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이민자> 리뷰

성장하는 세계 속, 성숙해지는 법을 택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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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민(wlals523)등록 2021.01.08 14:47
물 한잔조차 자본화 되어가는 시대에 그럼에도 자본의 때를 입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어야 한다면, 그건 무엇일까. 아직까지 우리가 견고히 지키고 있는 감정과 정서가 아닐까. 이 또한 자극적인 미디어에 굴복할 때도 있지만 자본을 벗어난 정서적 만족이야말로 진짜 '순전한' 행복이란 생각이 든다. 그만큼 순전한 존재들이 되지 못해 자위와 자책을 반복하지만 결국 우리가 가장 바라는 이상은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영원한 자유일 것이다.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이민자>는 그런 온전한 자유와 정서적 만족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바라는 욕망 어딘가엔 사실은 그런 수수한 자유에의 갈망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 안에는 누군가를 향한 사랑도 있을 것이며, 사랑 받고 싶은 투정 섞인 욕심도 있을 것이며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으려는 단단한 주체감도 있을 것이다.

감독은 우리가 품은 그런 '꿈'과 그 꿈을 둘러싼 당시(1920년대) 미국의 배경을 엮어낸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막강한 부를 축적하며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선 나라로 자리매김하게 된 미국엔 이민자가 대거 유입되곤했다. 소위 말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자들은 앞으로의 삶을 꿈꾸며 낯선 땅에 발을 딛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과 새로운 삶에 대한 발판이었을 것이다. 잃을대로 잃어버린 사람들에겐 돈이 융통되는 나라가 가장 제격이었을테니 말이다. 당시 미국이 노쇄한 다리 위에 세워진 성전이었다 하더라도.

주인공 에바(마리옹 꼬띠아르)는 동행한 여동생이 입국거부를 당하자 맨하탄 빈민가에 혼자 남겨진다. 그녀는 동생도 구출해오고 돈도 벌어야 했기에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한다. 와중,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브루노(호아킨 피닉스). 작은 극단에서 여자들을 무대에 세우는, 여자들을 매춘 대상으로 삼는 포주였던 브루노에게 에바는 도움을 청한다. 브루노의 눈에도 에바가 들어온다.
브루노는 에바에게 지낼 곳과 일거리를 제안했다. 소극장 무대에 서서 남자들 앞에서 스트립쇼를 하거나 공연을 하는 역할이었다. 에바는 내키지 않아 브루노를 계속 경계하지만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올랐다.
에바가 맡은 역은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새희망과 자유를 무대 위 낯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기했다.
브루노는 그녀를 사랑했다. 계속 사랑하게 됐다. 그만큼 그녀에 대한 욕심이 커졌다. 그녀를 갖고 싶고,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에바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에바에겐 사랑 따위를 신경쓸만큼의 작은 여유도 없었다. 또한 브루노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그녀에게 일어나선 안 될 일처럼 그녀는 그를 경계했다. 얼른 동생을 찾아 떠나야 할 뿐이었다.

아이러니한건, 브루노는 에바를 무척이나 사랑하면서도 그녀에게 매춘을 권했다는 것이다. 그녀에 대한 소유욕이 지나칠정도로 심한 사람이지만 그녀를 잡기 위해선 자신이 하는 일에 동화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걸지도 모른다. 가학적인 판단이고, 사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설정들에 역해지기도 했다. 마치 고인이 된 김기덕 감독의 <나쁜남자>가 떠오르는 설정이기도 했으니까.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전부터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고 감독 자체에 대한 혐오감도 심했기에 비슷한 설정을 취한 영화만 봐도 감정이 격해진다.)

하지만 주인공 '에바'에게 초점을 맞춰 영화를 보다보면 <나쁜남자>와는 조금 다른 지점이 분명 존재한단 생각이 든다. <나쁜남자>의 경우, 매춘 당하는 여자보다 매춘을 시키는 한 남자의 절절한 사랑이 얼마나 숭고한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민자>는 브루노를 끝없이 정신병적인 증상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고, 결국 그를 떠나 자신을 굽히지 않는 에바의 모습을 그렸기 때문이다. 브루노보다 에바가 더 눈에 띄고, 눈에 띄어야만 하는 이유를 감독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뉴욕의 일면을 담으면서도, 추악함 속에서 한 명의 나약한 이민자가 어떻게 스스로를 지키며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던 시도가 읽혔다면 다행일 것이다. 사실은 조마조마하며 감상한 부분이 이런 지점들이었다.

극중, 브루노말고도 에바를 사랑한 인물이 한 명 더 나온다. 올란도(제레미 레너)라는 마술산데, 소극장 무대에서 시시한 마술을 선보이며 자유롭게 살기를 꿈꾸는 남자다. 에바에게 한 눈에 반한 그도 그녀와 함께 떠나고 싶어한다. 브루노와 사촌 관계인 그는 그런 욕심을 내비친 게 화근이 되었는지 브루노의 칼에 맞아 죽게된다.
이 영화는 에바를 향한 누구의 사랑이 더 대단한지 묻고 있는 영화가 아니길 바란다. 그게 초점이 되어서도 안 된다. 적어도 캐릭터를 자멸시키도록 하지 않으려면 절대적으로 에바의 꿈과 동생을 향한 사랑, 그리고 그녀의 행복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행히도 에바라는 캐릭터는 그정도의 안도감은 지켜줄 수 있을만큼 강인한 여성이었다. 설사 강인한 내면이 없다 해도 여성 인물에 대해 극중 인물들처럼 편견에 갇혀 그녀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인물을 믿고 영화를 시청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돈으로만 치장했지 제대로 성숙해지는 법을 몰랐던 당시 미국 뉴욕의 상황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지점들이 곳곳에 있다. 슬로건처럼 부르짖던 '아메리칸 드림'에는 여러 사람의 꿈이 있었을지언정, 사실 그 꿈을 향한 종착지가 '자본'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자극했을 지도 모를.) 지금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또한 담아냈다.
성장도 좋고, 남이 나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막강해지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힘 뒤에는 반드시 누군가의 피가 있고, 병적인 모습을 한 사람들이 있고, 한 사람분의 양도 채우지 못할만큼 굶주린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내내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에바의 동생을 향한 사랑과 스스로에 대한 주체적 정서가, 허황된 '아메리칸 드림' 무대에서 끝까지 견고하길 바랐다. 영화도 마치 그것을 바랐던 것처럼 에바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여주며 서서히 어두워진다.

끝으로 에바가 이모에게 도움을 청하며 했던 대사를 적어본다.

"이모, 온갖 시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발버둥을 친 게 죄일까요?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살기를 바라는 건 죄일까요? 이모는 제가 구원 받으리라 믿어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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