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필 무렵>, 일곱 빛깔 코드를 두루치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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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ahurum)등록 2019.11.27 16:45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극본: 임상춘, 연출: 차영훈, 강민경)이 끝났다. 시청자들의 가슴 속에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해놓고서는 자신은 동백이 송아리째 뚝뚝 떨구듯 그리 져버렸다. 드라마의 기적은 현실로 이어졌다. 어느덧 드라마 황무지로 전락한 KBS에서 시청률 20% 고지를 넘어서는 기적을 이루었다. 그도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웰메이드 드라마로.
시청률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은 비결의 핵심은 일곱 가지 코드 - 고독/불안과 인정, 타자와 공감, 선악, 사랑, 그리운 공동체, 미스터리와 스릴, 나만의 행복 - 를 극중 동백처럼 두루치기했기 때문이다. 그 중 서너 개만으로도 두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데, 욕심이 많은 작가는 일곱 빛깔의 코드들을 두루두루 버무려 달달한 대사로 달달 볶았다. 연기 또한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일품이었다. 더구나, 그 일곱 빛깔 코드 모두 필자가 추구하는 진보적 가치나 메시지와 통하니 필자는 동백에게 직진하는 용식이처럼 미치고 환장하여 이 작품을 향해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의 저서인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이하 '원맑'로 약함)를 그대로 예술로 전환하면 이 드라마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1. 고독/불안과 인정: "나를 걱정하는 사람 하나가 막 세상을 바꿔요"
 
이 드라마의 첫째 코드는 '고독/불안과 인정'이다.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모두 고독하고 불안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인정투쟁을 한다. 동백(공효진)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도, 대접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엄마로부터도 버림 받은 고아이자 미혼모에다가 술집사장이다. 옹산 사람들로부터 추방당하고 까불이로부터 살해될지도 모르고 아들 필구(김강훈)를 잘못 키울 지도 모를 불안에 떨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며 사는 것이 꿈이다. 엄마로부터 떨어지거나 엄마가 남들로부터 멸시당하는 것이 불안한 필구는 엄마를 비난하는 사람이나 그들의 자식과 다투는 싸움꾼이 된다.
노규태(오정세)는 지역 유지로 차기군수까지 열망하며 허세를 부리지만, 그러는 것 자체가 아내와 마을 사람은 물론 옹산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인 동백으로부터도 서비스 땅콩 안주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안과 고독에서 비롯된다. 최향미(손담비)는 동생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지만 동생으로부터도 배신당하고 남들에게 완전히 잊히는 것을 불안해한다. 정숙(이정은)은 가정폭력을 피해 가출했지만 자식을 더 이상 굶기지 않으려 고아원에 맡겼다가 잃고는 늘 그 주변을 떠돌다가 딸 곁으로 돌아온 후엔 딸조차 모르게 홀로 병마와 싸우며 까불이로부터 딸을 지켜내고 엄마답게 살기를 바란다. 강종렬(김지석)은 스타 야구 선수이고 부부 관찰예능에 출연하지만, 실은 별거 중인 쇼 윈도우 부부이고 아내로부터 제대로 남편 대접을 받지 못하며, 첫사랑 동백으로부터도, 아들 필구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 제시카(지이수)는 아버지로부터 무시당하고 자란 데 더하여 스타 야구선수의 빨대라는 식의 악플을 받자 '좋아요' 개수에 늘 불안해하면서 '관종'이 된다. 무엇보다도 흥식(이규성)은 남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심한 불안과 열등감을 느끼고 그에 대한 반발로 사람을 죽인다. 이 또한 자기 방식의 인정투쟁인 것이다.
"우리는 왜 고독하고 불안한가? 영원과 지속을 열망하지만 언제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고, 완성을 지향하지만 한계와 결핍으로 가득하고, 이상과 행복을 추구하지만 늘 그에 이르지 못하여 현실과 괴리에 고통스러워하고, 무한히 욕망하지만 다가갈수록 늘 그것이 신기루임을 깨우쳐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믿음와 우애를 유지하며 인정받고 싶지만 너무도 쉽게 무시와 상처를 주고받고,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열망하지만 늘 기대치에 못 미쳐서 괴롭고 불안하고, 거룩함을 좇지만 돌아보면 한없이 천박하고, 과거를 후회하며 더 나은 미래를 바라지만 시간에 전혀 개입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고독하고 불안하다. … 무엇보다도 욕망을 부추기고 인간성을 타락시키고 공동체를 해체하며 효율성을 추구하며 과도한 목표를 요구하고 삶의 속도가 빨라지고 위험이 일상이 된 현대사회가 고독과 불안을 증대시킨다."('원맑' 3장) 이 지독한 고독과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세계에 던져진 단독자로서 유한성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며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는 주체로서 실존하는 것과 타인과 굳게 연대하는 것이다.
말꼬리까지 흐릴 정도로 소심했던 동백은 황용식(강하늘)의 사랑과 인정을 통하여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다. "내 걱정 해 주는 사람 하나가 막 세상을 바꿔요."라고 말하며, 고독과 불안을 극복하고 당당하게 아들의 야구경기에 참여하고 향미를 괴롭히는 김낙호(허동원)를 패주고 살인범까지 때려잡는다. 필구는 야구선수로 성공하며, 규태는 아내의 인정을 받고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종렬은 아내를 품어주는 가장으로 변하고, 제시카도 SNS도 끊고 자신의 행복을 좇는다. 물론, 흥식처럼 각성하지 못한 채 실패하는 인간 군상도 보여준다. 이처럼 <동백꽃 필 무렵>은 고독하고 불안한 인간들이 인정투쟁과 타인과 연대를 통하여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잘 형상화한 철학 서사다.

