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주체는 이미 지금 여기에 있고, 충분히 강하다.

[조국 사태, 난 이렇게 본다] 젊은 세대를 타자화하는 젊은 세대 옹호론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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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완(hanulnamoo)등록 2019.09.11 09:53
[386세대는 그들의 문제가 있었고, 2019년 세대는 그들만의 문제가 있다. 젊음은 각 세대에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도전과 투쟁에서 빛난다. 그들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마치 386이 그것을 대신해야 한다는 듯한 언설은 그들을 타자화하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 386은 그들의 문제의식과 질문을, 젊은 세대는 그들의 문제와 항변을 가지고, 각각의 주체로서 대화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당당한 주체이고 충분히 명민하다.]
 
'한 시대는 끝났다'는 비장한 선언은 진보 일각의 시대착오적 지체현상에 대한 늦은 고백으로 보인다. 한 시대는 이미 끝났고, 지금은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는 한 가운데에 있다. 87체제는 군사독재권력으로부터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공화정의 회복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대선에서의 실패로 구정권이 권력을 유지한 채로 형식적 공화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김대중, 노무현정부의 시기를 거치면서 형식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되는 듯 하였지만, 국가권력을 축재의 수단으로 삼았던 이명박정권이나 봉건적 퇴행을 거듭한 박근혜 정권의 헌법유린으로 그것의 취약성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그 시대정신을 채득한 세대들의 촛불항쟁을 통해 공화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선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성취해 냄으로써 87년 체제는 완결된다. 이는 민주화를 위해 온몸을 던져 87체제를 일구어 낸 진보의 빛나는 업적이다. 2017년 5월 9일. 그렇게 87세대의 진보는 소임을 다하고, '한 시대는 끝났다.' (1987-2017까지 한 세대의 87체제의 완결에 대해서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27794,에서 언급한 바 있다.)
87세대의 성과는 정치적/형식적 민주화에 국한되고, 경제적 민주화에서 퇴행하는 현상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는 새로운 시대가 당면한 시급한 과제임에 분명하다. 진단에는 이견이 없으나, 처방이 극명하게 갈라지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대단히 무리하여 간략히 요약하면, 이는 문명사적 현실인식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정치적 전선(독재)이나 계급적 전선(자본)이 단일하고 선명하게 나타나지 않는 시대이며,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의 갈등이 중층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적 혼란이 야기하는 당혹감이 우석훈의 문제의식에서 읽혀진다. 87체제 혹은 그 이전의 진보의 투쟁에서는,
 
"그 속에서 최소한 '구체제' 혹은 기득권에 대한 공격이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변화를 희망하는 세력이 더 커진다는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 시절의 20대가 50대가 되는 동안, 새로운 청년들은 그래도 보수 쪽은 아니었다. 막연하게나마, 지금까지는 그랬다."
 
청년은 진보적이고, 장년과 가진자들은 보수적이 되어가는 단순한 구조는 허물어져 가고 있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는 격변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총체성을 발휘하는 노동에서 기계와 경쟁하고, 어쩌면 기계를 상사로 두어야 하는 첫 유기체가 될 것이다. 확실하고 급격한 일자리의 상실과 불확실하고 희망 섞인 미래의 새로운 일자리 사이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구직시장에서 과도한 스펙이 공작의 날개와 같이 거추장스럽게 된지도 오래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대의 화살을 보지 못하면, 다수의 청년층은 모든 관심사를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하고 만다. 그리고 특별한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이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적 누에고치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한다. (때문에 세대 간에 보다 적극적인 대화와 논쟁의 장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편 세계체제의 경쟁과 재편과정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계급도 국적을 달고, 국가간의 계급이 대립하는 현 상황에서, 양대패권의 힘겨루기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체력을 강화해야 하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남북의 체력을 합치는 것이다. 이것을 '민족'이나 '민중'의 구시대 이념의 잣대로만 재단한다면, 역시 시대착오적 퇴행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에 미래를 책임 질 역사의 주체들은 소멸하여 가는가?
전통적 진보의 계급적 혹은 민족적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그렇다. 지금의 청년세대는 이전의 세대와 분명히 다르다.
그들은 소위 '조국사태'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통계에 의하면, 초기 언론의 집중포화가 쏟아지던 때를 제외하면, 젊은 층의 조국 찬반은 비교적 균형을 맞추고 있었으며, 임명 이후에는 찬성이 높은 쪽으로 나타나고 있다. (리얼미터, 9월 10일).
우석훈의 문제의식과 10대들에 대한 걱정은 분명 조국을 지지하는 젊은 세대에 대한 염려로 보인다.
 
"지금 불만이 있는 20대~30대는 그래도 대학교에서 집회도 하고, 나름 매스미디어에서 목소리도 경청한다."
 
