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채수영4 - 금강산의 꽃할머니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한 금강산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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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영(soopool21)등록 2020.01.30 17:06
2003년 가을, 나는 운 좋게 금강산 육로 관광을 갔었다. 그것도 공짜로.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져서 가능했지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내가 백수였고, 다른 하나는 사회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생산력의 발달로 필요한 물건을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노동시간은 엄청 줄었지만, 직장에서 근무시간은 줄지 않았다. 그러면 당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더 적어진다는 것이고, 실업자가 늘어난다는 거다. 나도 당시에는 그 대열의 한명이었다.
 
백수들도, 아니 백수들일수록 '사회적 자본'과 '문화자본'을 익힐 수 있는 활동을 하고, 관계를 맺어야한다. 백수일수록 움츠려 있지 말고 나다녀야한다. 이런 점에서 청년수당을 확산시킨 이재명지사가 돋보인다. 용어를 간단히 설명하면,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소양이 간접적으로 돈이 된다는 것이다.
 
당시에 나는 정대협(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하는 활동에 자원봉사를 했었다. 그때만 해도 이백여분의 할머니들이 생존해 계셨고, 여성가족부의 지원으로 매년 가을에 할머니들을 관광시켜드리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후에 금강산 방문이 막히게 될 줄을 할머니들이 아신 것은 아니지만, 많은 할머니들이 금강산을 원했다. 더 늙기 전에 가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전국에서 60여분의 할머니들이 모였고, 다들 고령이었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많으셨다. 자원봉사자도 많이 필요했다. 특히 남자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했다. 버스에서 숙소로 숙소에서 버스로 많은 짐도 옮겨야 했지만, 걷기 힘든 곳에서는 할머니들을 업어드려야 했다. 할머니들도 남성 자원봉사자를 좋아하셨다.^^ 여성 봉사자들은 많이 자원했지만 남자들은 없었다. 나에게도 요청이 왔다.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젊은 남자는 나를 포함해서 겨우 세 명이었다.
 
휴전선을 넘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지만, 넘을 때의 기분은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휴전선을 넘어가고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이었다. 하필이면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본 직후였던지라, 북한군이 버스 안을 살피러 차에 오를 때는 송강호가 들어와 권총을 뽑을 것만 같았다. 작은 체구의 북한 병사는 권총을 뽑지 않아도, 각진 얼굴과 날카로운 눈빛만으로도 우리를 긴장시켰다.
 
전체 일정은 서울에서 1박, 금강산에서 2박3일, 설악산에서 1박, 총 4박5일의 일정이었다. 구룡폭포에 구경 갔을 때였다. 출발 30분 만에 절반의 할머니들이 길옆에 앉으셨다. 여기서도 경치가 좋은 데 뭣 하러 더 가냐며 아예 자리를 잡으셨다. 남은 절반의 절반은 또 30분 뒤에 자리를 잡으시고, 결국 열분 남짓의 할머니들만이 구룡폭포를 구경할 수 있었다.
 
계곡물은 그냥 마실 만큼 맑았고, 산봉우리와 폭포는 내 눈을 호강시켜주었다. 할머니들과 함께 신천지에 온 느낌이었다. 멀리 바위절벽에 새겨진 '김일성 장군 만세' 구호만이 여기가 북한 땅임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현실 같지 않았다. 왜 노래까지 만들어서 금강산을 찬양했는지.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노래가 절로 나왔다.
 
금강산 해수욕장 구경, 북한서커스 관람, 온천까지 즐기고 다시 휴전선을 넘어 설악산으로 내려왔다. 설악산 콘도로 오가는 버스에서, 아무도 창밖의 설악산을 구경하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보는 눈이 높아진 덕분에 설악산은 그냥 밋밋한 산이 되어버렸다. 그날 밤 봉사자들도 할머니들도 금강산 이야기로만 꽃을 피웠다.
 
그때 내가 백수가 아니었다면, 또 '꽃할머니'들과 함께 활동하지 않고 있었다면, 어찌 그리 아름다운 추억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그냥 남조선의 우중충한 실업자였을 뿐이었겠지... 이제 살아계신 할머니도 이십 여분. 게다가 다들 초고령이어서 금강산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도 힘들겠지만, 갈수만 있다면 그 꿈같은 추억을 다시 만들어 보고 싶다. 단 한분의 할머니만 가시더라도 동행하고 싶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북한관광 재계가 미국의 거부로 막힐 것 같다는 속보가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마음대로 드나드는 북한을 우리만 못 간다는 게 웃기고,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이미 북한관광을 했던 것까지 생각하면 답답하다. 시간이 지나며 미국에 대한 경제적 문화적 종속은 점점 줄어든 것 같은데 정치적 종속은 줄어들 기미가 없다. 아니면 해뜨기 전이 가장 춥듯이 정치적 독립 직전의 마지막 발악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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