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전에: 오마이뉴스에서 에세이 <임계장 이야기>의 작가 조정진 인터뷰를 읽었을 때 나도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사 링크: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641108)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우리 아버지도 임계장인데…' 아버지는 공장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다. 그것도 2개월 계약직이다. 우리도 세상 모든 부자 관계와 다름없지만 책을 읽기 전에 아버지와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우리 집에 오는 산타클로스는 신발장 위에 선물을 놓았다. 빨간 양말이 없어서일까? 신발장 위에는 검은 봉지가 있다. 새우깡, 인디언밥, 포테토칩. 눈치 빠른 딸아이는 산타에게 아무런 기대가 없다. 그녀에게는 과자를 사 오는 아빠가 있을 뿐이다. 나는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까만 봉투에 과자를 담아 선물로 주는 산타라니…
▲ 팬더처럼 아버지 목에 매달려 있는 여섯 살 적의 나 ⓒ 송경석
아버지는 더 이상 산타 연기를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다 컸다. 딸은 집을 나갔고 아들은 아버지를 인터뷰 대상으로 정했다. 까만 봉투 속 과자가 지금 아버지와 내 사이에 있다. 그리고 나는 커피를 따랐다. "요즘 하고 있는 일은 어떠세요?"
1999년부터 경기도 시흥에 살고 있는 송인재(62)씨는 청소 일을 한다. 반도체 부품을 조립하는 공장에서 일한다. 작업실, 사무실, 화장실, 휴게실 가릴 것 없이 주변을 정리한다. 그것도 2달짜리 계약직이다. (그는 일용직이라고 부른다.) 그가 일을 시작한 것은 다섯 달 전부터다. 계약이 만료되기 직전 운 좋게 재개약이 몇 번 이어졌지만 이달 부로 계약은 끝이 난다. 다음 계약은 미지수다. 그 전에는 1년 넘게 병상에 있었다. 지금은 병원에 한 번도 다녀보지 않은 사람처럼 일하고 있다.
"힘들지는 않지. 바쁠 때 잠깐 도와주는 거니까. 집채만 한 커다란 기계랑 책상만 한 작은 기계가 공장 안에 있어. 사람들은 거기서 부품을 만들고 조립을 해. 나는 일할 때 생기는 오물이나 쓰레기들을 치워. 보통은 거기 아줌마가 주로 하는데, 공장이 바빠서 나를 고용한 거야.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
그는 작년에 환갑이었다. 그래도 아직 일을 하고 있고 계속 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년이면 국민연금도 나오고 나도 취직할 텐데… 그만 좀 쉬어" 그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한다. "넌 네 인생 사는 거고…"
▲ 스무 살의 아버지. 서울농대에 가기 위해 재수하던 시절. ⓒ 송경석
깊은 산골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은 농사였다. 할아버지의 일을 도와 땅 가까이서 일했다. 그러다 20대 중반이 다 되어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서는 땅에서 자란 과일을 팔았다.
"청과라고 해야 하나. 과일 파는 일을 했지. 도매업이었고.. 천호동에서 일을 시작했어. 그때는 적성에 맞고 안 맞고 따질 것도 없이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냥 했지. 그러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이렇게 살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서 회사를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것이 안산에 온 이유였다. 고향에도 공장은 많았지만 매형이 있는 안산의 공장으로 왔다. 농심의 계열사로 잘 알려져 있는 '율촌화학'에서 15년 동안 일을 했다. 일을 하다 누나 지인의 소개로 내 어머니를 만났다. 그리고 안산 옆 시흥은 정착지가 되었다. 그 이후 아버지는 잘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여러 일을 했다. 이 이야기를 할 때 아버지의 눈빛이 바뀌었다.
▲ 20여 년 전 율촌화학 노동조합원일 당시의 아버지. 이날 기념 행사에서 단막시를 지어 최우수상을 수상하셨다고 한다. ⓒ 송경석
"원래는 세탁공장, 그러니까 옷걸이 같은 재료를 파는 도매 공장을 하고 싶었는데.. 세탁소를 차렸지. 회사 생활도 질리고 해서. 세탁소가 잘 안 되고 결국 이런저런 영세업을 했어. 콜밴이나 퀵, 운수업도 하고. 지금은 나이도 나이니까 단순노동 말고는 할 일이 없어. 그렇다고 나이든 사람들 모두가 이런 일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황이 이러니까 새로운 뭔가를 시도할 여유는 없었지"
이 대목에서는 나도 얼굴빛이 변한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사업을 시작하다니. 나도 가족들도 원망이 많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플 때 빼놓고는 일을 쉰 적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묻는다. "아버지 뭐 새롭게 배울 생각은 없어?" 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아니 여유가 없어보였다. "몸도 힘들고 남은 날은 별일 없이 편하게 보내고 싶어…" 일을 하지 말라고는 못할망정 다른 일을 찾아보라니. 나도 철들려면 멀었다. 아버지가 퇴원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병원에 있을 때는 처음에 아무 생각도 없었지. 머리를 다쳐서 정신이 없었으니까. 1년인가 병원에서 치료 받으면서 요양 생활을 했고. 통원치료를 1년 가까이 한 거지. 2년을 쉬니까 이게 뭔가 싶기도 했지. 다행히 회복이 되면서 지금 이렇게 일할 수 있는 거야"
몇 번이나 챙겼지만 또 물어보았다. "이제 병원 안가도 돼? 더 아픈 데는 없어?" "가도 소용없어. 팔이랑 골반 쪽이 조금 불편하긴 해도 어쩔 수 없지" 아버지는 당신 몸에 대해서는 항상 담담하다. 후유증은 있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를 아프게 한 것도 그가 하던 일이었다.