따라서 불만을 표출하는 극히 소수의 20-30대의 대학생들만이 주체성을 지닌 젊은 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먼저 젊은세대를 대학에 다니는 20-30대와 그렇지 않은 10대로 구분하는 것조차 구진보의 좌표가 낙후한 것임을 방증한다. 현재 그 경계는 모호하고 청년들의 매체는 동일하며, 그들에게 기존의 TV, 신문 등의 구매체나 출판물이 주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웬만하면 오프라인에 자신들의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다.
집회는 더욱 어렵다. 자신들을 대표하는 학생회장 선거도 무산되기 일쑤다.
관악과 안암에 모인 대학생들이란, 여전히 구체제의 동인이 오프라인에서 작용하는 종교적 혹은 특정 정치적 집단들과 그 주변인들이 다수이다. (마치 청년의 집회를 비하한다는 것으로 오독하지 말기를 바란다. 더 많은 청년들이 자유롭게 항의하고 발언하기를 바란다. 참고로, 김상봉 교수의 주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908859.html)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소위 '조국사태'의 시국에 스카이 학부의 학생들이 모여서 항의하는 모습이 젊은 세대의 긍정적인 의사표시의 모습으로 보였다면, 사실 이런 글로 대화를 할 가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 젊은 세대들은 집회, 언론을 통해 자신들을 표현하지 않으며, 대체로 매우 걱정스러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지금 10대 이상의 젊은 세대는 sns를 중심으로 '자기'만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가장 수구적인 '일베'에서 가장 진보적인 '페미'까지 모두 그들의 '자기'그룹을 중심으로 소통할 뿐, 타자의 상태에 큰 관심조차 없는게 현실이다. 대화와 논쟁은 타자의 인격성을 배제한 사이버 공간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공격과 방어'의 전선이 명확했던 한 시대는 오래 전에 소멸하였다. 이젠 누구도 상대를 보지 않으면서, 자신을 주장하고, 어떤 주장에 동의하거나, 그에 반대되는 주장을 비난한다. 담론과 논쟁의 구체적인 주체와 대상들이 증발한 것이다. 따라서 주장은 허무하고, 공격은 공허하다.
그러나 물리적 세계의 경직성이 없는 사이버공간 상에서 흐름은 대단히 휴발성이 강하고, 때론 이 순간적인 흐름이 집중하여 폭발성을 띠기도 한다.
 
바로 그런 때가 허무하고 공허한 대상이 구체성을 띠는 순간이다.
촛불정국이 그랬던 것처럼, '조국사태'에서도 강한 휴발성은 폭발력을 발휘하였다.
물론 조국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의 등장으로 인해 사이버 공간을 떠돌던 에너지가 분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를 통해 분출한 주체적 청년세대의 의견은 무엇이었는가?
우석훈의 좌절은 아마도 이 청년세대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강남좌파' 조국에 대한 저항에 집중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상당한 젊은이들이 자발적으로 혹은 일방적인 구언론의 집중포화에 편승하여 조국 때리기 대열에 합류한 반면, 그 이상의 젊은이들이 조국에 대한 '마녀사냥'을 막아내는데 엄청난 열정과 능력을 보여주었다. 조국 수호에 나선 젊은세대가 어쩌면 계급의 이익에 반해 보수화한 젊은 세대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조국 때리기에 나선 젊은이들이야말로 스카이를 중심으로 하여 계급이익을 수호하거나, 계급이익을 배신한 젊은 세대임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 대단히 열성적이고 주체적인 젊은 세대는 '강남좌파'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였는가? 그리고 구진보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은 왜 절망적으로 느껴지는가?
이는 구진보의 근대성에서 비롯된다. 세계를 설명하는 확실하고 단순하며 변하지 않는 기준이 존재한다는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그 기준에 의하면, 현정권은 부르조아 정부로서 강남좌파라는 신흥 자본계급의 지배체제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조국은 현정권의 이데올르그이며, 조국의 계급적 실존은 그의 한계가 된다.
이러한 인식의 지반 위에서 우석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 정권은 사회적 격차와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 뭔가 해소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다. 하려고 했는데 못 한 것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하는 척만 하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그 구체적인 결정의 메카니즘을 알기는 어렵다. 어쨌든 결과는 같다."
 
