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70주년에 공개하는 진실과 거짓 ++++++++++++++++++++++++++++++++++ 최규봉은 정말 팔미도 등대 점등작전의 "영웅"인가? MacArthur장군 만나 성조기를 선물로 받았다고 거짓말 Victory has many fathers, but defeat is an orphan. 서양 격언이다. "승리는 아버지가많고 패배는 고아다"라는 말이니까, 성공한 일에는 공로자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많고 실패한 일에는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천 앞바다 작은 섬 팔미도에는 하얀 등대가 있고 그 아래 기념비 하나가 있다. 거기에는 Douglas MacArthur(다글러스 매카앗서) 장군의 상반신 모습이 좀 어설프게 조각되어 있고 그 옆에는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제목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MacArthur의 비교적 정확한 발음은 "매카앗서"이므로 이 글에서는 맥아더 대신 매카앗서를 쓰기로 한다. 단, 아래 기념비 글은 적힌 그대로 옮긴다. "1950년 9월15일 한국동란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작전으로서 세계전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 작전을 성공하려면 팔미도 등대를 탈환, 점등해야 하므로 이를 위해 조직된 특공대는 유진 F. 클라크 미해군대위, F. 클락혼 미육군소령, 존 포스터 미육군중위, 계인주 육군대령, 연정 해군소령, 최규봉 KLO 고우트부대장 등 6명이었다. 9월14일 19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15일 0시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라"라는 다글라스 맥아더 사령관의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9월14일 22시 격전 끝에 등대는 점령하였으나 점등장치의나사못이 빠져 점화불능 상태, 칠흙 같은 어둠속에서 기진맥진 엎드려 있던 중 우연히 등대 바닥에서 최규봉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나사못이었다. 그래서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데 성공하였고 성조기를 높이 게양하였다. 초조하게 기다리다 등대불과 성조기를 확인한 맥아더 사령관은 연합국함대 261척에게 인천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렇듯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 특공대 중 군인 5명에게는 미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최규봉 부대장에게는 등대에 게양했던 성조기와 맥아더 장군이 친필서명한 사진이 증정되었다. 그 성조기는 최규봉부대장의 기증으로 현재 맥아더장군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으며사진과 감사장은 우리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제 6.25동란 50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가 간직한 희귀한 역사와 특공대원의 빛나는 공적과 아울러 이 작전에서 희생된 KLO대원들의 젊은 넋을 기리고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그들의 발자취가 깃들어 있는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 이 기념비는 인천상륙작전 50주년인 2000년에 새워진 것이다. 기념비에 새겨진 글은 당시 국방부 신문 '승리일보' 주간이었던 시인 구상 씨가 썼다. 구상씨는 KLO(Korea Liaison Office) 소속 민간인 최규봉(1923-2018)씨 말만 믿고 그대로 쓴 것 같은데, 이 글의 중요한 부분이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것이 문제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기로 한다. (KLO는 적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 유엔군에 제공한 민간인 조직이었다). 인천상륙 팔미도 등대 점등의 진실은? 우선, 팔미도 등대 불은 최규봉을 비롯한 6명으로 조직된 특공대가 켰다고 했는데, 최씨는 트루디 잭슨 작전(Operation Trudy Jackson) 즉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사전 준비작전의 멤버가 아니었다. 매카앗서 장군의 정보참모였던 차알스 윌로비(Charles Willoughby) 소장이 쓴 책 "MacArthur 1941-1951"에 의하면, 트루디 잭슨 작전 멤버는 클라크 해군 대위를 비롯해서 한국 해군소령(전 해군 인천기지사령관) 연정, 한국 육군대령 계인주, 미국육군소령 노버그, CIA요원 클락혼 그리고 2명의 통신부대 위관급 미육군장교 2명 등 도합 7명으로 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규봉은 자기도 트루디 잭슨 팀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 팀원 7명 중 4명은 일찍 인천을 떠나고 팔미도 등대 점등에 참가한 트루디 잭슨 팀 멤버는 클라크, 연정, 계인주 셋 뿐이었다. 