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채수영3 - 헬조선의 자립적인 흙수저 청년

헬조선에서는 유능한 청년도 흙수저면 1천만원의 벽을 넘지 못 한다.

검토 완료

채수영(soopool21)등록 2020.01.22 11:15
래 이야기 ; 헬조선의 자립적인 흙수저 청년
 
래라는 친구가 있다. 그가 이십대 초반일 때 나는 삼십대 중반으로 처음 만났다. 그는 늦깍이 대학교 신입생으로 나는 늦깍이 대학원생으로 만났다. 우리 둘을 인사시켜준 이는 범이다. 범이는 사회의 부조리를 잘 참지 못하고 어디서든 모임과 토론을 주선하는 친구였다. 그러니 당근 범이 주변에는 자신과 비슷하게 사회참여적이고 모임과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도 래도 그렇게 만났다.
 
학교에서 책모임을 만들어 보자고 모였다. 먼저 밥을 먹고 찻집에서 얘기하기로 했다. 나는 된장찌개를 먹고 싶었고, 래는 매일 먹는 가정식이 아니라 스파게티나 분식을 먹고 싶어 했다. 범은 아무거나 상관 없댔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음식점을 찾기 어려웠다. 된장찌개와 분식이라면 김밥천국이 딱인데, 그 대학가에는 김밥천국이 없었다. 게다가 래는 김밥천국처럼 너무 많은 종류의 음식을 만드는 식당을 좋아하지 않았다.
 
래가 말했다. "점심은 각자 먹고 만나죠."
"좋아요." 내가 말했다. 난 이런 게 너무 좋다. 같으면 함께 먹지만 다르면 따로 먹고 만나기...
범이만 살짝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그를 따라 갔다.
 
내가 스물셋일 때, 두 번째 애인이었던 그녀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는 학생회 활동으로 바빴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를 만날 수 있었다. 만나면 밥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그녀는 함께 스파게티를 먹고 싶어 했고, 나는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 했다. 그녀는 오늘은 자기가 쏠테니, 그냥 같이 가주면 안 되냐고 했고, 나는 넘 느끼해서 안 되겠다고 했다.
 
그럼 각자 먹고 만나자고 했다. 5초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자주 만나지도 못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며 된장찌개를 먹으러 나를 따라 왔다. 눈물을 흘리며,
그때는 이해하지 못 했다. 그게 울 일인가...
각자 좋아하는 것 먹고 만나면 서로 좋은 거 아닌가...
물론 지금은 좀 달라졌다. 연인 사이에는 각자 맛있는 걸 먹는 것보다 함께 먹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안다. 정말 못 먹는 음식이 아니라면 같이 먹어줘야 한다고.
 
스스로 터득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함께 사는 여성과 연애할 때 알았다. 그때가 서른셋이었으니, 두 번째 애인인 그녀를 만날 때로부터 딱 십년이 흘러서다. 아내의 이름은 인이다. 인은 스파게티를 좋아했고, 나는 인을 사랑했다. 많이.
 
세 번째 데이트에서 인이 나에게 말했다.
"우리 스파게티 먹으로 가요. 전 스파게티 너무 좋아해요."
"좋아요. 먹으러 가요."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이 때도 난 여전히 스파게티는 느끼해서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된장찌개를 같이 먹을지, 스파게티를 같이 먹을지, 아니면 따로 먹고 만날지, 어떤 게 현명한지에 대한 판단은 여전히 모르겠지만 음식선택에는 갑을관계가 있다는 것을. 음식의 갑을관계는 사랑의 갑을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두 번째 애인과 나의 관계에서는 내가 갑이었고, 인과 나 사이에는 인이 갑이었던 것이다.
 
래와 나 사이에는 둘 다 갑이니까 먹고 만나는 게 좋았던 것이다.
 
책모임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먼저 모인 사람들이 돌아가며 매주 책을 고르고 간단히 소개하는 글과 모임장소와 시간을 정해서 전단지를 붙이기로 했다. 회의가 빨리 끝나서 잡담을 나눴다. 래는 자신의 개인사를 먼저 말하지는 않지만, 물어보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부모님이 이혼한 뒤로 계속 돈이 없었고, 고등학교 때 꼰대와 다투고 학교를 자퇴했고, 알바를 해서 공부를 하다 보니 대입도 늦어졌다. 대학은 학비를 공짜로 다니기 위해 장학생으로 지방대를 택했고, 졸업하면 학비가 안 드는 독일로 유학가고 싶댔다. 영어와 독일어를 공부하기위해 항상 헤드셋을 끼고 다녔다. 제일 싼 동네에 자취방을 구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래는 요리를 좋아했다. 스파게티를 잘 만들었고, 새로운 요리를 도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냥 한 끼를 때우려면 사먹거나 해먹거나 가격 차이가 없지만 그럴듯한 일품요리는 해먹는 게 훨씬 싸다. 가난해도 고급요리를 즐기려면 몸이 부지런해야 한다. 래는 딱 그런 스타일이었다. 사먹는 것도 꼼꼼히 따져서 가고, 해먹는 모임도 자주 도모했다.
 