우선 이러한 현실인식과 평가는 경제학자로서는 대단히 무책임한 발언으로 보인다. 먼저, 그는 3층위의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를 하나로 섞어 버린다. 그는 1) 현 정부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의지가 없다. 2)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능력이 안된다). 3) 하는 척만 한다 (정치적 이익을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는 3가지 가능성을 언급하고, "어쨌든 결과는 같다"라고 평가한다. 각각의 경우에 정부에 대한 평가와 시민주체들의 역량을 어디로 집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전혀 다른 해법이 제시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룬다.)
문제는 앞에서의 평가, 즉 "결과는 같다"는 인식이 도달하는 귀결에 있다.
우석훈은 "격차 해소, 불평등 완화, 그런 건 '당위성'이지만 그런 정도의 당위성은 MB도 얘기했고, 박근혜도 얘기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구좌파의 지적오만과 독선적인 선민의식이 드러난다. 작은 노력과 작은 발걸음, 이름없는 사람들의 작은 성취들은 모두 무시된다. 근본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순혈주의적 진보성의 주장은 나와 나의 수준이 되는 극소수만이 진리를 획득한 선민이고, 다른 모든 이들은 거짓, 위선, 개량, 유약, 무지한 자들이라는 배타성을 띠게 된다.
결과적으로 '다들 똑같다'
나라를 판 자와, 그 댓가로 권세를 누린 자와, 그 나라에서 영달을 꾀한 자와, 옹색한 자기 자리를 지킨 자와, 적당히 오간 자들과, 독립된 국가를 가끔 꿈꾸고 잊어버린 자와, 사업을 통해 번 돈으로 찔끔 독립자금을 댄 자와, 사재를 다 털어 독립운동을 한 자와, 목숨을 내어 놓은 자들 가운데에서도, 올바른 이념으로 독립된 나라의 미래를 설계한 바로 나의 결사체만이 바른 미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바로 이런 독립운동가들의 이념투쟁으로 같은 독립운동가의 총탄에 허망하게 죽어간 독립운동가들이 한 둘이 아니다.
요컨대, 우석훈의 서운함은
"조국에 들인 관심의 1/10만이라도 사회적 격차, 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교육 부조리에 썼더라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 지적은 틀렸다.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한 달 동안 컴앞에 매달렸던 바로 그 사람들이, 지하철 비정규직의 죽음에 항의하고, 삼성사옥 앞 철탑에서의 시위에 가슴 아파하고, 이재용의 구속을 외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주장하고, 그렇게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지난 한 달 조국에 집중하였던 절박함은 구진보와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더 계급적이고 더 집단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오히려 전태일이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절박한 심정이라고 할까. 구진보의 화려한 학벌과 언변과 선명함으로 나를 주눅들게 하는 것보다, 비록 다른 계급이고 인종이라 하더라도 나를 도와줄 동지를 찾는 간절함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념적 가치보다도 사람을 잃지 않으려는 절박함이다.
모든 권력기관과 언론과 소위 진보의 이데올르그까지 가세하여 집중포화를 쏟아 붓는 그런 시간에는, '저 사람은 지켜줘야겠다'는 지극히 나이브한 인간주의이다. 이렇게 전혀 다른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경멸을 보냈던 이들이라면, 이들에게 1/10만의 관심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그 훨씬 이상의 관심을 보내주고 있었다.
우석훈은
"이미 계급 사회를 넘어 완성형 세습 자본주의로 굳어가는 이 시스템을 흔들어야 한다."고 한다.
맞다.
그러나 어떻게?
바로 그 지점에서 구좌파는, 세습자본주의의 계급사회에 계급이해를 배반하고, 사회주의를 이념의 한 축으로 놓겠다고 등장한 조국을 비난하지 않았는가?
오히려 이 시스템의 지배계층은 조국으로 대표되는 이 지진에 경기를 일으키고 있는데, 당신들은 멸시의 눈길을 보내고 있지 않았는가?
조국과 이재명으로 대표되는 양 계층의 개혁가들조차 품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말한대로, 한 시대는 끝났고, 이미 새로운 시대는 도래하였다.
이 새로운 시대의 주체는 87체제의 주체들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형체가 없어서 보이지 않지만,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들은 서로 만난 적도, 얼굴도 모를 수 있지만, 강하게 연대한다. 그들은 소소하지만 재미있게, 그리고 자신의 제한되지만 전문적인 지식으로 전체에 기여한다.
지난 한 달, 구체제의 공권력과 언론, 소위 지식인들이 전면적인 공세를 퍼부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주체들은 단지 어느 집의 골방에 앉아서, 사이버 공간의 정보로 통신하는 기술세대의 무수한 노드(nod)가 되어, 한 국가체제의 총력전을 막아내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일대사건을 성취하였다. 공권력이 한 사람을 타깃으로 한 가족, 특히 딸 자식의 모든 생활기록을 털고 있을 때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노모의 자택을 압수수색하였다는 속보가 뜬다. 이게 자본가의 어머니에게 향하기 때문에 정의롭고 정당화되는 공권력인가?) 수많은, 다양한 거짓정보를 구체제와 구언론이 일치하여 확대재생산하고, 구지식인은 자신들의 우월의식으로 충만할 때, 새로운 세대의 무명의 주체들은 모든 '의혹'의 거짓을 하나씩 밝혀냈고, 전지구적인 정보통신의 망을 누비면서, 의혹의 배경을 탐색하고, 의혹 제기자들의 위선적 혹은 패륜적인 모습들을 드러내었다.
눈이 있는 자라야 볼 수 있겠지만, 바로 그들이 지금 새롭게 열리고 있는 세대의 주체들이다.
무수한 sns의 교차점들을 연결하는 '노드(nods)'들, 바로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언론과 지식사회를 대신할 것이다. 이미 구체제 지식인들이 붙여 준 '다중지성' 혹은 '집단지성'이라는 좋은 이름도 있다.
그래서 답한다면,
한 시대는 이미 끝났다. 촛불혁명의 결과, 대통령을 탄핵하고 공화국의 대표를 새롭게 선출한 2017년 5월 9일에.
그리고 새로운 주체는 이미 기득권 권력의 총량을 막아 낼 만큼 그렇게 성장하여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이 새로운 시대의 주체들은 나이로 세대를 구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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