에 불구하고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소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국가와 시민은 도덕적, 윤리적 가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걸까?
 
그 지역이 공동화 되어 직접적 이해관계자가 적어지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은 멀어지고 감시나 비판이 줄어들고 비밀의 영역이 증가하며, 마침내 그 영역에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직접적 종사자 외에는 알 수가 없게 된다.
 
견제와 비판에서 자유로운 일은 필연적으로 무관심과 부패로 귀결된다. 그로인해 위험은 현실화 될 때까지 은폐되기 십상이다. 그 과정에서의 근무태만, 비용절감 및 이익확대 유혹에 의한 사소한 매뉴얼 위반 따위는 쉽게 무시될 것이다. 더구나 그 주체가 이익을 제일의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라면 더 이상 논하는 것이 어리석다.
 
장면 '둘'
 
내 부모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30년 전 위암 수술 중 발생한 혈전에 의한 뇌경색이 원인이다. 뇌경색으로 말을 못했던 어머니는 의료진의 치료행위가 아닌 끝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고통스런 각종 검사 와중에 돌아가셨다. 당시 의료진은 치료를 위한 검사가 필요하다 했을 뿐 어머니가 감수해야할 고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나도 어머니의 고통을 알았지만 검사행위를 막지는 못했다. 결과의 문제이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훨씬 오래 사셨을 탠데. 최소한 고통스런 검사를 막았어야 했는데 하는 회한이 있다.
 
어머니의 고통스런 모습을 지켜보신 아버지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당신의 몸에 칼을 대지 말라고 수시로 말씀하셨다. 10여년을 홀로 사신 아버지도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의료진은 아버지의 목을 절개해서 호흡관을 삽입해야 한다고 내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의사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고 의사는 지금 하고자 하는 치료는 연명치료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버지에게는 파상적으로 제2, 제3의 경색이 오는 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나는 호흡관 삽입에 동의하지 않았다. 의사는 내게 힐난조로 말했다. 호흡관 시술을 하면 사실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그때의 의사의 표정과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가책으로 남았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나도 전문가인 의사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바람직한 역할과 행위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다만 의사와 내가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바탕에서 대화할 수 있었다면 내 죄의식이 조금은 가벼워 질 수 있었을 텐데.
 
장면 '셋'
 
요즈음 소위 지도자급이라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막강한 감투를 쓴 정치인들의 언행을 보고 아연실색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내게 있어서 정치란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는 당연히 아니고 이해상충 하는 각 당사자의 이익을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하는 보편적 상식과 도덕과 정의의 틀 안에서 부작용과 소외를 최소화하도록 조정해 주는 안목과 식견을 가진 고도의 전문가가 필요한 분야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좀처럼 정치에 나서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러다 보니 시정잡배를 찜쪄먹을 정도의 파렴치함을 아무런 부끄럼 없이 보여주곤 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으로 나서는 일이 다반사다. 정치행위가 시민 일반에게 즐겁고 유쾌하게 받아들여져도 모자랄 판에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현실이 암담하다. 자격미달의 사악한 자들이 가진 대표권은 매우 위험하다. 뭔가 판을 바꿀만한 인식의 전환이 절실한 시점이다. 꼭 필요한 전문가는 거의 없고 다중에게 해악을 끼치는, 전문가인지도 의심스러운 가짜가 만연해 있는 정치판이 심히 걱정이다.
 
차제에 저들에게 부여한 대표권을 일정부분 회수하여 직접민주주의를 좀 더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는 없을까? 현재의 과학기술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하는 듯한데.
 
전문가란 근본적으로 자기분야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함으로써 전문성을 극대화 하고 그로써 타에 기여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편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그들의 본분이다. 그들은 그 전문성으로 사회일반의 선택지를 넓혀주는 선에서 그 역할을 스스로 제한하거나 통제되어야 하며 이해 당사자들과 중재자들이 제대로 된 판단과 행위를 하도록 그들에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보조자, 조력자의 역할에 머물러야한다. 그들이 직접 결정하고 실행하는 당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은 그들의 전문영역과 관련하여 직접적 이해 당사자이다. 그들은 그 일로 먹고산다. 그런 그들에게 그 분야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부여하고서 공정성과 공익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전문가란 과거에 대한 학습을 바탕으로 하는 지식인 이다. 지금의 모든 이론과 학문은 선구자들이 걸어온 길을 바탕으로 사후적으로 성립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사고는 이론과 학문 즉, 과거에 갇혀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혁신적 사고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이다.
 
선구적이고 혁신적인 사고는 열정적이고 경우의 수를 고려하지 않은 과감한 어찌 보면 무식한 추진력과 결단력이 사회변화추이와 맞아떨어질 때 일반에 널리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경험이나 식견이 일천한 젊은이들을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이유이다.
 
전문가의 역할은 사회일반에 널리 유익한 일이 실현될 수 있도록 이론적, 논리적 바탕을 만들고 가능한 구체적 방법을 궁구하며 그 나아가는 방향에 대한 올바른 감시와 비판으로 본래의 목적에 부합하는 결과에 이르도록 하는데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져야한다. 특정 권력이나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복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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