당연히 클라크 회고록에는 최규봉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한국 기념비에는 최규봉이 어둠 속에서 나사못을 찾았기 때문에 팔미도 등대 불을 켤 수 있었다고 적혀있는데, 이것은 최씨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일 뿐이고, 트루디 잭슨작전 지휘관 클라크 대위가 남긴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등대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최씨는 등이 전기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클라크는 등에 새겨진 글을 보고 프랑스제 석유등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 최규봉은 등대에 불이 켜진 후 미국 국기 성조기를 자기가 등대에 게양했다고 했는데, 지휘관 클라크 대위는 누가 그 기를 게양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최씨는 또 그 성조기에 미군 암호가 적혀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보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 성조기에는 암호 같은 건 없었다. 최씨의 거짓말 중 가장 엄청난 거짓말은 그가 매카앗서 장군을 인천상륙작전 첫날 군함 위에서 만났다는 주장이다. 최씨는 물론 점등작전 지휘관인 클라크 대위도 매카앗서 장군을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최씨는 자신이 매카앗서 장군을 함상에서 직접 만났으며 윌로비 정보첨모가 자기에게 "소원이 뭐냐?"고 묻기에 등대에 게양한 성조기를 달라고 하자 윌로우비 장군이 매카앗서 장군의 허락을 받고 최씨에게 기를 가져도 좋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씨가 함상에서 매카앗서 장군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매카앗서 장군은 팔미도 등대 점등에 대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증거는 뒤에 자세히 설명함) 최씨가 이런 황당한 거짓말을 처음 한 것은 2003년 9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한 기사에서였다. 그 때는 클라크, 연정, 계인주 등이 모두 사망한 뒤였다. 클라크 대위의 수기가 그의 사망 후인 2002년 미국에서 "The Secrets of Inchon"(인천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최씨는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만일 최씨가 그 책을 읽었다면 자기가 매카앗서 장군을 만났고 소원이 뭐냐고 해서 자기가 등대에 꽂았다는 성조기를 달라고 해서 받았다는 황당한 거짓말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도 2003년 월간조선 기사를 그대로 믿고 있었으나 뒤늦게 클라크 수기를 읽은 뒤에는 최씨가 거짓말로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고 있구나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최규봉은 어떻게 매카앗서 장군으로부터 싸인한 사진을 받게 되었을까? 인천상륙작전 7년 후이며 전쟁이 끝난 지 4년 뒤인 1957년 8월 최규봉(당시 35세)은 서울의 미국대사관을 찾아가 무관 (Wells 육군대령)을 만난다. 그리고 매카앗서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본인이 직접 쓴 건지 번역사가 쓴 건지 분명치 않지만 영어가 좀 서툴다)와 자기가 7년 전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도 등대에 꽂았으며 장군으로부터 선물 받았다고 우기는 성조기를 고급스런 자개무늬 상자에 넣어 웰즈 대령에게 맡기면서 그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맞아 인천에 매카앗서 장군 동상 제막식을 거행할 때 장군에게 직접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장군의 방한 계획이 없음을 알게 된 무관은 일단 최씨의 편지와 성조기를 뉴우욕에 거주 중인 매카앗서 장군한테 보내기로 결정한다. 고급 자개무늬 상자에 담긴 성조기와 최씨의 편지를 받은 매카앗서 장군 측근은 파티를 열어 그 선물을 장군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77세의 퇴역 장군 매카앗서는 뉴우욕의 한 호텔에 기거하며 적적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를 위로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여튼 측근들은 그해 11월6일 파티를 연다. 파티에는 약 30명의 현역 또는 퇴역 장성들과 민간인 몇 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최규봉은 파티에 초청되지 않았다. 그 대신 장군의 친필서명 사진과 감사편지를 서울의 미국 대사관 무관 웰즈 대령에게 보내고 최규봉에게 전해주라고만 했다. 그 선물을 받은 최씨는 당시 한국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들을 양자로 바친 국회의장 이기붕 측근과 접촉, 매카앗서 장군의 편지와 사진을 이 의장을 통해 전달받는 형식을 취하도록 하는데 성공한다. 증정식은 그해 12월24일 국회의장실에서 열렸다. 그런데 최씨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이 전달식에서 최씨를 본 이기붕 의장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라고 말한다. 그러자 거기 참석한 한 사람이 최규봉을 이범석 장군의 측근이라고 소개한다. 이범석은 당시 이기붕이 싫어하는 정적의 한 사람이었다. 이기붕의 얼굴에서 갑자기 웃음이 사라졌다. 고위공직 자리 하나 쯤 기대했을지도 모르는 최씨에게는 날벼락이었다. ("국경 없는 기자단" 서울특파원 김비태가 Bridge 잡지 1997년 3월호에 쓴 기사 참조) 이런 일이 있은 후 몇년 동안 최씨는 결핵으로 요양원에 입원도 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것 같다. 