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에서 남강 줄기를 타고 남으로 내려가면 산청이다. 지리산에 한 발 더 다가서 지리산의 정취가 물씬 나는 고을이다. 멀리 지리산 줄기에서 흘러온 실개천이 반달모양으로 휘돌아가는 그윽한 곳에 한 마을이 들어섰다. 남사(南沙)마을이다. 산골고을 산청에 들어선 산골마을이다.
▲ 남사마을 정경 남사마을은 지리산 줄기 응석봉 자락에 남사천이 반달모양으로 휘돌아가는 그윽한 곳에 들어섰다. 사진 속에 키가 큰 회화나무 집이 이씨고가다. ⓒ 김정봉
700년 이상 오래된 마을, 남사마을
진양하씨, 밀양박씨, 성주이씨, 연일정씨가 어울려 살고 있는 오래된 마을로 옛사람들 고매한 자취가 서려 있다. 진양하씨 하즙(1303-1380)과 아들 하윤원(1322-1376), 하즙의 외증손 진주강씨 강회백(1357-1402)은 이 마을 출신으로 마을 역사는 적어도 700년이 넘는 셈이다.
이를 말해주듯 하즙이 심은 원정매(元正梅)가 마을 안 하씨종가에, 강회백이 심은 정당매(政堂梅)가 마을 근처 단속사 터에 살아 있다. 모두 700년 가까이 된 고매(古梅)들이다.
진양하씨는 하연(1376-1453)으로 대(代)를 이어 남사마을에 뿌리를 굳게 내렸다. 하연은 하즙의 증손자로 세종대에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가 7세에 심은 감나무가 하씨고가 뒤뜰에 600년 넘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 하씨고가 감나무 남사와 700년 가까이 오래 세월을 함께하여 남사의 모든 일을 기억할 것만 같다. ⓒ 김정봉
진양하씨 외에 오래전부터 이 마을에 살붙이고 산 성씨가 성주이씨다. '이화에 월백하고'로 시작하는 <다정가>의 작가, 이조년(1269-1343)의 증손인 이제(?-1398) 후손들이다. 이제는 이성계의 사위로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최근 이 문중에서 보관해오던 태조 이성계가 이제에게 직접 내린 '이제개국공신교서'가 국보로 승격되었다.
남사마을에 살고 있는 또 다른 성씨는 연일정씨. 정몽주의 후손들로 정씨고가를 짓고 살고 있다. 정몽주의 손자 정보(鄭保)가 이곳에 내려와 눌러 살았다 하는데 이는 정보가 단성에 유배된 후 이곳에서 죽은 사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연일정씨 집으로 사양정사가 전한다.
남사마을에 거주하는 성씨로 밀양박씨를 빼놓을 수 없다. <난중일기>에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1597년 6월 1일 오후 늦게 산청에 도착하여 밀양박씨 박효원의 종집에서 유숙했다고 나온다. 이순신은 이 지역의 유력한 집안인 박효원의 내력을 알고 이곳에서 유숙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박효원의 재사(齋舍)로 니사재(尼泗齋)가 전하며 그 아래에 후손이 살고 있다.
남사마을은 마을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오래된 집이 없는 편이다. 하연과 강회백 그리고 걸출한 후손들이 남사에 눌러 살지 않고 이거하여 그런지 모르겠다. 이조년의 현손 이존성(?-1388)의 딸을 부인으로 둔 하연과 강회백은 동서지간으로 함께 이거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옛집으로 이씨고가, 최씨고가, 사양정사를 꼽는다.
최씨고가와 사양정사
▲ 남사마을 옛담 남사마을 옛담은 향토적 서정과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고 있어 마을담 자체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 김정봉
남사의 보물은 뭐니 해도 옛담이다. 남사의 옛담은 향토적 서정과 아름다움을 고이 간직하여 마을담 자체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옛담은 집과 집을 이을 때 생명력을 갖게 되며 생명력을 얻은 담은 서로 어울려 특유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가장 눈여겨볼 만한 공간이 고가들의 진입공간이다. 어쩌면 남사의 옛집보다 옛집들의 진입공간이 더 매력적인지 모른다.
최씨고가는 마을에서 제일 큰집이고 마을 한가운데 있어도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ㄱ' 자로 꺾여 집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사양정사의 뒷담과 정씨고가의 외벽, 최씨고가의 행랑채 뒷마당을 둘러싼 담으로 생긴 길이다.
▲ 최씨고가 진입공간 ‘ㄱ’자로 꺾여 긴장감이 도는 공간이다. 봄철에는 정씨고가 정씨매의 매화향이 담을 넘어 골목 안에 매화향이 가득 고인다. ⓒ 김정봉
집주인은 'ㄱ' 자 모양이 되도록 행랑채 외담을 쌓아 다분히 의도적으로 진입공간을 설정 한 것으로 보인다. 큰 회화나무를 기준으로 담을 꺾어 놓아 공간을 더 극적으로 연출하였다. 집 규모에 비하면 대문은 소박하다. 진입공간의 크기에 맞춰 눈에 거슬리지 않게 하였다.
