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운명과 숙명 매운바람은 굽이굽이 계곡을 휘돌며 아직 잎을 달고 있는 나무를 매섭게 추궁하고, 바쁜 걸음으로, 간간이 가지에 남아있는 잔설을 파란 하늘로 희뿌옇게 날리며 산을 넘는다. 그 길 위에 뭇 생명이 몸을 낮추어 바람을 예우하고 가르침을 되새긴다. 재 너머 또 다른 세상은 앞일을 예감하며 부스스 몸을 떨고 있다. 해마다 이맘 때 쯤 이면 살아온 세월과 새삼스레 마주하게 되고 켜켜이 쌓여 묵어가는 의문들이 고개를 든다. 어떤 인연으로 나는 저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산을 만나게 되었을까? 어떤 인연으로 부모와 형제, 아내, 자식, 친구를 만나게 되었을까? 나와 스친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생명, 사건은 나와 어떤 인연이 있을까? 나는 왜 이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왜 이 시대에 살고 있을까? 이런 모든 일이 단지 우연일까? 필연일까? 운명일까? 숙명일까? 사전은 "우연이란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아니 이 세상에 인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나? 사전은 또 "필연이란 사물 또는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닐까? 사전적 정의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라지만 . . . 나는 오늘 아침 갑자기 칼국수가 먹고 싶었다. 몇몇 친구들과 만나 놀던 중 한 친구가 자기 집으로 점심식사를 초대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집에 갔더니 점심 메뉴가 칼국수였다. 초대한 친구는 며칠 전부터 우리들을 초대하기로 생각했고 메뉴를 칼국수로 정했다. 나는 초대 대상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 날 점심에는 필연적으로 칼국수를 먹게 돼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초대의사를 알지 못했고, 메뉴 또한 알지 못했다. 따라서 내 입장에서는 내가 칼국수를 먹은 것은 완전히 우연한 사건이다. 내가 칼국수를 먹게 된 사건도 우연이지만 그에 더해 아침부터 먹고 싶었던 음식을 뜻하지 않게 먹게 된 점도 우연이다. 이와 같이 처한 입장에 따라 동일한 사건임에도 우연과 필연이 공존한다. 위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연과 필연이 한 가지 사건에서 경합하기도 하고 서로 보완해 주기도 한다. 또한 필연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연의 매개가 필수적이다. 내게 우연히 급한 일이 생겨서 모임에 참석치 못했다면 내가 칼국수를 먹는 필연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와 관련해서 우연과 필연은 어떤 모습과 방법으로 작용할까? 인간은 여성의 몸속에 수정란으로 착상되는 순간 비로소 성립되고 출산으로써 독립된 인간으로 세상에 자리한다. 그 전에는 다양한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정자와 난자의 만남은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질적 도약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비상하며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독보적 존재로 진화한다. 인간은 출생과 동시에 주변 환경과 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며 그 관계에 의해서 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는데, 성장과정에서의 관계에 의해서 어떤 인간이 될지 결정된다. 한 인간이 온전한 독립체로서 성장하기까지 그 부모의 의지와 환경에 크게 영향 받기는 하지만 부모의 의지와 환경이 영향을 미치는 과정마다 우연이라는 이름의 확률이 연결고리로 개입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확률에 지배당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의지가 아무리 확고하다 하더라도 확률 100%가 될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100%의 확률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어떤 존재나 사건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 확률이라 함은 무엇을 성립하게 하는 가능성의 크기를 말한다. 물론 확률은 조건에 의해서 크게 달라지지만 조건이 나쁘다고 해서 "0"가 되지는 않는다. 고성리에 살고 있는 내가 아무런 사전 약속 없이 내일 점심때에 이장을 만날 확률이 유럽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날 확률보다 현저하게 크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이장을 만날 확률이 "100"이 될 수는 절대로 없고, 유럽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날 확률도 "0"는 분명 아니다. 친구가 한국에 올 용무가 생겨 왔다가 내가 보고 싶어 연락 없이 갑작스레 올 수도 있으니까. 삶의 과정에서 모든 관계는 자신을 포함한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의지와 우연에 의하지만 우연에 영향 받는 부분이 절대적이다. 