2. 타자와 공감: 우리가 돌을 던진 저 여인이 바로 부처다
 
이 드라마의 둘째 코드는 '타자의 배제와 눈부처-차이를 통한 연대'다. 가상의 지방도시인 옹산에 한 여인이 와서 '까멜리아'라는 술집을 차렸다. 알고 보니, 그는 미혼모에 고아다. 이보다 더 미운 것은 예쁜데다가 착하기까지 한 동백이 자신의 남자들을 빼앗을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까멜리아는 망하기는커녕 남자들로 늘 가득하다. 아들 필구가 "나 빼고 세상 사람들이 다 엄마를 싫어하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동백 스스로 "정말 죽어라 열심히 사는 거밖에 안하는데, 왜 근데 왜 맨날 제 탓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정도도 옹산사람들로부터 배제의 거센 핍박을 받는다.
"이성과 보통교육이 보편화한 20세기에 왜 대량학살이 끊이지 않는가. 한나 아렌트는 악마인 줄 알았는데 실은 평범한 사람인 아이히만이 '순전한 생각없음' 상태에 빠져 학살을 주도하였다는 '평범한 악'을, 스탠리 밀그램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을 학살하는 군인처럼 '권위에 대한 복종'을 원인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백인 어린이는 때리지도 못하는 신부가 마야족이나 잉카족 어린이는 별 죄책감이 없이 학살하였으며, 대량학살 이전에 그들을 타자화하는 혐오발언(hate speech)이 선행한다. 편견, 이데올로기, 종교 등으로 동일성을 구성하여 이에 부합하지 않는 특정 집단을 타자로 만들어 배제하는 것이 대량학살의 근본원인이다. 상대가 아무리 선하고 귀한 자라 하더라도 타자로 배제하면 언제든 '죽여도 되는 자'로 전환한다."('원맑', 2장)
어디 다른 데 갈 곳도 없는 동백은 6년 동안이나 힘들게 배제의 소외와 핍박을 견디지만 최선을 다해도 안 되니 더욱 절망한다. 아들 필구가 이를 알고 일이 생길 때마다 달려와서 엄마를 지킨다. 그런 동백을 타자에서 '우리'로 바뀌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쿠란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고 성경에서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읽고 이슬라엘 병사와 팔레스타인 게릴라가 포옹하듯,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 맺힌 내 모습인 눈부처를 바라보며 공감에서 비롯된 차이로 동일성을 해체하고 연대하는 것이다."(2장) 회장 박덕순(고두심)은 동백에게서 남편을 잃고 아들을 혼자 키운 자신을 발견하고 후견인을 자처한다. 동백에게 상처를 주었던 옹산의 아줌마들과 홍자영(염혜란)은 불륜에 대한 의심을 풀고서는 동백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고는 동생으로 받아들이고 뒷배가 된다. 시청자들 또한 잠시나마 동백의 적으로 싫어했던 정숙, 종렬, 향미, 제시카에게서 눈부처를 발견하고 포용한다.
이로 이 드라마는 미혼모, 술집 작부, 고아, 더 나아가 이주민, 동성애자 등 우리가 타자로 배제하여 여러 폭력을 가하였던 이들이 실은 선한 이웃이니 포용하고 환대하라고 넌지시 말한다. <삼국유사>에는 가난한 자나 여성을 괄시하고 배제하였는데 실은 그가 부처였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테레사 수녀도 "불의가 정의를 이길 때 우리는 하느님이 없다고 말하지만 실은 가난한 이로 오셨는데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동백은 미혼모와 고아에다가 술집사장의 모습을 하고 옹산에 나타난 부처/예수였다. 물론 동백과 달리 예쁘지 않고 선하지 않은 이웃마저 환대해야 진정한 포용이지만, <동백꽃 필 무렵>은 한 집단이 편견으로 타자로 배제하였다가 눈부처의 차이와 공감을 바탕으로 포용과 환대로 전환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서술한 드라마다.

