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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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신(lysn)등록 2019.08.18 13:56
신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말할 때 "그 사람은 신념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하면 대개의 경우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구나 하고 이해한다. 이와 같이 신념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긍정적 느낌을 준다.
신념에는 "굳게 믿어 변하지 않는 생각, 사람의 가치관에 의하여 나타나는 믿음의 형태, 어떤 사상이나 생각을 굳게 믿으며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라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신념을 갖고 산다. 분명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지만 누구나 막연하게라도 신념을 가지고 산다. 신념은 곧 삶의 좌표이기 때문이다.
 
길에 일만원권 지폐가 떨어져 있다. 주워가는 사람도 있고,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도 있다. 두 부류 모두 자기의 신념대로 행동한 것이다. 내키는 대로 행하는 것도 신념이요 사회관습대로 행하는 것도 신념이다.
 
하지만 신념에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 목적은 보편적 가치에 가능한 합치되어야 하며 배치되는 다른 신념에 열려있어야 한다.
 
개인은 자기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생활하고 사회, 국가에서는 서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한 다양한 신념이 모여 용광로처럼 끓어 서로 섞이고 조정되면서 일정한 흐름을 형성하고 그 흐름의 방향성을 가지고 격렬하게 대립하고 협의하고 조정함으로써 극단을 배제하고 보편성을 갖게 된다.
 
그렇게 정제된 신념은 강력한 추진력을 갖는다. 국가사회에 공유된 신념이라면 말할 나위가 없다. 때때로 가공스럽기까지 하다. 우리사회나 구성원들이 신념 없이 행동한다면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맬 것이다. 신념은 곧 일관된 가치체계로서 공공 시스템과 질서의 기본을 이룬다.
 
하지만 몇몇의 목소리 큰 무리에 의해 발언이 과점되거나 왜곡되면 과거 군국주의나 제국주의, 독재체제처럼 많은 사람에게 고통이 된다. 따라서 특히 국가나 민족, 종교 등 큰 규모의 무리에서는 다양한 신념의 용광로가 상시적으로 작동해야 하며 계속적으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모든 신념들이 모자이크의 한 부분으로써 우리의 통일된 신념체계를 구성해야한다. 또한 모자이크의 내용과 모습은 끊임없이 현실을 반영하여 변화해야 한다. 어느 한 시점에 고착하면 절대로 안된다.
 
그러면 우리가 신념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우리는 유전적으로 어떤 재능을 갖고 있던지 불구하고 유년기의 백지상태에서 후천적 생활환경에 의해 신념을 갖게 된다. 나는 아이가 신념을 갖고 태어났다는 예를 듣거나 본적이 없다.
 
신념은 살아가면서 축적되는 온갖 경험과 지식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말인즉 신념을 형성하는 매카니즘은 열린계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신념을 마치 변할 수 없는 어떤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신념이란 오랜 과정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쉽게 변할 수는 없겠지만 외부로부터의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 근거가 제시될 때에는 즉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열린 자세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개인에게 신념의 바탕이 되는 경험이나 지식은 어떻게 형성될까?
 
우리는 모두 본인의 의지가 개입될 수 없는 환경에서 태어난다. 나는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나라를 선택할 수 없고, 시기를 선택할 수 없이 무방비로 태어났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야말로 인과 없이 뚝 떨어진 존재다. 그 상태에서 주변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고 그 절대적 영향하에 지식, 경험, 인격과 능력이 형성되고 사회적 위치가 결정된다. 그 과정에서 신념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신념은 성장배경에 의해 크게 영향 받기 때문에 성장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성장환경이 다른 사람은 신념의 내용과 질이 다르다.
 
예를 들어 종교적 신념에는 다양한 분야가 있다. 유신론과 무신론으로만 좁혀서 본다 해도 대개의 경우 성장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옳거나 그르지 않다. 그러므로 나의 신념을 타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다양한 각각의 신념이 사회, 국가 안에서, 넓게는 전 지구적으로 타협하고 조정되며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해서 이루어 낸 결과는 우리에게 희망이다.
 
채식주의 신념, 종교적 신념, 국가적 신념, 민족적 신념, 자연에 대한 신념, 환경에 대한 신념, 학문적 신념, 도덕적 신념, 윤리적 신념, 정의에 관한 신념, 정치적 신념, 등등
 
위에 열거한 많은 신념은 그 자체로는 가치중립적이지만 각각의 신념 안에는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을 텐데 그 판단기준은 무얼까?
 
지금의 판단이 과거에도 옳았고 앞으로도 옳을까? 개별적으로는 옳아도 서로 상충될 수도 있다. 이렇게 신념은 그 가치판단에 있어 처한 시기,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많은 요소가 있다. 한마디로 절대적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념이 고착화 돼서 경직되는 순간 옳은 신념, 그른 신념은 구분되지 않는다. 고착되고 경직 된 신념은 상대에 대해 폭력적이 되며 타협의 여지를 상실케 한다. 그 무엇이든 원리주의, 근본주의가 매우 위험한 이유다.
 
신념의 다른 얼굴이 아집이고 독선이며 편견이다.
 
건강한 사람은 주변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반응하여 항상 자신의 신념을 새롭게 인식하며 그에 따라 삶의 좌표를 끊임없이 수정해 간다. 그렇게 공존의 바탕을 업그레이드 시킨다.
 
나는 농부다. 나의 신념은 "자연은 노력한 만큼 돌려준다."이다. 한마디로 노력하지 않고 성과를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풀을 뽑고, 수확에 용이하게 나뭇가지를 정리하고 성장을 억제하며 벌레나 짐승이 먹지 못하도록 살충제를 뿌리고 덫을 놓는다. 이런 나는 인간의 윤리기준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다. 이러한 신념과 행위는 바람직한 행위로 권장되고 존중된다.
 
하지만 요즘은 나의 행위가, 나의 신념이 정말 옳은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생태서클의 일부인 내가 혹 생태서클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나기도 한다.
 
나의 신념이 닫혀 있다면 나는 생태론자, 환경론자들과 끝없이 반목하게 될 것이다. 반목에서 끝나지 않고 어리석게도 내 삶의 바탕을 스스로 파괴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생존과 생태서클 사이 어딘가에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나의 신념이 다른 사람의 신념과 충돌할 때 강자에 의해 무시될 수도 있고, 상대의 신념에 동조할 수도 있으며, 상대가 내 신념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는 강자에 의해 강제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에 의해 타율적으로 강제될 때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신념 등이 혹시 타에 대해서 배타성을 가지고 닫혀 있거나 경직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성찰해 볼 일이다.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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