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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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신(lysn)등록 2020.03.29 11:46
나를 위하여
 
 
오늘 날씨가 심상치 않다. 하늘엔 온통 먹구름이 낮게 깔리고 겨울 끝자락에 걸린 스산한 바람은 처마에 달려있는 자그마한 풍경을 잔인하게 다그친다. 고통을 못이긴 풍경은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다급한 비명을 질러댄다. 수풀은 박수치듯, 환호하듯 몸을 떨며 요란한 환호성으로 허리 젖혀 바람을 영접한다. 자그마한 마당에서 지난여름을 추억하던 나뭇잎 몇 개는 개구리 뛰듯, 나비 날 듯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어지러이 날려서 몸 누일 곳을 찾지 못하고 떠돈다. 지금은 고통스럽고 비굴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 . . .
 
이순의 세월을 지나오면서 나는 무언가가 되려고 아등바등 살아왔다. 어려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이고자,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사람이고자, 성년이 되어서는 가정과 회사와 사회와 국가에 필요한 사람이고자 했으며, 더불어 남에게 존경받는 사람이고자,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이고자 했다. 심지어는 성현들의 말씀대로 따라 해서 그분들 근처까지의 수준에 이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가당치않은 욕심도 가졌다.
 
지금도 그런 욕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해서 내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존경하는 사람, 흠모하는 사람,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들을 보면서 때론 희망에 들뜨기도 하고,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저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시기에 내적, 외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건만 나는 아직 성취는커녕 그들의 말을 이해하기도 벅찬 수준임을 뼈아프게 자각한다. 한편으론 그들로 인해 아둔한 나 일지라도 지금이나마 새롭게 깨달을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고 많이 부끄럽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추구하기에는 자질과 실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장래의 어떤 시기"까지는 누군가의 안내에 의지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안내자에게 새로운 길을 묻게 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지표삼아 나아가다 보면 어떤 수준까지 도달하는 길이 훨씬 수월하겠지.
 
마침내 더 이상 안내자가 없게 되는 상황이 오면 우리 중에 운이 좋고 능력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들에 의해서 우리는 전인미답의 새로운 길을 가게 된다. 누구나 이런 영광스런 길을 꿈꾸지만 모두에게 허락되지는 않는다. 이 여정에서 나를 비롯한 대개의 사람에게 "장래의 어떤 시기"는 평생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선택된 소수에게만 허용되는 그 지난한 길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좌절하게 된다. 소수에게만 허락된 이 길은 어떤 이들에게는 그래서 더욱 가치 있는 길이 되기도 하지만 나와 같은 대개의 사람들에게는 언감생심 범접할 수 없는 전설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동경한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알고 싶고 가능하다면 따라하고 싶기도 하다. 그들은 하루를 어떻게 지낼까? 그들도 사람이니까 잠도 자고, 밥도 먹고, 똥도 누고 때론 화도 내고 심술도 부리고, 은밀히 미워하는 사람이 불행하길 바라기도 할까? 친구와 동료를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할까? 그 들도 잠자리에서 내일을 걱정할까? 말 안 듣는 자식을 미워하기도 하고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외모도 가꾸고 과장된 몸짓과 아첨을 하기도 할까? 가끔은 남 없을 때 신호등을 위반하기도 하고 노상방뇨를 하기도 할까? 맛있는 음식을 탐하기도 하고 멋진 이성에 끌리기도 할까? 그들도 죽음을 두려워할까?
 
왠지 나의 우상들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막연하게 그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여자 선생님들은 화장실도 안가는 줄 믿었던 것처럼 . . . .
 
이런 터무니없는 망상은 먼저 나의 정신을 가두고 내가 존경해 마지않던 그 사람들을 가두고 자칫하면 그들을 위선자로 만들 위험을 갖고 있다. 성현이던 그 누구 던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점 많은 한 인간일 뿐이다. 다만 특정한 부분에서 그들은 나의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다. 세세하게 살펴보면 나도 그들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나은 부분도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나에게 부재한 것들을 끊임없이 욕망한다. 이러한 나의 욕망은 때론 충족되어 나를 만족시키기도 하고 좌절감과 열등감으로 남기도 한다. 충족된 욕망은 잠깐의 행복감을 허락할 뿐 순식간에 그 자리를 새로운 욕망으로 채운다. 채워진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니다.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인해 내 마음속에는 질투와 열등감에 기반 한 감출 수 없는 저열함이 있다. 그들을 내 수준까지 끌어내려서 그들과 내가 동등한 존재임을 확증하고 싶다. 어차피 내가 그들 수준에 도달할 수는 없으니까 그들을 내게 하향평준화 시키는 일이 내겐 꼭 필요하다. 그래야 내가 그들과 동등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 열등감 보상의 대가가 그들의 희생을 전제한다면 심각하게 이를 다시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그들의 재능을 질투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재능이 나에게 유익함을 재인식하고 그들은 결국 나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쓰이는 존재라고 받아들이면 나의 열등감, 질투심은 자연스럽게 내 존재감의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나와 같은 일반에게 쓰이지 않는다면 대개의 재능은 의미가 없을 테니까.
 
