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암과 싸우는 가족 1] 최악의 순간으로 기억될 2020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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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민(mingming216)등록 2020.04.08 16:04
지난 2월 고향에 계신 아빠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통화 도중 아빠는 무거운 목소리로 "아빤 다 괜찮은데, 엄마가 걱정이다"라고 읊조리셨다. 엄마는 옆에서 "말하지 말라니깐 참"이라고 하시며 이윽고 전화를 건네받아 별 일이 아니라며 나를 다독였다.

당시 아빠의 검진차 들른 병원에서 엄마도 덩달아 초음파를 봤는데, 난소의 혹 모양이 조금 좋지 않으며, 일단 수술이 필요하단 얘길 들으신 거다. 피검사 수치는 정상이었기에 암일 확률은 아주 낮으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암 전문의가 있는 병원을 소개받으셨다고 했다. 수술만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소개받은 서울 근교 병원에 수술 날짜까지 예약했다. 워낙 씩씩하신 엄마는 아빠와 함께 서울에 오셔서 오랜만에 우리와 함께 밥도 먹고, 괜찮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엄마는 수술 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불안해하시는 것 같았다. 병실을 배정받은 엄마는 "그냥 거기서 수술 시켜주면 되지, 왜 더 큰 데로 보냈겠냐"고 하셨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인 거니까 너무 걱정 마"라고 얘기할 뿐이었다. 그 때까진 나도 엄마가 암이 아닐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외가측 가족 중에는 암투병을 하는 분이 한 명도 없기도 했고, 피검사 수치가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출산도 이미 예전에 마치시고 올 해 60세가 되셨으니 이 나이에 난소 절제는, 수술 후 이전처럼 건강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 아주 큰 일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2020년 3월24일, 엄마의 수술날. 코로나19 덕(?)에 오전에 출근하던 전 직장으로부터 무기한 휴가를 받았고, 새롭게 구한 오후 출근 직장으로부터도 출근 연기 통보를 받은 나는 수술방으로 들어가는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엄마가 아빠의 얼굴도 보고 수술방에 들어가셔야 할 것 같아 간호사 분에게 잠깐만 기다려주시길 부탁해봤지만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보호자는 한 명만 안 쪽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순간 이걸 잊어버린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수술실 쪽으로 오라고 난리법석을 떤 것이다. 아빠는 1층에만 계실 수 있었고, 거기에도 수술실이 있어서 그 쪽에서 엄마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는 아빠랑 통화하는 내 모습만 지켜보다가 이내 끌려들어가셨다. 이 때도 나는 수술 중 불의의 사고로 엄마를 못 보게 될, 아주 낮은 확률의 경우에 대해서만 걱정했던 것 같다. 

두 시간 반 정도면 끝난다는 수술이었는데 세 시간이 지나도, 세 시간 반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코로나19 때문에 아빠와 같이 엄마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한 명은 수술실 앞 의자, 한 명은 1층 의자에 앉아있으면서, 한 시간마다 교대를 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수술실 앞 의자에 대기하고 있을 때였다. "***님 보호자분 잠시 들어오세요"라는, 만 36년 평생 최고로 무서운 안내멘트가 흘러나왔다. 걱정을 가득 안고 수술실 문을 열었다. 엄마의 피가 튀어있는 수술용 앞치마를 두른 선생님이 나오셨다. 그 혹이 결국 암이었다고 하신다. 금세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몇 기냐고 물었고, 항암치료 등에 완전히 무지한 나는 앞으로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거냐고도 물었고, 이후 수술 자체는 잘 된 거냐고도 물어봤다. 초기라고 볼 수는 있지만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야 정확히 알 수 있는 상황. 게다가 혹도 수술 도중 터져서 전이 여부를 확인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고 말해주셨다. 엄마가 불쌍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1층에 계신 아빠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막막했다. 일단 눈물을 좀 닦았다. 

아빠는 너무나 실망한 표정이셨다. 한 동안 말이 없으셨다. 이번엔 내가 1층으로 내려왔다. 남편과 언니 등 가까운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남편에게 전화로 잠시나마 위로를 받았다. 아빠는 수술실 의자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나는 암환자 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졌다. 암환자라면 대부분 가입하는 커뮤니티가 있었다. 바로 가입했다. 난소암 정보를 마구 찾기 시작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엄마는 회복해서 병실로 옮겨지셨고, 아빠가 엄마와 이야기를 조금 나눈 뒤 내려오셨다. 지금 주무시면 안 되니까 내가 옆에서 조금씩 말도 걸고 엄마랑 얘기하라고 하셨다. 바로 올라갔다. 눈을 거의 감은 채 숨을 몰아쉬고 계신 엄마 얼굴을 보니까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모에게도 전화가 왔다. 바보같이 회복중인 환자를 코앞에 두고 암 얘기를 했다. 우는 이모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눈물이 났다. 엄마는 그 때 당신이 암환자란 걸 처음 아신 것 같다. 힘겹게 숨을 내쉬며 "얼마 정도 됐다니?"라고 물으셨다. 그래도 초기에 발견된 거라고는 말씀을 드렸지만 조직검사 결과가 어떻게 바뀔지 몰라 불안한 마음이었다. 얼음장 같이 차가워진 다리와 발을 덮어드리고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뚝뚝한 딸이었다. "수술 잘 됐대 엄마, 잘 했어, 수고 많았어" 라고 얘기했지만 앞으로 얼마나 힘들지가 더욱 걱정됐다.

엄마의 입원 기간동안 아빠는 나와 남편 둘이 살고있는 우리 집에서 지내시게 되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암 가능성에 대해 겁을 거의 주지 않고 자꾸만 안심시키던 이전 병원 욕도 했고, 혹이 왜 터졌겠냐며 기술 부족 아니냐며 사실상 열심히 엄마를 살려주신 애먼 의료진도 욕했다. 그저 너무 실망해서 화가 났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더 일찍 엄마 데리고 건강검진을 갔어야 했는데"라고 후회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빠랑 같이 병원에 이번에 간 게 천만 다행이지"라며 긍정적인 부분을 살짝 얘기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다중이'가 따로 없었다. 

아빠는 가만히 들으시다가 "이미 벌어진 일, 이겨내야지 뭐, 그렇지 않겠어?"라고 한 마디 하셨다. 순간 정신이 조금 들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엄마에게 용기를 주고, 이 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거지, 욕하고 화내고 후회해봐야 상황은 달라질 게 없었다.

소주 한 잔이 땡긴다시는 아빠, 비보를 접한 남편을 데리고 집 근처 식당에 갔다. 음식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스펙타클한 일들이 벌어질지는 예상하지도 못한 채, 나는 이미 세상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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