3. 선악: 사람이 사람의 선을 키운다
 
셋째 코드는 '유전적 키메라로서 인간의 본성과 선의 키움'이다. 이 드라마에는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이 얽혀 있다. 한 인간 안에서도 선과 악이 교차한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성선설과 성악설은 성인들의 직관에 의한 추론일 뿐이다.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 인류학을 종합하면, "리차드 도킨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가 조종하는 생존기계이지만, 사회적 협력을 통해 혈연적 이타성(alterity), 집단적 이타성, 윤리적 이타성을 증대시키고, 인지과학적으로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거울신경세포체제(mirror neuron system)를 발달시킨, 선과 악, 이기와 이타가 공존하는 유전적 키메라(genetic chimera)다."(원맑, 3장)
그렇듯,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선과 악이 교차한다. 서사에서도 선과 악이 수시로 대결을 하는데, "선함을 증대하는 방안은 노동과 생산의 분배를 관장하는 체제, 타자에 대한 공감, 의미의 창조와 공유, 타자의 시선과 행위, 사회 시스템과 제도와 문화, 수행, 집단학습, 법과 규약 등인데",(8장) 이 드라마는 앞의 네 방안을 중심으로 악에서 선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거나 악으로 오인했던 선한 본성을 드러낸다. 옹산 사람들은 먹을거리와 재물을 공동으로 나누며,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여 연대하며, 나름대로 행복과 올바른 의미를 추구하며, 이웃의 시선과 베품에 감동하면서 서로 선을 키운다.
정숙은 딸을 버리고 재혼한 악인이었다가 끝부분에 와서 선인으로 반전된다. 정숙은 자신이 버린 탓에 평생 엄마로부터도 버림받은 딸이라는 자탄과 편견으로 살아온 딸집에 24년 만에 치매를 걸린 것처럼 위장하여 들어왔으며, 진짜 목적이 딸의 신장을 이식하여 목숨을 연장하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실은 정숙은 가정폭력에서 딸을 구하고자 가출하여 밥을 굶기지 않기 위하여 1년만 고아원에 동백을 맡기려 한 것이며, 24년 동안 몰래 동백과 필구의 지킴이였으며, 평생 고생하여 번 돈을 모두 털어 마련한 생명보험금을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며 딸에게 남겨주려 한 것이었다.
향미는 친언니처럼 베풀어주는 동백의 돈조차 훔칠 정도로 악하지만 알바로 고생하여 번 모든 돈을 동생에게 보내고도 버림을 받는다. 결국 향미는 동백의 배달을 자청하여 나갔다가 대신 살해당한다. 종렬은 동백을 미혼모로 만든 장본인이지만, 동백을 잊지 못하고 맴돌며 동백과 용식의 재결합을 인정하면서 필구와 동백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제시카는 몸매를 관리하느라 가정일을 내팽겨쳐 둔 채 동백을 질투하고 향미를 죽이려는 마음까지 가지지만, 좋은 아내로 돌아온다. 집주인 규태는 돈 푼이나 있는 집주인으로 동백에게 수작을 부리고 완장질을 하지만, 존경한다는 말 한 마디에 속과 돈을 모두 내주는 순진남이다. 옹산의 정경부인이자 최고 학력의 소유자로 변호사인 자영은 동백을 의심하고 상처를 주고 남편과 헤어지지만, 판관답게 사태를 명확하게 판단하고 똑 소리 나게 사이다 발언을 쏟아내며 남편과 동백의 강력한 '빽'이 된다. 마을사람을 비롯하여 그밖의 인물도 대동소이하다. 다만, 예외가 있다. 용식과 까불이 흥식이다. 용식은 절대 선으로서 불의와 맞서면서 변함없이 동백에게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을 하고, 흥식은 단지 까분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며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작가는 소수의 악에 대한 다수의 선의 승리에 확신을 가지면서도 의문을 던진다. 까불이는 원래 악했을까, 아니면 환경 탓일까. <동백 꽃 필 무렵>은 선과 악의 대결에서 따뜻한 인간애와 사랑을 바탕으로 후자의 승리를 다룬 휴먼드라마다.
 