그는 1962년 8월5일자로 매카앗서 장군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영어편지를 보냈다.(번역사가 대신 쓴듯). 그 때는 장군이 별세하기 2년 전이라 그 편지가 전달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매카앗서 기념관에는 최씨의 편지만 보관되어 있다. 최씨는 자기가 팔미도 등대에 꽂았다는 성조기를 10만불(요즘 가치로는 100만불쯤 될듯)에 사겠다고 한 미국 신문사도 있었으나 거절하고 그 기를 장군에게 보냈다고 한국 기자들에게 말한 적도 있다. 만일 그게 사실이고,그가 성조기를 팔았다면 나중에 장군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최규봉은 성조기를 고급 자개무뉘 상자에 넣어 매카앗서 장군에게 보내고그 답례로 받은 장군의 친필서명 사진과 편지 덕분에 한국에서 영웅이 되었고 1990년대 이후 한국 신문, 방송들이 많이 그를 소개했다. 그 사진과 감사편지를 최씨가 받게 된 경위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매카앗서 장군이 인정한 인천상륙작전의 영웅으로 생각할 것이다. 서울의 전쟁기념관에도 그 사진과 편지가 한 때 전시된 적이 있었다. < 사진 여기> <인천상륙 당일 미해군 함정 위에서 MacArthur장군을 만났고 성조기를 선물로 받았다고 거짓말한 최규봉씨> 필자는 2016년 10월15일 자동차로 5시간을 달려 미국 Virginia주 Norfolk시에 있는 MacArthur Memorial(매카앗서 기념관)을 방문했다. 그곳의 curator(큐어레이터/부관장) Corey Thornton씨는 내가 미리 부탁한대로 최규봉과 관련된 모든 서류 뭉치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성조기도 보여주었는데 그 기는 지금은 전시장에 있지 않고 창고에 들어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성조기를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최씨가 말한 작전명령 번호 같은 건 없었다. 다만 기의 가로 세로 길이와 기념관 자료번호(F6 139)만 적혀있는 평범한 성조기였다. 그런데 최씨는 그 성조기가 가짜라고 의심한 미국 대사관 무관들에 의해 반도호텔로 끌려가 밤샘 조사를 받았으나 그 기에 작전번호가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다고 거짓말을 했었다.(월간조선 2003년 9월호 기사 참조). <미국 국기 사진 여기> <최씨가 팔미도 등대에 게양했다고 주장한 성조기. 작전번호 같은 건 없다.> 매카앗서 기념관 archivist(아키비스트/고문서 전문가) James Zobel씨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최규봉씨가 2002년 그곳을 방문했을 때인터뷰를 요청하자 응했는데 녹음기를 켜니까 최씨가 갑자기 인터뷰를 중단했다고 한다. 영어에 자신이 없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최씨가 KLO (Korea Liaison Office) 대원으로 한국전쟁에서 대공 첩보활동을 통해 유엔군을 도운 전공은 한국에서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인천상륙작전 당일 매카앗서 장군을 기함에서 만났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또 팔미도 등대와 성조기에 관한 그의 말이 과장되었거나 일부는 허위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역사는 가능한 한 정직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필자는 최규봉씨를 만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그에게 아무런 개인 감정도 없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는 걸 망서리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가 가능하면 정확하게 기록되어 후세에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썼다. 최규봉씨가 매카앗서 장군을 직접 만난 일조차 없었다는 증거 매카앗서 장군은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오직 클라크 대위의 직속 상관들만 알고 있었다. 1965년 출판된 매카앗서 장군의 회고록 "Reminiscences"(회상)을 보면, 장군은 인천상륙작전 비밀이 적에게 누설되지 않았음을 자랑하면서 이렇게 썼을 뿐, 팔미도 등대 얘기는 한마디도 없다. "저 멀리 바다 위에서 불이 하나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인천항구로 들어가는 길목인) 비어수로에 항해등이 켜져 있었다. 적은 우리에게 완전이 기습을 당한 것이다. 적은 항해등도 끄지 않았다." (실제는 항해등이 전부 망가져 있었다.) 또 상륙 당일 장군을 바로 옆에서 취재한 미국 종군기자 칼 마이던도 TIME지(1950년 9월25일자)에 이렇게 썼다. "인천 항구 쪽에서 깜박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도일(Doyle) 해군 제독이 매카앗서 장군에게 '적이 (고맙게도) 항해등까지 켜놓았군요'라고 말하자 장군은 '(그 놈들) 예의 한번 바르군'이라고 말했다." 