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단녀'에겐 퇴직금도 사치

11개월 일하면 주어지는 '강제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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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mingming216)등록 2020.02.09 00:20
프리랜서 여행가이드 활동을 시작하며, 육아로 '경단녀'가 되었다가 여행가이드로서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신 분을 꽤 뵈었다. 그분들의 해설로 이뤄지는 여행에 몇 차례 참여했는데, 이런 사람들이 그동안 사회 생활을 안 했다는 건 정말 국가적 손실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나도 능력이 출중한 분들이셨다. 여행가이드란 직업은 대부분 프리랜서 형태로 고용되며, 다른 직업에 비해 위계질서 없이 홀로 고객을 상대로 능력을 펼치며 일할 수 있기 때문에 느지막한 나이에 제2의 직업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나도 35세에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니 많이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베테랑 가이드께서 "이 업계에서 그 정도면 아기야, 젊으니까 열심히 해봐"라며 격려해주신 기억이 있다. 

경단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다. 경단녀를 환영하는 직장이 적기 때문이다. 여행가이드를 시작한 경단녀 대부분은 내게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점이 좋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이 가이드란 직업은 안정적인 고용형태를 애초에 포기하고 남은 선택지란 점에서 다소 슬프기도 했다. 물론 개중엔 딱히 안정적인 일자리나 고정적인 월급이 절실하지 않은 사람도 있긴 했지만.

여행 가이드는 아니지만, 어찌됐든 경단녀 딱지를 가까스로 떼고 재취업한 언니로부터 오늘 전화를 받았다. 지난 해 중순부터 일하던 직장으로부터 '강제 무급휴가' 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결혼 후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육아에만 전념하다, 아이 둘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는 재취업을 위해 디저트 만드는 법을 열심히 공부했던 그녀. 지금의 직장에 출근하기 전까지 실제로 카페에서 알바를 뛰며 항상 성실하게 살았다. 현 직장에 새로운 자리가 났다는 사실은 지인의 귀띔으로 알게 되었고, 이력서 제출 및 면접 등 정식 채용 과정을 거쳐 들어왔다.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이지만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계약직이지만 알바보다는 좋은 조건이라고 판단됐고, 마침 카페 일이 육체적으로 힘들다고 느낄 때였다. 많은 서울 사람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커다란 빌딩 안에 위치한 기업이었다.

일은 잘 맞았다. 함께 일하는 직원도 모두 상냥했다. 문제는 해당 기업의 '꼼수'였다. 매일 얼굴 보며 정을 쌓아가던 직원이 갑자기 "저 내일부터 한 달 쉬어요"라며 아쉬운 인사를 하며 자취를 감추면, 이후 다른 파트의 계약직, 혹은 아르바이트가 넘어와서 그 자리를 메우는 일이 아주 빈번했다. 알고보니 1년 일을 하면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기에, 그게 싫은 기업은 이렇게 11개월 일한 직원에게 한 달 '휴가'를 주는 것이다. 퇴직금 주기 싫어서 그러는 마당에 물론 무급 휴가다. 그리고 한 달 뒤 다시 채용한다. 커다란 사무실, 매일 마주치고 인사 나누는 직원이 50명은 되는데, 정규직은 손에 겨우 꼽을 정도였다.
기업이 이런 식으로 운영되면 가만히 있을 직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 기업은 십 수년 넘게 이런 방식으로 아주 잘 유지되고 있었다. 며칠 지내고 보니 많은 직원이 이에 반발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사무실 인력 대부분이 '경단녀'라는 데 있었다. 어차피 다른 갈 곳도 없으니, 대부분 한 달 쉬고 다시 일하러 온단다. 아이 학원 하나라도 더 보내려고 퇴직금도 포기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이들에게 왜 반발하고 저항하지 않느냐고 따져묻기는 힘들다.

계산해보니 그 언니는 올 여름에 일 시작한지 11개월이 될 예정이었고, 남들처럼 본인에게도 휴가 통보가 오면 내심 가족과 스케줄을 맞춰 해외로 놀러갈 생각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예상 밖의 일이 하나 더 터지고 말았다. 지금 응대할 손님이 많지 않으니, 당장 2월에 일하지 말고 3월에 나오라는 위로부터의 명령. 다른 계약직 직원 모두에게 같은 오더가 떨어졌다. 이로써 올 2월부터 5월까지, 본인의 11개월 스케줄과는 아무 상관 없이, 차례로 누가 언제 쉬어야하는지 30분 안에 모두 정해졌다고 한다. "바이러스도 걱정됐는데 집에 있으라니까 차라리 잘 됐지 뭐"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만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예상보다 빨리 잡혀서 인력이 모자라게 된다면? 언제든지 이 휴가 스케줄은 기업주의 뜻에 따라 바뀔 수 있겠다. 

매우 화나는 상황이나, 이 한 달 휴가는 '고용주와 노동자 상호 합의에 의한 선택'이란 점에서 이 기업에게는 결국 아무 잘못도, 책임도 주어지지 않는다. 경단녀의 인생에서 노동법은 이렇게나 무기력하다. 법을 고치는 것보다, 이런 기업을 신고하고 처벌을 기다리는 것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월급과 일터다. 이들이라고 반발하고 싶지 않겠는가? 결국 얻는 것보다 잃게 될 것이 빤히 더 많아보이는 상황에서 용기를 내기는 힘들다. 게다가 '그래도 경단녀를 받아줬으니 감사하다'는 생각은, 다른 궁리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산업이 타격을 받고있다. 이 분위기에서는 불안정한 고용형태 하에 있는 많은 사람이-특히 경단녀는-이렇게 강제 휴가, 혹은 해고를 당하고 있을 것만 같아 마음이 시리다. 언제 나를 위협할지 모르는 바이러스와 언제 나를 자를지 모르는 고용주, 뭐가 더 무서운 건지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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