4. 사랑: 완전한 사랑은 다른 모든 것을 완전으로 이끈다.
 
넷째 코드는 '완전한 사랑과 그에 의한 변화'다. "나로서는 온전하게 사유하고 이해할 수 없는 타자와 얼굴을 마주하고서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반복할 때, 그의 나약한 얼굴을 보며 무한을 향한 초월을 할 때 우리는 신의 음성을 듣는다."('원맑' 2장) 그러기에, 중세 시대의 3대 신학자인 보나벤투라가 <세 가지 길>에서 한 말대로, "완전한 사랑은 다른 모든 것을 완전으로 이끈다."
이 드라마의 중심축은 용식의 아무런 계산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그는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촌므파탈'로 불의를 못 참고 곧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과 똑같이 이리저리 재는 것 없이 오로지 "기냥 이쁜 것이라 아니라 멋지기까지 한" 동백을 향하여 저돌적으로 돌진한다. 이 사랑이 동백을 바꾸고 닫혔던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한다. 좋은 엄마로만 머물려던 싱글맘은 기적 같은 사랑의 동반자가 된다. 어디 그뿐이랴. 용식은 동백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신도 까불이를 검거하는 유능한 경찰로 거듭나고, 이러저러한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동백과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용식과 동백의 사랑의 중심축에 여러 대각선으로 겹치는 것은 지극한 내리사랑이다. 정숙의 눈물겨운 모정이 동백을 살리고 자신도 살린다. 동백의 모정은 가난한 미혼모의 아들을 메이저리그 야구선수로 만든다. 덕순의 모정은 더러운 꼴은 자신이 다 감당하며 용식을 따뜻하고 맑게만 길러낸다. 오지랖 넓게 필구와 동백과 마을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에서 나온 헤게모니로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는다. 영심이도, 동백이도 덕순의 말을 듣고 단단하던 마음을 바꾼다. 종렬은 천만 안티보다 필구를 무서워하며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실패하지만, 흥식이 아버지는 아들의 범죄를 뒤집어쓴다. 이렇게 하여 <동백 꽃 필 무렵>은 동백과 용식의 로맨스 드라마로 그치지 않고 가족드라마를 겸한다.