장군이 타고 있던 군함에서 팔미도 등대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였으므로 등대불이 항해등 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권위있는 한국전쟁사로 유명한 책 In Mortal Combat (John Toland 씀)에도 매카앗서 장군은 팔미도 등대 점등 보고를 받은 바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매카앗서 비평서인 MacArthur: The Naked Emperor (벌거벗은 황제 매카앗서)에도 매카앗서는 details(지엽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는 지휘관이라고 말하고, 팔미도 점등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도 최규봉은 그 바쁜 상륙작전 첫날 오전에 자기가 다른 5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매카앗서 장군을 함상에서 만났고, 소원이 뭐냐고 해서 팔미도에 게양된 미국 국기를 선물로 달라고 했더니 장군이 허락하더라고 황당한 거짓말을 했다. 이 장면이 2003년 9월호 월간조선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들은 9월15일 오전 10시경 발동선을 이용해 지휘함 마운트 맥킨리함으로 갔다. 윌러비 정보국장(소장)이 붉은 주단이 깔린 40 - 50평의 맥아더 방으로 대원들을 안내했다. 일렬로 늘어선 대원들은 맥아더에게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신고했다. 맥아더는 '정말 수고가 많았다'는 말로 악수를 대신했다. 방은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피아노와 책상, 소파가 전부였다. 깔끔하지만 호화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윌러비 국장은 특공대원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최규봉 대장은 작전에 사용한 성조기를 달라고 했다. 윌로비 국장은 즉답을 피하고 맥아더 방에 들어가 뭔가를 숙의한 후 OK라고 허락했다."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 있는 군함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최규봉이 요즘 말로 "소설을 쓴 것"이다. 장군의 방 싸이즈와 바닥에 깔린 주단의 색갈까지 소개하는가 하면 피아노가 있었다고 까지 했다. 그런데 상륙작전을 위한 정보 수집과 팔미도 등대 점등 작전의 지휘관 클라크 대위도 매카앗서 장군을 직접 대면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수기를 보면 알수 있다. 그가 연정, 계인주와 함께 인천상륙작전 당일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있던 기함 Mount McKinley호에 올라가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The Secrets of Inchon에서 인용) "날이 밝아 아침이 되자 클라크는 망원경으로 매카앗서 장군이 타고 있을 기함(旗艦) 마운트 매킨리 호(號)를 찾아냈다. 그리고 통통배를 타고 연정, 계인주와 함께 기함 쪽으로 접근해갔다. 기함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그의 해군 장교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흔들었다. 그러자 거대한 매킨리 호 함상에서 누군가가 메가폰을 입에 대고 '접근하지 말고 정지하라!'고 소리쳤다. 매킨리 호에서는 클라크 등이 타고있는 디젤엔진 통통선을 적의 자살특공 선박으로 의심한 것 같았다. 클라크는 통통선 선장(李씨로만 밝혀짐)에게 엔진을 끄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기함으로부터 소형 상륙정 한 척이 접근해 왔다. 거기에 탄 해군소위가 기관단총을 클라크 대위에게 겨누었다. "누구냐?" 소위가 물었다. "나는 미해군 대위 유우진 클라크다. 사람 다치기 전에 총을 치워라!" 클라크가 대꾸했다. 소위는 기함으로 돌아가 함장에게 미해군 대위라는 자가 이상하게 생긴 작은 발동선에 타고 있다고 보고했다. 함장이 "그 자가 우리 해군 장교라는 걸 어떻게 믿을수 있나?"고 묻자 소위는 "우리 해군 장교모자를 쓰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해서 클라크가 먼저기함에 승선, 신분이 확인되자 통통배에 남아있던 두 한국군 장교 연정과 계인주도 군함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클라크 수기에는 자기 혼자 또는 연정과 계인주를 데리고 함상에서 매카앗서 장군을 만났다는 말이 없다. 만일 만났다면, 수기에 반드시 썼을 것이다. 일개 해군 대위가 전설적인 5성 장군 매카앗서를 직접 만났다면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그런데도 수기에 전혀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가 장군을 직접 대면한 일이 없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이밖에도 최규봉 주장과 클라크의 기록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최규봉은 1950년 8월18일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 섬에서 클라크 대위를 처음 만났으며 그때 클라크로부터 Operation Chromite(인천상륙작전의 공식명칭)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라크는 8월18일에 일본 토오쿄에 있었으며 8월26일에야 유엔군사령부 소속 육군소장 홈즈 대거와 해군대령 에드워드 피어슨으로부터 Operation Trudy Jackson(트루디 잭슨 작전 즉 인천상륙 사전준비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 최씨는 9월9일 매카앗서 사령부로부터 팔미도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섬에 있던 북한군과 여러 차례 총격전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클라크 대위는 한국 해군 소령 연정과 9월3일과 9일 두 차례 팔미도에 들어가 보았으나 그 섬에적군은 없었으며 등대의 프랑스제 석유등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고 그의 수기에 썼다. 