책모임을 1년 정도 이어가고 있을 때 나는 인과 결혼을 했다. 애초 셋이 모여 시작한 책모임은 열성적인 칠팔 명과 가끔씩 오는 칠팔 명으로 매 모임마다 두 자리 숫자가 모였다. 래는 책모임에서 알게 된 새로운 친구들과도 해먹는 모임을 자주 도모했다.
 
장소는 항상 우리집이었다. 조리도구가 빈약한 자취방과 달리 신혼집은 조리도구 일체를 갖추고 있었다. 인과 나는 손님을 마다하지 않았다.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은 천사도 오지 않는다.'는 말을 좌우명처럼 여겼다. 손님이 줄어든 지금, 그때 우리집을 찾은 모든 이가 정말 천사처럼 느껴진다.
 
래는 사교적이면서도 매우 독립적이다. 그래서 래는 우리집에 언제 방문해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밥이 없으면 알아서 해먹고, 요리를 해서 우리까지 먹이기도 하고. 왠만한 도구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모르면 스스로 찾아서 쓴다. 게다가 설거지까지. 래가 자고 가더라도 언제 나갈지 묻지 않는다. 인과 나는 우리대로 알아서 나가고, 래는 래대로 알아서 나간다. 손님이지만 손님처럼 대하지 않았다. 래는 손님처럼 배려와 예의를 위해서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자립적은 성향은 간혹 이기주의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날도 여러 명이 모였고 래가 요리를 했다. 식사 후에 과일을 먹다가, 래는 차를 한잔 타 마셨다. 부엌으로 가서 자기 차만 타서 자리로 돌아 온 것이다. 한 친구가 래에게 말했다. "치사하게 자기 차만 가져 오냐."
"이게 왜 치사한 거죠..." 래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차를 주문한 사람도 없었고, 누가 마실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타 오냐는 거다. 하지만 한국에는 약간의 과잉친절이 일상적이다. 식당에 가면 묻지도 않고 물을 부어주고, 마다해도 차를 내온다. 그리고 혼자 마시러 커피 뽑으러 갔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주문을 받는다. 그래서 래는 한국인 일부와는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나도 래처럼 과잉친절을 좋아하지 않지만, 과잉친절이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상대방에 관심을 가지고 소통하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다만 과잉을 당연시하거나 강제하면 문제가 된다. 말하지 않아도 내와야하고, 자기 것만 타먹는 행동은 치사하다거나 이기적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은 항상 아랫사람과 윗사람이라는 상하관계와 얽히면서 강요가 된다. 난 차라리 강요된 친절보다 이기적인 게 낫다.
 
2011년 2월, 나는 샨티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시작하면서 경남 진주를 떠나 경북 상주로 갔다. 그러는 사이 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과 군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애초 학비가 없는 독일로 유학 가려던 방향을 돌려서 일본 대학원에 국비지원 장학생 선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래가 방문한 것은 기뻤지만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상주 인근의 회룡포 모래밭에서 래와 인과 나는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한 미래로 우울한 래, 산후 우울증을 앓고 있는 인, 그리고 새로 세운 대안학교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나, 셋은 각자의 우울함을 안은 채 강물만 바라봤다. 그 옆 모래톱에는 한살과 세살의 두 딸만이 어른들의 우울함을 무시한 채 모래 장난을 치고 있었다.
 
2012년 2월, 학교는 가까운 문경으로 이사했고, 우리집도 학교를 따라 이사했다. 래는 문경의 우리집에도 왔었다. 군대는 공익판정을 받았고, 국비지원 일본유학에 뽑혔다는 거다. 하나는 성공 다른 하나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나름대로 각자의 우울함을 극복해가고 있던 인과 나는 래의 75% 성공을 축하해주었다.
 
래는 여전히 자립적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고 있었고 일본으로 가는 비용땜에 더 많은 알바를 뛰어야 했댔다. 알바는 시급이 센 배달 알바였다. 배달을 한다는 것은 오토바이가 있다는 거였고, 쉬는 날에는 개인적으로 그 오토바이를 쓸 수 있다는 거였다.
 