5. 그리운 공동체: 3명이 연대하면 기적을 만든다
 
다섯째 코드는 '따뜻한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다. "산업화와 신자유주의 체제로 공동체는 파괴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천만이 넘고 상위 10%가 부(富)의 절반을 차지한다. 청년들은 절반이 백수다. 돈과 물질을 인간보다 더 섬기며 이의 노예가 된 채 지나친 경쟁과 이기심과 물욕으로 서로 싸우고 소외를 심화하며 이 땅을 헬조선으로 만들고 있다. 그럴수록, 한국인은 따뜻한 공동체를 그리워한다. 1960년대까지도 두레공동체가 있었으며, 산업화와 도시화가 철저히 진행된 서울에서조차 변두리에서는 골목문화가 남아 있었다. 필자가 태어나서 대학생 때까지 보낸 신길동도 그랬다. 우리 집 펌프는 마을 공동의 소유였다. 24시간 개방되었고 펌프가에서 마을사람들이 김장을 하고 목욕을 하였다. 골목에서 아이들은 배를 깔고 숙제를 하였고 어른들은 각자 하나둘씩 먹을거리를 가지고 나와 시국토론이나 자식자랑에서 부모의 건강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대화의 꽃을 피웠고 지나가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막걸리 한 잔, 수박 한 쪽을 건넸다."(원맑, 4장)
한국 대중이 <응답하라 1988>에 환호하고 2016년에 촛불을 든 저변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따뜻한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이 깔려 있었다. 이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옹산 자체가 그런 그리움을 이상화한 공간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미혼모 동백이 아기를 안고 터를 잡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말대로 덕순은 외지인인 이들을 가족처럼 따뜻하게 대해주고, 나중에는 '동백의 공짜 엄마'가 돼 준다. 마을 사람이 모여 밥을 먹고 대화하며 떡을 함께 만들면서 팔기 전에 상당 부분을 먹어 치운다. 동백을 흉보고 차별하던 게장골목의 아주머니들이 파파라치 기자를 쫓아내고 옹벤저스를 조직하여 까불이를 응징한다. 까불이를 응징하기 위해 마을사람들이 너나없이 각자 여러 물건을 들고 나타나는 장면에서 2015년 촛불이 떠오른 것은 필자만의 과잉반응을 아니었으리라.
결국, 따뜻한 연대는 기적을 만든다. "솔로몬 애쉬의 선분 실험에서도 드러나듯, 3명이면 상황을 변화시킬 전환점이 생긴다. 실제로 지하철 5호선 천호역에서 사람이 전동차에 낀 후 두세 사람이 나서자 주변 시민이 모여들어 33톤의 차량을 밀어내고 사람을 구했다."(원맑, 3장) 옹산사람들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결정하지만 그 직전까지는 사람이 좀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냐며 각자 인맥을 총동원하여 죽어가던 정숙을 살리는 기적을 행한다. 옹산의 의사가 포기한 덕순을 최고의 의사에게 맡겨 수술을 받게 하고, 홍해처럼 길이 열리며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고, 50% 확률로 유전적 질환이 있었던 동백의 신장에 전혀 문제가 안 생기고, 또 수술도 성공하여 덕순과 동백은 소망하던 행복을 실현하게 된다. 이처럼, <동백 꽃 필 무렵>은 헬조선에서 한국인이 집단무의식적으로 그리워하는 따뜻한 사람들의 공동체의 비전을 형상화한 진보적 서사다.
 
6. 미스터리와 스릴: 까불이는 정녕 누구인가?
 