2018년, 책을 만드는 공장 창고 2층에서 그는 추락했다. 귀가 찢어지고 골반이 뒤틀렸다. 그때 나는 군대에 있었다. 가족들은 나에게 사고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나는 전역하기 직전에 사고를 알았다. 성격 탓일까? 아버지는 사고와 부상에 대해서 한 번도 화를 내거나 슬퍼한 적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그 심사야 알 수 없지만 표정과 표현은 과거에 대해 언제나 덤덤하다.
병원을 다녀온 이후에 그에게 남은 것은 통증과 가족이다. 병상에 누워있을 때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결국 남는 건 가족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눈치를 보며 몇 달 뒤에 잠시 들르는 친구도 있었고, 평소에 자주 연락을 하던 이도 끝끝내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 관계는 만나는 게 아니라 그냥 서로 지나치는 것 같아" 나에게 하는 말이다. 가르쳐주고 싶은가보다. 큰 기대 없이 사람 만나고 사람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 그리고 말을 잇는다.
"어물쩡거리다가 이 일 저 일 옮겨 다니면 안 돼. 확실한 무언가를 하나 만들어서 꾸준히 가야지. 그래서 내가 공무원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다른 뜻은 없어. 옛날에 고등학교 졸업만 하고 공무원 됐던 애들 지금은 얼마나 편하게 지내냐? 꼭 공무원이 되라는 게 아니라 너가 하고 싶은 일을 해. 그리고 계속 가. 그러면 되는 거지"
꼭 공무원이 되라는 말처럼 들리지만 나는 이미 할 일을 정했다. 안타깝게도 공무원은 아니다. 그 말을 하고 싶지만 이직한 딸 걱정에 내 이야기는 뒤로 물러났다. 딸에게 말한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회사가 커도 결국 스트레스 받지 않고 편하게 다니는 게 최고야" (아버지는 아들보다 딸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 같아 좀 서운했다.) 그리고 인터뷰는 방향을 잃었다. 내가 아들로 돌아갔듯 결국 그도 아버지로 돌아갔다. "죽을 때까지 마음 쓰이는 게 부모고 자식이야" 아버지는 공장에서 다친 후 저런 말을 자주했다. 난 저런 말이 싫다. 아버지는 한 시기가 끝난 것처럼 정리했다. 그의 마지막 같은 말을 들으면 괜히 어린 애처럼 뾰루퉁하게 투정을 부리고 싶어진다.
▲ 생후 두 달 지난 나를 안은 아버지. 엄마 품이 아니면 곧잘 울어 아버지가 나를 안고 있는 사진은 몇 장 없다. ⓒ 송경석
"시골에서 살고 싶어. 텃밭에 야채 심고 산도 있고 그 옆 냇가에서 다슬기도 잡고. 그때 가서 뭐 고기를 잡고 하겠어. 다슬기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 니 엄마는 도시가 좋다고 하는데 난 자연이 좋아. 노인정 이런 것도 성격에 안 맞고. 그냥 시골에 내려가서 마음 편히 살고 싶어. 그렇다고 '나는 자연인이다'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보면 죄 강아지 데리고 다니던데? 그래도 사람 사는 데는 인기척이 있어야지"
하지만 자신의 바람대로 당장 그렇게 살 생각은 없다고 한다. 아직은 품 안의 자식이다. 마음이 쓰이고 돈도 문제다. "아버지, 그래도 나중에 더 뭐 하고 싶은 건 없어?" 나는 다시 물어보았다. "나이 들어서 뭘 특별히 하고 싶지는 않아. 여행을 다니고… 그런 것도 모르겠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시골에서 계곡 있는 데서 살고 싶어. 내 손으로 해먹고 산책도 하고… 그 정도로 생활을 하고 싶어"
환갑이 넘은 아버지에게 세상 모든 아들이 그렇듯, 대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계속 도울 생각인 것 같다. "뭐 더 질문 없어?" 나도 질문 하나를 남겨두고 있다.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질문이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 지금까지 살아온 거 후회는 안 돼?" 아버지, 아버지… 그는 역시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옛날에는 멋지게 살 줄 알았어. 철저하게 계획대로 살 줄 알았지. 그랬다면 물론 좋았겠지" 그는 하나도 떨지 않았다. 괜히 속상한 건 내 몫이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누구나 후회는 있는 거야. 나도 그런 생각이 왜 없겠어. 그래도 지나고 보면 다 허무하게 느껴져"
있는 그대로를 지키며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만져졌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힘. 그는 그 힘을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기력 잃지 마세요.' 내 입에서 나오다가 멈춘 말이다. 그는 그만하자는 말을 했다. "오늘 저녁은 영계백숙이다" 나는 싱크대에 서있는 그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 영계백숙을 만들기 위해 아버지가 싱크대 앞에서 닭을 손질하고 계신다. ⓒ 송경석
나를 먹이고, 엄마도 먹고, 그도 먹을 닭 세 마리. 그는 계속 일할 것이다. 엄마도 일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를 인터뷰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나쁘지 않다"였다. 언젠가는 내 아이도 나를 앉혀놓고 이런 질문들을 하겠지? 그때는 나도 저 말은 꼭 하고 싶다. "나도 네 할아버지도 그리 나쁘지 않았어."
(인터뷰가 끝난 후 나는 <임계장 이야기>를 읽기로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삶도 틈틈이 글로 옮겨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버지가 내 글쓰기를 돕듯 나도 아버지의 삶을 돕기로 했다.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아온 그에게 그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다. 글도 쓰고 취직도 하고 첫 월급으로 삼계탕 한 그릇을 아버지에게 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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