래는 서울에서 문경의 우리집까지 80cc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네비게이션도 없이 우리집 주소와 지도만 보고 찾아온 것이다. 농암면까지는 지도만 보고 어떻게든 찾아온다지만, 동네에서 우리집은 또 어떻게 찾아 왔는지. 래는 도로명주소로 바뀌면서 집찾기가 쉬워졌고, 배달 알바를 하면서 배운 게 그거라고 했다. 래가 그렇게 설명을 했지만, 나는 아직도 네비게이션 없이 그 깡촌까지 어떻게 찾아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래는 우리집까지 오는 것도 여전히 자립적이었다. 버스로 오는 친구들은 읍내까지 마중을 나가야했고, 차로 오는 친구들은 다 온 것 같은 데 어딘지 모르겠다며 전화가 바리바리 오는데 래는 그냥 우리집 현관에 나타났다.
 
6년이 지났다. 학교는 뜬금없이 충남 서산으로 이사를 했다. 역시 우리집도 이사를 했다. 폐교를 가진 분이 샨티학교를 어여삐, 아니 가엾게 여긴 것이다. 그 분이 지금의 교장샘이다. 어째든 서산에서 영원한 터를 잡고 새 학기를 시작한 2019년 3월 어느 날, 범에게서 전화가 왔다. 래 만나러 세종시에 가는 데, 서산이 가까워서 함께 형집에 가도 되냐는 거였다. 얼른 오라고 했다. 세종시에 산다니, 공부는 마쳤겠지만 일본에서 살거나 적어도 서울에서 일을 구했을 거라 막연히 상상했는데 세종시라니. 너무 가까이 살고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오랜만에 만난 래는 많이 변해있었다. 가난해도 품위가 있었고, 지적이고 사회진보에 관한 대화를 즐기던 래였다. 입이 많이 거칠어졌고 사회진보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하다 보니, 생긴 변화였댔다.
 
3년전, 석사과정을 마치고 논문을 작성하다가 급하게 귀국해서 공익을 수행했댔다. 공익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가서 논문을 끝내려는 데 돈이 없었다. 장학금이 다시 나오기 까지 버틸 초기 생활비 8백 만원이 필요했었다. 여태까지 아무런 간섭도 도움도 없던 아버지가 이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해서 알바로 돈을 모울 생각도 안 했댔다. 하지만 출국하기 며칠 전에 아버지는 돈을 빌려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고, 레는 멘붕에 빠졌다. 대한민국은 재산도 직업도 없는 가난한 대학원생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여기저기 안전한 대출을 알아보다가 출국일도 놓치고 어쩔수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곳에서 돈을 빌렸다.
 
일본은 기간과 형식에 굉장히 엄격하다. 정해진 기일 내에 책으로 편집된 논문 다섯 권을 가져와서 등록을 해야 학위가 나오는 것이다. 출국일이 늦어지면서 장학금 신청기간도 놓치고 생활비도 빠듯했지만 알바를 하지 않고 논문에만 집중했다. 논문은 완성했지만 책으로 나오는 데는 돈이 필요했다. 가져온 돈은 똑 떨어지고 며칠 알바를 해서 겨우 책자로 만들어 갔지만 기한을 놓쳤다. 논문 등록을 하기 위해서 다시 1년을 기다려야하고, 더욱이 이제 장학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귀국을 했다.
 
귀국은 래에게 더 큰 아픔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빌린 8백은 1천5만원으로 갚아야했었고 미친 듯이 돈을 벌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낮에는 배달, 밤에는 피시방을 지켰댔다. 천만원도 안 되는 돈 때문에 인생이 바뀌어버렸고, 가난한 청년에겐 그만한 돈도 대출해주지 않는 대한민국에 대한 울분도 보였다.
영화 '화차'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빌려주는 돈의 무서움을 봤던 터라 가슴이 더 아팠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허영도 그런 돈을 빌리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허영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래이지만, 그런 종류의 돈을 빌린 이상 고통은 비슷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와 진보와 문화와 운동을 얘기하던 래가 돈이 젤 중요하고 결국 돈밖에 남는 게 없다는 얘기를 할 때 너무 슬펐다. 3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사회학 석사까지 공부했지만 당장 빚을 갚기 위해 막일을 하는 래를 보면서, 노력해서 능력만 갖추면 성공한다는 말이 개소리임을, 결국 흙수저냐 금수저냐가 행복을 결정한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다.
 
모레, 서산의 용현자연휴양림에서 래를 보기로 했다. 여전히 음식을 해먹기 위해 장을 봐서 온댔다. 통화속 래의 목소리가 3월보다 훨씬 부드럽게 들린다. 다시 래가 해주는 음식을 맛 볼 것이 기대되고, 또 빚과 빚의 우울함으로부터 얼마나 자립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자립은 래의 것.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