그는 등대 문에다 ""Kilroy Was Here! Sept. 9, 1950"이라고 장난삼아 써놓기까지 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군들이 어떤 곳을 먼저 점령했을 때 뒤늦게 오는 군인들을 놀려주려고 장난삼아 "킬로이가 이미 다녀갔다"고 쓰곤 했었다. 킬로이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동에 번쩍, 서에번쩍 신출귀몰하는 가상의 군인 이름이다. 그러니까 "홍길동이가 먼저 다녀가네!"라고 쓰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3> 최씨는 9뤌15일 오전 0시 40분에 불을 켜라는 명령을 자신이 직접 매카앗서 사령부로부터 무전으로 받았으나 전기등의 작은 나사 하나를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 15일 오전 2시 20분에야 점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나중엔 1시50분으로 고쳐 말했다). 그러나 클라크 대위는 사령부로부터 오전 0시30에 점등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 섬에 미리 가 있던 한국인 협조자들이 클라크와 연정을 적으로 오인하고 발포를 하는 바람에 20분 늦은 오전 0시 50분에야 등대 석유등에 불을 켰다고 기록했다. 하필 그때 클라크가 2주 동안 작전 본거지로 쓰고 있던 영흥도를 향해 북한군이 처들어오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흥도에서 멀지않은 팔미도에서 그런 아군끼리의 오인사격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 사진> 최규봉은 위 사진이 인천상륙작전 당일 오전 자기와 클라크 등이 매카앗서 장군을 만나기 위해 가는 장면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에 한국 해군 참모총장을 지낸 함명수 제독은 위 사진이 인천상륙작전 개시일인 9월15일 찍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사진에 보이는 두 미육군장교는 9월초에 이미 인천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함 제독과 그의 선배 이성호 제독은 ROKPC 703호 함정으로 클라크 팀을 지원했다. 이 제독도 후에 해군참모총장이 된다. 이 사진에서 군복을 입고 있는 체구가 작아 보이는 한국인은 얼굴 한쪽만 보여서 그게 최규봉(당시 27세)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최규봉씨가 당시 인천에서 찍었다고 내놓은 사진은 아직 본적이 없다. <여기 사진> 위 사진은 인천상륙작전 직전 2주 동안 클라크 팀을 도와준 한국인 지원자들과 찍은 사진이다. 최규봉은 이 유명한 사진에 자기가 들어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오른쪽으로부터 클라크 대위, 한 사람 건너 계인주 대령과 연정 대위다. 최씨가 클라크와 같이 찍은 게 확실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이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 총을 메고 흰 상의를 입은 청년이 자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에디 고(Eddie Ko / 2016년 80세로 사망)라는 재미동포인데 이 사진을 찍을 당시 자기가 14세 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는 클라크 대위의 총애를 받은 협조자였다고 말하고, 인천상륙작전 바로 전날 상륙비밀을 알아낸 인민군들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그들을 기습, 상륙작전 비밀을 아는 인민군들을 죽였다고 주장했다.(부산의 국제신문 이흥곤 기자 기사 참조). 그러나 클라크 수기에는 에디 고란 이름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한국영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서 2016년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개봉되어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 "인천상륙작전"을 보면 클라크 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임병래와 홍시욱을 포함한 한국인 17명이 모든 첩보활동과 전투를 도맡아 했으며, 팔미도 등대 점등도 한국인들만 9월 14일 밤 팔미도에 들어가서 인민군과 싸워 이기고 등에 불을 킨 것으로 그려져 있다. 영화니까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를 역사적 사실로 믿어버리면 클라크 대위 같은 진짜 영웅들을 잊어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준비작전의 최고지휘자는 유엔군 최고사령부가 직접 보낸 Eugene Clark 해군대위였다. 그는 그의 한국인 전우 연정이나 계인주와는 달리 전쟁이 끝난 후 자기 선전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인천에서 2주 동안 적어둔 일기를 50년 동안 벽장에 넣어두고 출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작고한 후 가족이 그 수기를 발견하고 그가 별세한지 2년 후 겨우 햇볕을 보게된 것이다. 이런 겸손한 영웅의 솔직한 일기가 책으로 발간된 것이 바로 The Secrets of Inchon이다. 이 책은 인터넷을 통해 쉽게 살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 70주년을 맞아 워싱턴에서 조화유 #최규봉 #팔미도 등대 #가짜영웅최규봉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