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비밀화원이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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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태영(yonbora)등록 2020.03.12 14:09
『비밀의 화원』 프란시스 호즈슨 버넷 글.타샤 튜더 그림/시공주니어
 
 
2020년의 시작은 참으로 기억에 남을 겁니다. 바이러스 코로나 19의 위력은 발병 2달 만에 6대주를 감염시켰습니다. 우리 정부는 전국 초중고 학교 개학을 3주나 연기하도록 휴업령을 내렸고 천주교는 236년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교구의 미사를 전면 중단시켰습니다. 매일 눈뜨면 확진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핸드폰을 켜고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네요. 마스크 구매 취소 통보를 여러 차례 받고는 이제는 사려고 인터넷을 뒤지지도 않습니다. 다만 외출을 줄여 소비라도 막아볼 요량으로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고 있습니다.
 
집에서 맴돌며 책장 앞을 어슬렁대다 『비밀의 화원』을 집어 들었습니다. 왠지 이 갑갑한 생활에 숨겨놓은 화원이 하나 있으면 나만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바람으로요. 경칩도 지났지만 코로나 19로 올해 봄은 아직 까마득해 보입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이 책을 펼쳤습니다. 표지의 그림도 저를 부추깁니다. 남몰래 들어온 비밀의 화원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탐색하는 메리의 모습이 저에게 조용히 뒤따라 들어오라 하는 듯합니다. 메리의 말대로 저는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소공녀 세라』의 작가이기도 한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은 아이들의 삶을 애정이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버릇없고 밉살스러운 메리도, 자기 연민에 빠진 폭군 같은 콜린도 몹쓸 아이로 그리지 않습니다. 필요한 보살핌을 제때에,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열린 존재들입니다. 모든 아이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메리는 인도에서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극적으로 살아남아 고모부 집인 영국의 미셀스와이트 장원으로 오게 됩니다.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상처투성이가 된 고모부는 집을 돌보지 않고 외국으로 여행만 다니며 세월을 보냅니다. 그래서 6백 년 동안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방이 백 개나 되는 미셀스와이트 장원은 마치 거대한 납골당 같습니다. 음산하고 인기척 드문 버려진 저택입니다. 모든 것이 비밀스러운 이곳에서 요크셔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하녀 마사만이 살아있는 생명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저는 옷 입는 벱을 배워야겄네이. 다시 어려질 수는 읎는 노릇이니께요. 어느 정도는 지 일은 지가 알아서 허는 게 아가씨헌테 좋을 거예이. 우리 엄니는 늘 대갓댁 자식덜이 어째서 엄청난 바보가 안 되는지 이해가 안 간다구 그래이. 유모가 씻겨 주구, 옷도 입혀 주구, 꼭 강아지 새깽이마냥 델꾸 나가구 허니께!" 
『비밀의 화원』 42쪽
 
한 번도 제 손으로 옷을 입어 본 적이 없다며 삐뚤어진 아이처럼 구는 메리에게 던지는 마사의 팩트 폭격입니다. 진실을 쏟아내지만, 그녀는 온기 어린 마음으로 메리에게 다가갑니다. 거친 사투리도 애정을 담으면 진심이 전해지는지 평생 굽신대는 하인들과 무관심한 부모와 살아온 메리는 이런 마사가 싫지 않습니다. 메리는 마사를 통해 스스로 아이답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갑니다. 비록 혼자지만 뜰에 나가 흙을 만지고 놀고, 마사의 어머니가 보내준 줄넘기를 하며 처음으로 숨 가쁘게 뛰어봅니다. 무뚝뚝하지만 정다운 정원사 벤 웨더스타프 할아버지도 만납니다. 그러다 붉은가슴울새가 알려준 비밀의 화원의 열쇠를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마사의 동생 디콘은 자연의 아이입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질 때까지 요크셔 황무지를 누비고 꽃과 나무, 풀과 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으며 붉은가슴울새의 말로 붉은가슴울새와 대화를 나눕니다. 새끼 양도 그의 품에서 어미의 품처럼 편히 잠들고 다람쥐는 놀자고 디콘을 보챕니다.
 
