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흔들리는 갈대다 인간을 제외한 자연에도 속임수나 허세가 존재한다. 포식자를 속이기 위해서 몸집을 부풀리기도 하고 몸의 색을 바꾸기도 하며 배우자에게 선택되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한다. 인간세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인간의 속임수나 허세가 정당화 되지는 않는다. 나는 솔직한 사람이 좋다. 솔직함은 내게서 정신적,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며 때에 따라서는 물질적, 경제적 부담을 줄여 주기도 한다. 또한 나로 하여금 적절한 대응을 가능하게 하고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예측가능성을 높여준다. 이처럼 솔직함에는 많은 미덕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솔직함을 인간이 갖추어야할 좋은 덕목으로 권장한다. A는 B와 싸웠다. 하지만 싸움의 원인은 A에게 있다. B는 A를 뿌리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A에게 상처를 입혔고 현행범으로 경찰에 체포됐다. A는 B에게 폭행 의사가 없음을 안다. A는 경찰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진술했고 B는 풀려났으며 둘은 화해했다. A는 친구 물건을 훔쳤다.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던 A는 친구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물건을 돌려주었으나 친구에게 결별 당했다. 친구는 그 사실을 주변사람들에게 알렸으며 A는 그로인한 고통과 불명예를 받아들였다. 솔직함에 대한 이러한 사례들은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모범을 보여준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집단적 삶을 살아온 이래 그 근간을 이룬 가장 기초적 기반은 상호신뢰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한 관습, 도덕, 윤리, 제도, 법 등은 바로 그 신뢰를 전제로 한다. 신뢰는 객관적 사실에 기반하며 그것을 담보하는 요소가 솔직성, 정직성, 진실성이다. 인간은 대체로 자기이익에 나쁜 영향이 없는 경우 솔직하고 진실 되며 정직하다. 하지만 자기이익과 관련되면 어떤 사람들은 솔직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며 진실 되지 못한 경우가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사실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런 속성을 염두에 두면 우리 삶의 바탕을 그런대로 건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솔직함은 미덕이기만 할까? 나는 그에게 "당신은 맹인이라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겠군.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소. 저 하늘, 구름, 숲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라고 말했다. 나는 진실 되고 정직한 사람일까? 나는 상대에게 심리적, 물리적으로 어떠한 폭력도 가할 의도가 없다. 상대도 그렇게 느꼈을까? 누군가 나를 그의 집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나를 위해 나름 좋은 음식을 마련했으나 내 입에는 별로였다. 그래서 나는 각 음식에 대해 솔직한 내 의견을 가감 없이 말했다. "이건 짜고, 저건 맵고, 이건 너무 달아서 살이 찌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그나마 이게 비교적 먹을 만하지만 양이 너무 적어요." 나의 솔직한 의견이 상대에게 도움이 됐을까? 혹시라도 내가 거짓으로 요리 솜씨가 훌륭해서 맛있게 잘 먹었다고 입에 발린 칭찬을 했다면 나는 위선자일까? 위의 예에서 보듯이 솔직함이 미덕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해 보인다. 솔직함으로 인한 주변에의 영향이 좋은 요소가 나쁜 요소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능가해야 하며, 솔직함의 표시가 최소한의 이타성을 가져야 하고, 선의의 피해자가 최소화 되도록 배려해야 하며, 솔직함을 자기이익을 위해 악의적으로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A는 B에게 C가 싫다고 말했다. C는 A와 B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한 개 가지고 있으며 그 물건을 누군가에게 줄 의사가 있다. B는 C에게 A가 C를 싫어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C는 B에게 그 물건을 주었다. 솔직함은 이렇게 악용될 소지를 갖고 있다. 솔직함 자체는 기본적으로 미덕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구체적 쓰임에 따라, 의도에 따라 이처럼 악덕이 될 수도,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솔직함이 악덕이나 폭력이 돼서는 안 될 일이다. 나는 오늘 일이 바빠서 점심을 걸렀다. 그래서 배가 많이 고프다. 자주 가는 식당에 갔으나 끝날 때가 거의 다 돼서 음식이 한사람 몫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허기진 사람은 나를 포함 둘이었다. 보기에 상대는 나보다 훨씬 배고픈 것 같다. 나는 그 에게 음식을 양보했다. 하지만 내 속 마음은 양보하고 싶지 않다. 나는 솔직하지 못하다. 나는 위선자일까? 위선이란 말은 선함으로 위장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위선이란 말을 결코 좋은 의도로 쓰진 않는다. 그렇다고 솔직함을 내세워 좋은 의도를 가진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할 일이 아니다. 그 것은 솔직함이라는 미명 뒤에 숨어서 행하는 폭력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나는 "위선"이란 말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흔히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위선자라 한다. 그 의도나 쓰임에 불구하고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위선자라 규정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나는 겸손한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은 이 기준에 따르면 위선자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는 외유내강이란 말을 좋은 의미로 쓴다. 하지만 이 또한 위선이다. 따라서 차재에 나는 위선자라는 말의 쓰임을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위선, 위선자란 말은 "나쁜 의도"를 가지고 겉과 속이 다르게 행하는 자로 협소화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는 거리에서 매우 아름다운 여자를 만났다. 나는 넋을 잃고 그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와 말도 나누고 사귀어 보고 싶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있고 나는 결혼한 몸이다. 