내가 가진 이런 저열함으로 인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천재들이 희생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슬프다. 그 천재들에게서 결점을 찾아 천재성을 덮어버리는 일은 아주 쉽다. 그들은 천재성을 가진 분야 외에는 어쩌면 일반인에 비해 훨씬 취약한 부분이 많을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의 망상을 투사하지 않고 그들의 실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나의 열등감도 현저하게 줄어들어 한결 자유롭게 되고 그들 또한 자유로울 수 있으련만.
 
그런 의미에서 셀럽들이 때론 불쌍해 보인다. 그들은 대중들로부터 부와 명예와 존경을 받지만 그 대가로 엄청난 불편함과 부자유를 받아들여야 한다.
 
소시민인 나에게 보장되는 익명성, 일반의 시각과 기대에서의 자유로움, 적당한 일탈의 기쁨 등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소시민만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 나의 열등감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나는 평생을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아 왔다. 그 결과가 지금의 나이다. 결과의 성패에 불구하고, 내가 평생 존경하고, 흠모하며, 동경하는 사람과 흡사한 누군가가 되기 위해서 애쓰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렇다면 나란 진정 누구일까? 라는 물음에 이르렀고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하든 나는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아니다. 굳이 내가 되기 위하여 애쓸 필요는 없다. 내가 흠모하는 어떤 사람을 100% 똑같이 모방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그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사람 또한 내가 될 수 없다.
 
요즘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무언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나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이기를 원하는 사람도 나다. 그 둘은 우열이 없을 뿐 아니라 다르지도 않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온전하게 독자적이며 개별적인 사람은 없다. 내가 아무리 독자적이길 원해도 나는 그리 될 수 없다. 나는 주변의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환경요소의 복합체일 뿐이니까. 따라서 온전히 독자적인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외부 환경과 서로 상호작용하며 끊임없이 적응해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체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개성적이고 독자적일 때 비로소 전체는 더욱 풍성해지고 개성과 독자성은 그 존재가치를 인정받는다. 마치 모자이크의 한 조각처럼. 모자이크가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아름답기 위해서는 구성요소 각각의 개성과 독자성을 전제로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개성 넘치는 한 조각일지라도 모방되어서 두 개 이상이 되는 순간 그 가치를 상실한다.
 
어느 방송에선가 이효리는 어떤 어린이와 장래 꿈과 관련한 대화에서 "꼭 훌륭한 사람, 멋있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 그냥 아무나 되어도 괜찮아"라고 했다. 그렇다 세상 그 누구도 그냥 아무나 중의 한사람일 뿐이다. 아무리 높게 학식을 쌓은 사람도, 득도를 한 사람도,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쥔 사람도, 헤아릴 수 없게 많은 부를 쌓은 사람도,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사람도.
 
쑥은 민들레를 부러워하지 않고,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고, 쥐는 고양이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고양이는 사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시내는 강을 부러워하지 않고 강은 바다를 부러워하지 않으며, 땅은 하늘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는 나 아닌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삶이란 진정 무엇일까? 내가 동경했던 그 사람은 스스로 만족할만한 삶을 살았을까? 혹시 그 사람도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동경하여 그에 못 미치는 자기의 삶을 후회하고 불행해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를 동경하고 흠모했던 나의 삶은 뭘까?
 
고승대덕을 비롯한 종교인, 저명한 예술인, 사업가 등등 우리가 흔히 성공적 삶을 살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의 전기를 보면 하나같이 모두 고통을 감내했고 어떤 이는 죽을 때까지 고통스런 삶을 살았으나 우리는 그들의 삶을 가치 있는 삶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삶에 대해 많은 후회를 했고 불만족스럽고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렇다면 소시민의 삶과 그들의 삶은 어떻게 다르며 어떤 게 더 가치 있다 말할 수 있을까?
 
삶에는 누구든지 시시각각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따라 충족되기를 갈망하는 수많은 욕구가 생긴다. 그걸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 이전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를 들면 갈증 같은 경우이다. 우리는 누구나 변화하는 욕구와 필요에 불만족 또는 행복을 느끼며 산다. 그러한 삶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
 
내가 흠모하던 철학자, 종교지도자, 정치가, 예술가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그들의 일상은 어떨까? 그들은 하루 스물네 시간을 내가 상상하는 것과 같이 멋지게 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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