황무지에서 자란 천한 아이인데다가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웃기게 생긴 얼굴에 꼬불꼬불하고 빨간 머리를 하고 있으면서도 메리가 자기를 마음에 들어하든 들어하지 않든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메리가 디콘에게 다가가자 상큼하고 싱그러운 히스꽃 향기며 풀내며 나뭇잎 냄새가 풍겼다. 마치 디콘이 히스나 풀이나 나뭇잎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비밀의 화원』 133쪽
 
10년 동안이나 버려지고 금지되었던 비밀의 화원이 메리와 디콘의 손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메마른 죽은 나무를 잘라내고, 뿌리 둘레는 파내어 공기가 들어갈 수 있게 흙을 솎아내었으며 새싹이 숨 쉴 수 있게 주변의 풀을 뽑아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맑은 공기는 메리를 살찌우고 노동은 허기지게 만들어 희멀겋던 얼굴에는 핏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메리가 곧 화원이고 생사를 같이하는 운명 공동체 같습니다.
 
항상 주인이 부재중인 미셀스와이트 장원에는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알지만 말할 수 없는 비밀입니다. 한밤중에 바람이 울부짖는 소리에 잠이 깬 메리는 그 소리를 따라가다 백 개나 되는 방 중의 하나에 발길이 멈춥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모부의 아들인 사촌 콜린을 만납니다. 방에만 갇혀 있으면서 아버지처럼 곱사등이가 되고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라며 자기 연민에 빠진 괴팍한 폭군인 콜린. 가끔 집에 들르는 아버지는 연약한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비참한 기분이 들어 겨우 잠든 모습만 보고 떠납니다. 콜린은 고립되고 가려진 존재입니다. 메리는 금기를 넘어 그런 콜린에게 다가갑니다.
 
자기 멋대로인 건 메리나 콜린이나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경인데 둘의 팽팽한 기 싸움은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싸우면서 크는 것처럼 콜린은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메리에게서 듣는 바깥세상의 이야기는 생의 의지를 샘솟게 합니다. 까마귀를 어깨에 얹고 주머니에는 다람쥐를, 품에는 새끼 양을 안고 빨간 여우와 함께 디콘이 콜린의 방을 찾은 그 날, 콜린은 더는 방안에서, 창문을 통해서 봄을 맞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봄을 한 번도 진짜로 본 적이 없는 콜린은 바깥세상으로 나가야겠다, 살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세 아이가 비밀의 뜰에 들어서자, 마법에 걸린 듯이 휠체어가 멈춰 섰고 문이 닫혔다. 그제야 콜린은 손을 내리고, 디콘과 메리가 그랬던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둘러보고 또 둘러보았다. 아름다운 초록색 베일 같은 보드랍고 조그마한 잎들이 담 위에, 땅 위에, 나무들 위에, 한들한들한 잔가지 위에, 덩굴손 위에 죽 깔려 있었다. ..(중략)
날개가 팔랑대는 소리, 희미하고 감미로운 피리 소리, 콧노래 소리, 그리고 향기, 또 향기. 콜린의 뺨 위에 닿은 햇살은 부드러운 손길처럼 따뜻했다.
                                                                              『비밀의 화원』 289쪽

봄의 기운은 콜린이 휠체어를 물리고 일어나 스스로 걷게 만드는 동력이 됩니다. 메리와 디콘은 무한한 용기와 믿음을 주는 것으로 친구를 응원합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당신의 눈을 믿기 어렵습니다. 죽음이 늘 가까이 있었던 아들이 생기 도는 얼굴로 뛰어오는 것을 보았고, 아내가 죽은 뒤 문을 잠그고 열쇠를 묻어버렸던 뜰이 이렇게 다시 살아나다니 말입니다.
 
『비밀의 화원』은 흑백 그림에서 총천연색의 영상으로 바뀌듯 불모지가 생명력 넘치는 새싹과 동물들이 가득한 정원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또 자기 고집과 연민으로 가득 찼던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고 자연과 교감하며 삶을 배워가는 동화입니다. 그리고 아이답게 자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근조근 알려주는 따뜻한 육아지침서입니다. 타샤 튜더의 그림은 그녀답게 아이들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고 있어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얼어붙은 것 같지만 곳곳에서 미담이 새싹처럼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대구 경북 지역에 끊임없이 지원하는 의료진이 있고, 유명인사들이 기부금을 전달하고 본인 소유 상가의 임대료를 내리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인천의 한 구호단체서는 마스크를 직접 만들어 근처 미혼모 시설에 전달했고, 어느 식당에서는 마스크를 기부하면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며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팬데믹(Pandemic 대유행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이 상황에서도 생명력을 느낍니다. 겨우내 꽁꽁 얼어붙은 땅을 힘겹게 밀고 올라오는 푸른 새싹의 그것처럼 말입니다. 봄이 오고 있네요. 아직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여 운신의 폭을 줄여야 할 때지만 나의 비밀화원에 꽃이 피고 나비가 찾아들면 이 시간이 훨씬 괜찮아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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