여섯째 코드는 '묵직한 주제를 탐정 서사로 포장한 미스터리 스릴러'다. 의도했든 아니든, 영리한 작가는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에서 시도하여 현대의 고전이면서도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던 장치를 차용한다. 에코는 이 소설에서 중세 대 근대, 신앙 대 이성, 권력 대 진리의 대립이라는 웅숭깊은 주제를 다루면서도 주인공 윌리엄 신부가 셜룩 홈즈처럼 연쇄살인의 범인을 찾는 아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가의 사냥개>의 서사를 차용한다.
이 드라마는 정녕 로맨스 드라마인데 첫 회부터 게르마늄 팔찌를 한 여인의 살인현장을 보여주고 로맨스 틈틈이 까불이의 낙서와 동백을 몰래 지켜보는 이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시청자들이 순수한 사랑의 달콤함에 빠지는 순간 서늘한 비수를 꽂는 것이다. 이런 장치는 마지막 40회까지 계속 되면서 "연쇄살인범 까불이는 과연 누구인가, 동백은 살해될까?"에 대한 호기심과 긴장감의 끈을 진동한다. 그러면서도 반전을 시킨다. 흥식이 아버지가 아니라 흥식이가 까불이로, 살해의 위기에 놓인 동백이 외려 향미의 500cc 맥주잔으로 까불이 머리를 쳐서 시장바닥에 눕히는 것으로, 까불이가 경찰서에 체포되어 있지만 어디엔가 제2의 까불이가 있음을. 결국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는 늘 까불이가 있지만, 선한 다수가 그를 이길 수 있다."이다.
작가는 숱하게 복선을 깔면서 방송 내내 호기심과 긴장감의 끈을 풀지 않고 다음 회를 시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고서는 반전의 재미와 쾌감까지 선사한다. <동백 꽃 필 무렵>은 달콤하고 느슨한 사랑 이야기를 으스스하고 긴박감 있는 스릴러로 포장하여 시청자를 포획한 잘 짜인 로맨스 스릴러다.
 
7. 나만의 행복: 행복에 등수가 없다
 
일곱째 코드는 '나만의 행복'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행복을 꿈꾼다. 동백은 필구가 야구선수로 성공하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고맙다는 말을 들으며 어엿하게 살고 싶다. 용식은 동백이 바로 행복이다. 정숙과 덕순은 오로지 자식 잘되는 것이 행복이다. 종렬은 가장과 남편으로서 존재 의미를 느끼며 살고 싶다. 규태는 아내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권위를 누리고 싶다. 자영은 그저 행간 없는 남자와 편하게 알콩달콩 살고 싶다. 향미는 코펜하겐에 가서 동생과 함께 잘 살고 싶었다. 제시카는 SNS의 '좋아요'에 일희일비하며 남 보기에 행복한 인생을 사느라 실존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동백은 "행복에 등수가 어디 있어. 각자 지 입맛대로 가는 거지."라고 말한다. 제시카는 이를 깨닫고 SNS를 끊고 좋은 아내와 엄마가 되려 노력한다. 마침내 동백은 용식과 결혼하고 향미의 이름을 한 딸을 낳고 아들 필구는 메이저리그 야구선수가 된다. 택배를 보관해주는 일을 하며 사람들로부터 수시로 고맙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하여 가난한 고아와 미혼모로서 지지리 사랑도 못 받고 남들로부터 천대를 받으며 시린 고생만 할 것 같았던 이번 삶이 기적으로 바뀐다.
자, <동백 꽃 필 무렵>은 졌어도 이 드라마가 피워놓은 꽃들은 우리 마음에 있다. "타인이 자유로울 때 나의 자유는 비로소 완성되며 타인이 행복할 때 나 또한 진정으로 행복해진다."('원맑' 맺음말) 우리 모두 헬조선에서 각박하게 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숱하게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자기만의 행복을 가꾸어 가면서 선한 이웃끼리 서로 공감하고 연대하면 시련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기적을 만들고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주변의 예쁘지 않고 선하지 않은 동백'에게서도 눈부처를 바라보고 품어주고 모시며 연대하는 한, 옹산은 가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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