사랑마당은 넓다. 사랑마당 한쪽에 자라는 150년 된 최씨매는 대문 곁에 있던 400년 된 매화나무가 죽은 뒤 후계목으로 심은 나무라 하니 이 집이 비록 1920년에 세워지긴 했어도 집안의 연륜은 깊은 셈이다.
마을에서 가장 깊숙이 있는 집은 사양정사(泗陽精舍)다. 연일정씨 정제용(1865-1907)의 아들 정덕영과 손자 정종화가 남사로 이전한 뒤, 1920년대에 지은 정사다. 정사 앞집은 하씨고가, 옆집은 정씨고가, 뒷집은 최씨고가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다. 사양정사 가는 길은 높고 깊어 아늑하고 포근하다.
▲ 사양정사 진입공간 사양정사 가는 담길은 높고 깊어 아늑하다. ⓒ 김정봉
▲ 사양정사 정몽주 후손 정제용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사로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엄청나게 크게 지었다. ⓒ 김정봉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허세를 부렸는지 엄청나게 크게 지었다. 일제강점기 신흥부호들 사이에 유행한 건축양식을 따른 거로 보면 되지만 뒤편의 낮은 굴뚝과 동쪽 누마루 밑 겸손한 기단굴뚝을 보면 마냥 허세만 부린 것은 아니다. 옆집 정씨고가 굴뚝처럼 당시 유행한 붉은 벽돌로 크고 화려하게 만들 법 했지만 정사 굴뚝이라 자제한 듯하다.
이씨고가와 굴뚝
최씨고가 서쪽에 성주이씨 집들이 몰려 있다. 이씨고가를 중심으로 바로 앞에 성주이씨 제실로 사용되는 남호정사(南湖精舍)가 있고 몇 집 건너 520년 묵은 향나무 집 사효재(思孝齋)가 있다. 이씨고가의 진입공간은 남사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길이다. 양쪽이 담으로 된 직선 길로 가운데 회화나무 두 그루가 교구(交媾 성교)하는 듯 서로 교차하며 자라고 있다.
▲ 이씨고가 회화나무 몸 섞어 자라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용의 불기운을 누그러트리려 심었다 한다. 부부가 이 나무 아래를 지나면 백년해로한다 하여 남사에서 제일 인기가 좋다. ⓒ 김정봉
▲ 이씨고가 대문과 진입공간 바른네모꼴 대문을 통해서 본 이씨고가 진입공간은 액자 속 그림처럼 보인다. 이 길은 교구하듯 몸을 섞은 두 그루 회화나무 덕택에 더 이상 밋밋하지 않다. ⓒ 김정봉
마을이 쌍용교구(雙龍交媾)지형이라 용의 불기운을 막기 위해 심었다 하는데 부부가 이 나무 아래를 지나면 백년해로한다는 재미난 얘기도 들린다. 바깥사람들에게 집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다소 민숭민숭한 직선 길에 변화를 준 것이다.
이씨고가 안채는 1700년대 초에 건립되어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사랑채는 200년 뒤 1900년대 초반에 세워졌다. 사랑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굴뚝이 인상적이다. 사람 허벅지 높이까지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곧게 쌓아 멋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뚝뚝한 굴뚝이다. 마당 한가운데 굴뚝이라니 사연이 궁금하기만 하다.
이는 풍수와 관련이 있다. 마당 한가운데의 굴뚝자리는 용이 지나가는 자리로서 용의 불기운이 이 굴뚝을 통해 빠져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불기운을 막기 위해 집 앞에 회화나무를 심은 이치와 같다.
▲ 이씨고가 굴뚝 마당 한가운데에, 정확하게 사랑채의 반을 나누는 자리에 굴뚝이 서있다. 멋없는 굴뚝이라 장식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많은 이가 풍수 굴뚝으로 여기고 있다. ⓒ 김정봉
▲ 정동호가옥 굴뚝 민간싱앙과 관련 있는 굴뚝으로 보고 있다. 굴뚝에 짚을 둘러 사악한 기운을 막으려한 것이다. ⓒ 김정봉
참고로 풍수 굴뚝처럼 민간신앙과 관련 있는 굴뚝이 있다. 예산 정동호가옥의 짚가림 굴뚝이다. 굴뚝목까지 짚으로 두른 굴뚝이다. 화재의 위험을 무릅쓰고 굴뚝을 짚으로 두른 것은 아이를 낳을 때 금줄을 내걸거나 장독에 짚을 둘러 악귀와 질병, 액을 막은 것과 같은 의도다. 굴뚝에 짚을 둘러 집으로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막으려 한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