이를 눈치 챈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 저 여자에게 관심 있구나?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니라고 부정하는 순간 나는 위선자가 되고, 긍정하는 순간 나는 파렴치한이 된다. 진퇴양난이다. 나는 살면서 수시로 이런 갈등에 빠진다. 여기서 상황을 둘로 나누어 보자. 친구 없이 나 혼자 맞은 상황일 때 나는 그 여자와 관련하여 온갖 상상을 하며 기회를 엿볼 것이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서는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고 생각할 것이다. 이 경우 욕망은 내 안에서 도덕적, 양심적 가책과 다투게 된다. 그 결과에 따라 나는 욕망의 좌절을 경험하거나 양심에 가책을 느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문제일 수 있지만 그 결과에는 나의 전 인격이 반영되어 있다. 나의 도덕관, 가치관, 윤리의식수준, 욕망에 대한 태도 등등. 따라서 나는 나의 내면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무척 두렵다. 나는 위선자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사람들 모두 다 그래" 하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줄 수도 있고, 답은 없지만 스스로 끊임없이 번민하며 괴로워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프라이버시라는 이유를 들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내면의 상황일 뿐이라서 나의 내면의 문제로 그칠 수 있다. 친구가 "너 저 여자에게 관심 있구나?"하고 묻는 상황이면 양상은 많이 달라진다. 이젠 나의 내면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외부에 알려져야 할 상황이다. 이 경우 나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다. 친구에게 고매한 인격자로 보이기 위해서 무반응, 무관심한척 가장 할지, 거침없이 욕망을 드러내서 낄낄거리며 음담패설을 할지, 나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서 할 수만 있다면 아무도 모르게 저 여자와 사귀고 싶다고 말할지, 아니면 사귀고는 싶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고, 나의 평판이 나빠지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다고 말 할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는 위선자가 되거나, 파렴치한 놈이 되거나, 비겁한 놈이 되거나를 비껴갈 수 없다. 이젠 현실에서의 행위만 남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대개의 경우 이런 문제들은 칼로 자르듯이 명쾌하게 정리되거나 해결되지 않는다. 내 마음은 수시로 가능한 선택지를 오가며 어떠한 결정도 못하고 번민하고 방황할 수도 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흐를 것이고 상황도 바뀔 것이며 바라보는 시각도 바뀔 수 있고 그에 따라 문제의 본질이 바뀔 수도 있다. 또한 치열하고 진정성 있는 고민과 방황은 내게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줄 수도 있다. 온갖 종교와 도덕, 윤리, 법에서는 욕망을 죄악시해서 떨쳐버려야 할 악이라 규정하고 있지만 인간에게 욕망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가장 기본적으로 식욕, 성욕, 수면욕을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악이 아니라 생존의 필수적 요소이다. 하지만 나의 욕망을 그 대로 드러내는 것이 솔직하고 좋은 일일까? 누구에게든 다 좋을까? 어느 일방에게만 좋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나의 욕망으로 피해자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욕망은 어떤 때에는 순수한 것이 되고 어떤 때에는 파렴치한 것이 될까? 우리는 살아오면서 경험칙으로 습득한 지혜가 있다. 배고파서 먹은 음식도 과한 순간 독이 되고 갈증으로 마신 물도 과하면 익사위험이 있으며 추워서 피운 불도 과하면 화재가 된다. 우리의 욕망 또한 이와 마찬가지 이다. 나는 솔직성과 위선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하며 끊임없이 갈등하며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다양한 모습으로 비칠 것이다. 상황에 따라 나는 실제로도 위선자이기도 하고, 솔직한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수많은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산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기도 하고, 돈을 많이 벌고 싶기도 하며 사람들 앞에서 으스대고 싶기도 하고, 예쁜 여자와 연애하고 싶기도 하고, 나쁜 사람을 혼내주고 싶기도 하고 등등 내 욕망에는 한계가 없다. 그런 내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면 상대의 욕망과 충돌을 피할 수 없다. 지구상에는 나 말고도 70억명 이상의 사람이 있다. 그 많은 사람이 모두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면 이 세상은 어찌될까? "마음속에는 엉큼하고 위험한 욕망이 가득한데도 겉으로는 성인군자인양 한다." "솔직하지 못하고 위선적이다." 라는 비난을 들을 지라도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욕망은 적절히 제어되어야 하고 절제되어야 한다. 위선적일지라도 과하거나 잘못된 욕망의 실현을 애써 절제하려는 사람에게 비난만을 할 수 없는 이유다. 마음속 욕망과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문제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마음으로 또는 머리로 어떤 상상을 하고 무엇을 욕망하든 그것은 자유다. 물론 타인과 관련된 아름답지 못한 상상이나 욕망은 그 자체를 제어할 수 있는 인격과 내공이 있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이 좋겠지만. 마음속 욕망은 그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스스로 발설하거나 실행하지 않으면 누구를 해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다. 따라서 나의 욕망을 실현하거나 발설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우려가 있다면 내 욕망은 감추어져야 한다. 이것은 솔직함이나 위선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문제이다. 또한 잘못된 또는 과도한 욕망은 나의 생존에도 이롭지 못하다. 오히려 독이다. 나는 그렇게 상시적으로 자기모순에 시달리고 욕망과 현실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산다. 그런 지난한 과정은 나를 성장시키고 깊어지게 한다. 성장과 깊이는 지식으로 얻어질 수 없다. 진정성 있고 바른 곳을 향한 치열한 고민과 갈등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그래서 값지다.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다. #솔직함 #위선 #인간적갈등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