나는 오늘 시청 앞을 걷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났다. 시청에 갈 용무는 오늘 아침 갑자기 생겼다. 나 자신도 어제까지는 시청 앞을 지나는 일이 생기리라고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 친구는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으므로 서로 간에 잊고 있었고 따라서 서로의 동정이나 일정을 알지 못했다. 그 친구나 나의 입장에서는 서로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아서 우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객관적 입장에서 이를 바라보면 도저히 우연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친구와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친구와 나 둘 중 누구든지 전화 한통이면 된다. 그러나 서로 간에 아무런 의지나 의도 없이 그야말로 우연히 만나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요소가 정치하게 조직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시청 또는 그 부근에 갈 용무가 있어야 하고, 꼭 그날 그 시간에 그곳을 걷고 있어야 하며, 무관심하게 지나치는 많은 사람에 불구하고 그 친구를 알아 볼 수 있어야 하고,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꼭 그 친구를 만나야 한다. 약속시간에 늦을 수 있는 수많은 일이 발생할 수도 있고,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많은 일이 생길 수도 있으며, 약속이 취소될 수도 있고, 약속시간이 변경될 수도 있다. 그 친구도 내 입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상황이 발생해야만 비로소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 친구와 내가 만날 수 있는 확률은 "1/무한대"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길을 걷다가 어디에선가로 부터 날아온 축구공에 등을 맞았다. 나는 누가 공을 찼는지, 어디서 찼는지 등 아무것도 모를 뿐 아니라 등에 맞을 의사는 더더욱 없었다. 공을 찬 사람도 나를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일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공을 가진 사람은 자기와 함께 공놀이를 하는 상대방을 향해서 공을 찼지만 어긋나는 바람에 내 등에 맞았다. 내 등에 맞을 확률보다 허공으로 날아가거나 다른 사람에게 갔을 확률이 무한하게 큼에도 불구하고 무한하게 작은 확률로 내 등에 맞았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모든 존재와 사건은 우연이기보다는 필연이다. 무한하게 작은 확률로 발생하는 사건이 연속적으로 결합해야만 비로소 또 하나의 극소의 확률 즉, 우연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연과 필연은 사전적으로는 반대말이지만 결국 같은 말로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골라 쓰이는 듯하다. 그렇다면 내 의지,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기는 우연, 필연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그런 현상을 우리는 무어라 부를까? 운명? 숙명? 인간의 의지, 의도가 배제된 상태에서 발생하는 온갖 우연, 필연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도하지 않은, 또는 의도에 불구하고 기대하지 못한 사건이 희박한 확률로 발생할 때 우연이라고 한다. 우연은 내 의지,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요소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럴 때 우리는 운명 또는 숙명이라고 한다. 운명, 숙명의 사전적 의미를 알아보자 운명 :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숙명 :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해진 운명. 또는 피할 수 없는 운명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해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의 주체자로 우리는 그동안 절대자를 상정해 왔다. 따라서 운명, 숙명은 절대자에 의한 예정설을 전재로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운명, 숙명이라 일컬어지는 제 현상에 대해 물리적인 측면에서의 인과의 결과로 설명할 수도 있고, 확률로 설명할 수도 있다. 과학이 좀 더 발달한 미래 시점에는 또 다른 관점에서 운명을 정의할 수도 있고 초인간적 힘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이를 수도 있다. 절대자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인간지성의 발달과 과학에 힘입어 과거에 비해 절대자의 역할이 현저하게 축소되어 왔음을 감안할 때 조심스럽게 전혀 새로운 전망을 할 수 있는 지점에 우리가 서있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우연 #필연 #운명 #숙명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