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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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신(lysn)등록 2019.10.04 10:06
살만한 세상
 
 
세상 모든 곳에는 일출과 일몰이 있다. 내가 사는 가파른 산골짝에는 유난히도 늦고 빠르다. 오늘처럼 비라도 올라치면 저녁은 성큼 더 빨라져 청회색 골안개에 휩싸인 산봉우리가 언뜻언뜻하다. 골을 따라 가물가물 끊길 듯 띠처럼 이어진 인적 드문 한가로운 길로 반가운 사람이 와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혼자라도 좋다.
 
와!!! 반갑습니다. 잘 지냈죠? 환영합니다. 그리곤 서로를 꼭 안아준다. 여기엔 어떤 불편한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 누구도 스스럼이 없다. 이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깊게 이해하며 진정으로 위로받는다.
 
우리 집에는 수시로 많은 사람이 오간다. 오는 사람은 까치처럼 참 좋은 바깥소식을 가져 오기도 하고 떠나는 사람은 서로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하고 작별한다. 하지만 막연한 약속일뿐 구체적 약속은 하나도 없다. 변화하는 상황에 서로가 능동적이며 깊이 이해하기에 약속에 구애됨이 크지 않다. 오며가며 서로 보고 싶을 때, 또는 내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게 온다. 서로에게 구체적 고마움의 표현 없이도 그저 이심전심 눈빛으로 느끼고 말투로 느끼며 표정으로 확인한다. 그리고 진정 마음으로부터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있음을 누구나 안다. 그게 구체적이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있으며 부정확하다고 이때까지 아무도 불편해 하지 않았다. 이런 세상도 있다.
 
그런 그들은 들꽃처럼 잡초처럼 어디에도 구애됨 없이 살아간다. 외부에서 그런 삶을 보는 사람은 한 없이 자유로운 삶이라 칭송하기도 하고 동경하기도 하고 때론 무책임하고 무계획하며 뿌리 없는 불안한 삶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실재 그들의 삶은 자유롭고 가치 지향적 삶이기는 하지만 세상의 선입견으로 인해 고달프고 괴로운 삶이기도 하다. 다만 그들은 그리 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리할 뿐이다. 그들에게 거창한 어떤 의미나 가치를 물을 수 없다. 그렇게 그들은 산다.
 
세월호참사가 일어났을 때 어떤 젊은 여자 분은 그 엄혹한 시절에 스스로 피켓을 만들어 광화문광장에서 눈물바람으로 몇날며칠을 기약도 없이 일인시위를 했다. 그 분은 시위도중 가치가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온갖 험한 말로 위협을 당해서 한 없이 무섭기도 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그리 했다고 한다. 그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일인시위를 하느라 그 무겁고 거북한 피켓을 손에 들고 목에 걸고 나왔다. 나는 그 앞에서 한없이 왜소해지고 부끄러웠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주변에는 제법 많다. 다만 그들 스스로 드러나길 원치 않을 뿐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마음에 사랑이 가득해서 세상의 온갖 아픔에 마음이 너덜너덜, 헤진 사람이 있다. 그는 아픈 세상 어디에도 있다. 그는 아픔을 온몸, 온 마음으로 느끼지만 그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다. 왜 그러냐고 묻지 말라. 그게 그 사람이니까. 자기희생적이니 숭고하니 하는 찬사는 오히려 모욕인 그런 사람이 있다.
 
온갖 개발행위로 산산이 부셔진, 황폐해진 산하를 끌어안고 진정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그 산하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들의 아픔을 비이성적, 비과학적이라 말하지 말라. 그들에게는 생생한 현실이고 극복하기 힘든 나락이니까. 그들은 죽어가는 대지와 수풀의 아픔과 외침을 생생하게 듣고 그들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는 사람이니까.
 
우리 동네엔 오래된 나무가 많다. 그는 육백년이나 살아온 나무를 한참이나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리곤 나무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무슨 얘기를 했냐고. 그렇게 세상의 모든 사물과 대화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존중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산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하는 의문은 너무 어리석다. 사람은 모름지기 그렇게 대우하고 받아야 한다.
 
나는 세상을 정복했다고 하는 인간들에 관한 위인전을 극히 혐오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권력을 위한 잔혹한 살인의 미화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들이 인류사에 기여한 바가 무엇인가? 기껏해야 강제적 문화교류 말고 무엇이 있나? 그들에게 위대한 영웅이니 하는 찬사는 역겹다.
 
하지만 패스탈로찌나 마더 테래사 같은 사람들은 우리를 한 없이 부끄럽게 한다. 그들은 거창한 철학이나 이념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고 생각을 실천할 뿐이다. 묵묵한 실천이 주는 진한 여운이 있는 감동을 귀한 선물로 우리는 받는다.
 
그들과 같은 삶은 요즘 세상에서는 매우 비현실적 고통의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우리들의 가슴속에도 그와 같은 열망이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 대개의 가슴에는 정의와 도덕률이 살아있다. 그것은 누구에 의해 주입되거나 말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DNA에 새겨져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각성하기만 하면 된다.
 
어느 땐가 TV에 기업이미지 광고가 있었는데 그 기업 본래의 이미지와는 달리 아주 이상적 기업이미지를 대중에게 세뇌시키는 목적이 눈에 띠는 그런 노골적 광고가 있었다. 광고내용은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가치관과 생활관을 유도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광고주에 대한 선입견이 없었다면 한편의 아주 좋은 공익광고로 봐줄만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업이미지를 세탁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읽혔고 위선적이라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비판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가치가 옳다고 광고에 도입한 것은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가치에 부합한다. 따라서 부도덕한 그 기업도 무엇이 옳은 가치인지는 알고 있다는 것이고 광고에 노출된 일반 대중에게 올바른 가치에 대한 공유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배에 실린 카나리아처럼 고통에 예민한 사람은 그들의 선험적 예지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그들은 광야에서 고통스럽게 외치지만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들릴 뿐이다. 우리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깊게 공감하며 넓게 공유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되면 우리가 바라는 좋은 세상이 더 빨리 열릴 텐데.
 
세상은 온통 부조리 하고 부정의와 부도덕이 난무하지만 긴 흐름에서 보면 미약하나마 조금씩이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그 이유가 무얼까? 출중한 정치가, 사상가, 학자 등 명망가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있는 듯 없는 듯 대중에 묻혀있는 위에 열거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그들로 인해 세상은 온기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로 인해 세상은 좀 더 살만해 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힘이다. 깨어있는 대중의 역할이 어떠한가를 우리는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귀중한 경험을 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긍정적으로 전망하고 인간다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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